산골짜기 의료정보학 이야기 번외편 #6
이번 편은 일단 Judy Faulkner의 패션 센스를 보여주는 사진들로 시작하겠습니다.
전편에서 현재 진행중인 의료정보 주도권 전쟁은 결국 데이터를 누가 주도해서 어떻게 통합할 것인가의 싸움이라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의료정보학의 발전 과정을 돌아보면, 궁극적으로 데이터는 점점 더 통합되고 연결되는 방향으로 간다는데 다들 이견이 없는 듯 합니다. 문제는 그게 병원 중심의 통합이 될 것인가, 환자 중심이 될 것인가, 의료정보업체인가, 내지는 IT 테크 자이언트 중심이 될 것인가입니다. 당연히 EMR회사들은 자사의 시스템 내에 축적된 의료정보를 중심으로 외부의 데이터를 통합하고 싶어하고, Ancestry같은 Direct To Consumer 유전정보회사는 기존에 확보한 유전체 데이터로부터 건강데이터를 통합/확장하고자 합니다. 테크 자이언트의 경우 IBM 왓슨처럼 직접 임상에 뛰어들어 아예 입력단에서부터 스스로 데이터를 수집하려고 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떻게든 의료정보 회사들과 파트너십을 맺거나 인수 합병을 통해 통합하려는 비즈니스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사실 헬스케어 분야의 특징이 워낙 다양하고 세분화되어 있다는 것인지라 상업용 의료정보 시스템의 역사는 각각의 분야에서 발전해온 수많은 개별 애플리케이션과 시스템들이 인수합병을 통해 통합되어 왔습니다. 이 전략의 끝판왕은 McKesson이라는 회사인데, Vince Ciotti라는 유명한 의료정보시스템 컨설턴트가 정리한 아래 차트를 보시기바랍니다.
그런데 Epic의 경우는 어떤지 아래 차트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 차트는 Epic이라는 회사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Judy Faulkner의 40년 리더십 아래 Epic은 창업때부터 늘 한결같은 비즈니스 전략과 기업 문화를 유지해왔습니다. 대표적으로 엔지니어 중심문화와 마케팅의 최소화, 인재의 외부 수혈보다는 처음부터 신입사원을 뽑아서 Epic man으로 키우는 세뇌시키는 전략, 인수합병을 하지 않고 필요한 컴포넌트는 Inhouse개발을 통해 제품군을 확장하는 방법을 통해 느리지만 천천히 꾸준하게 성장하였습니다. 얼마전 Becker's hospital review라는 헬스케어 관련 웹진의 에디터인 로라 밀러는 Epic이 얼마나 지배력있는 회사인지 숫자로 말해주는 기사를 올렸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More than 250 million patients have electronic records in Epic.
2. Epic has 28 percent of the acute care hospital market, according to a KLAS report.
3. There were 163 hospitals with 500-plus beds that used Epic in 2018, the most recent year reported. The second most-used EHR in that group was Cerner, with 77 hospitals that have 500 or more beds.
4. Epic implementation among small practices is increasing as those practices with one to 10 physicians join or affiliate with larger organizations. Among those groups, 93 percent said Epic Community Connect is part of their organization's long-term plans and 93 percent said they would purchase the software again, according to KLAS.
5. Over the past five years, at least 11 hospitals and health systems switched from Cerner to Epic, including most recently AdventHealth in Florida and Atrium Health in North Carolina.
필자 개인적으로는 5번 항목의 의미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EMR 시스템은 워낙 임상 프로세스에 밀접하게 붙어있어서 한번 도입하면 빨대 꽂히면 바꾸기가 쉽지 않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Advent Health같은 대형 의료시스템이 업계 2위인 Cerner 시스템을 엎어버리고 Epic으로 갈아탄 것입니다. 이와 관련한 재미있는 통계가 있는데, 2019년 KLAS의 EMR 시스템 사용자 평가 랭킹에서 Epic은 2위와의 큰 차이로 역시나 1위를 했는데, Epic의 점수는 B+이었고 2등부터는 C이하라고 합니다. 이 통계는 전반적으로 EMR시스템에 대한 현업에서의 만족도가 얼마나 낮고 Epic이 개중에 낫다고는 하나 아직도 갈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무튼 이렇게 잘나가는 Epic이긴하지만 디지털 헬스케어 시대에 더이상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는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되었는데, 가장 큰 이유은 고비용입니다. EMR은 현재 여러모로 의료분야에서 공공의 적이 되었는데 그 원인 중 하나는 너무 비싼 설치/유지비입니다. 그나마 쓸모라도 있으면 비싸도 그런가보다 하겠지만 사용성도 엉망이면서 비싸니 지금까지는 Meaningful Use, 21 century cure act 등의 인센티브 때문에 울며 겨자먹기로 버텨온 의료기관들은 더이상 못참겠다고 아우성치기 시작합니다. 이와 더불어 EMR 시스템 자체만으로는 회사가 성장하는데 한계가 있고 빅데이터나 컨슈머 헬스 등의 병원 밖의 큰 시장의 기회를 놓칠수 없기에 EMR 회사들도 어쩔수 없이 외부와의 협력을 모색합니다.
EMR 시스템의 비용을 낮추고 확장성을 높이는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바로 "헬스케어 클라우드" 시스템입니다. 그동안 의료정보시스템은 다른 분야보다도 상대적으로 민감한 환자정보의 보안 문제로 시스템은 왠만하면 (물리적으로) 의료기관 내에 두어왔는데 이제는 클라우드 기반으로 옮기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선택이 되어버렸습니다. 이와 더불어 미국 내에서는 환자정보를 기관 밖에 둘 수 있도록 하는 법적, 제도적 뒷받침이 이루어짐으로서 EMR 벤더들, 특히 업계 2위의 Cerner는 적극적으로 클라우드화를 추진합니다. 지금은 Allscripts에 인수된 PracticeFusion이라는 회사는 아예 시작부터 100% 클라우드 기반 EMR을 표방하기도 했습니다.
테크 자이언트들의 입장에서도 헬스케어 클라우드는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 애플을 제외한 테크 자이언트들은 환자 정보를 직접 수집하는 것은 거의 손 놓은 상태였는데, 미국인들의 실리콘 밸리에 대한 불신이 심각한 수준으로 커졌기 때문입니다. 지난 수년간 구글과 페이스북이 대형 보안사고를 치고 저커버그가 청문회에 끌려나가는 등의 사건을 겪은 미국인들은 테크 자이언트들에게 내 건강정보를 줄 수 없다는 마인드가 형성됩니다. (아래 Rock Health의 차트를 보면 미국인들이 그렇게 못 믿는 정부보다도 신뢰 수준이 낮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호시탐탐 노렸던 의료 데이터가 제발로 자기네 클라우드 안으로 들어온다니 이게 왠 떡인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결국 Epic과 Meditech는 구글과, Cerner는 아마존과 파트너십을 맺고 EMR을 클라우드로 옮기기 위한 통합을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구글은 아마존과 MS에 밀려 만년 3위인 클라우드 마켓쉐어에서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Epic에 수백만 달러 상당의 파격적인 가격 할인을 제공하며 적극적으로 파트너십을 추진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파트너십은 뭐 좀 해보지도 못하고 얼마 못가 끝납니다)
이와는 별도로 의료정보의 제약없는 공유과 활용을 줄기차게 추진해 온 ONC는 2015년 EMR 시스템 벤더가 의료정보를 독점하는 행위에 제동을 걸기 위해 Information Blocking라는 보고서를 만들어 의회에 제출하였습니다. 여기서 Information Blocking이란 기술적 또는 비즈니스적으로 다른 시스템이 합법적으로 의료정보를 연결, 공유하거나 활용하는 것을 암묵적으로 방해하는 Epic이 맨날 하는 모든 행위라고 정의합니다. 이 보고서에서 대놓고 얘기하지는 않았지만 누구를 겨냥한 것인지는 뻔합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테크 자이언트들은 음으로 양으로 ONC와 CMS를 지원사격하며 2018년에는 백악관에서 IBM, Google, MS, Salesforce, Amazon 등이 모여 의료정보 상호운용성을 개선하기 위해 다같이 FHIR를 쓰자고 선언하는 등 분위기를 띄우며 전방위 압박을 가합니다. 여기에 트럼프 행정부가 의료분야에서 상대적으로 유연한 규제를 추구하고 비즈니스 친화적인 인물들을 포진시키며 운때가 맞아떨어지며 결국 2019년 12월 ONC는 21세기 Cure Act (법안)의 Rule (시행령)인 Interoperability rule을 제정하게 됩니다.
https://www.healthit.gov/curesrule/download
전편에 소개한 대로 Epic은 자사의 클라이언트 의료기관들에 ONC의 Rule에 반기를 들자고 공개적으로 촉구하였으나 기대만큼 큰 호응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합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Epic이 이길수 없는 싸움을 한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몇가지 상황을 반전시킬만한 카드는 있었다고 봅니다. 그 중의 하나는 보안 문제인데, Epic이 Rule을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표면적으로는 환자정보의 보호입니다. ONC의 Rule은 어떤 써드파티 애플리케이션이든지 환자의 동의만 받으면 제한없이 EMR시스템으로부터 FHIR API를 통해 그 환자의 정보를 받아올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앱개발 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앱스토어에는 무수히 많은 쓰레기 앱들이 있으며, 동의 클릭 한번만 받아내고 나면 그 정보로 뭘 할지 통제가 쉽지 않을 것은 명확합니다. 또한 2019년 한해만 해도 여러건의 대형 환자정보 보안사고가 터졌었고, 이런 우려때문에 American Medical Association같은 의료단체가 Epic의 손을 들어주기도 했습니다.
Epic은 표면적으로는 자신들이 Rule 자체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며 보안과 관련된 독소조항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현실적으로 이렇게 Epic이 ONC에 대항하는 세력를 규합하면서 시간을 끄는 동안에 정보 보안 사고가 제대로 한방만 터져주면 상황을 반전시킬 계기가 될 수 있긴 했었습니다. 하지만 작년 12월에 Rule이 공표되고 올해 3월 10일에 Finalize되기까지 이 천금같은 시간에 그분이 오시면서 이슈는 완전히 묻혀버리고 맙니다.
Becker's Hospital Review의 Laura Miller는 이 싸움의 승자와 패자를 다음과 같이 정리하였습니다.
승자
환자: 환자들은 이제 자신의 데이터에 대한 권한을 더 많이 갖게 되었고 써드 파티 앱을 통해 활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러 의사들 사이에서 진료를 받을때 진료정보를 가져가기에도 수월해졌음. 결론적으로 더 많은 의료서비스 선택권을 갖게됨
병원과 의사: 환자의 의료정보를 취급하는 길고 지루한 과정이 줄어들 예정. 올드한 팩스 전송 방식은 이제 안해도 됨. 메디케어와 메디케이드 서비스를 제공하는 병원들은 다른 병원이나 의료인들에게 전자화된 메세지를 보낼수 있게 됨.
앱 개발자들과 IT 스타트업: 환자가 동의하는 한 앱 개발자들은 환자의 의료정보에 완전한 접근권을 갖게 됨 ( Virtual gold mine!!!)
Apple과 Microsoft: 의료기관들은 환자의 동의하에 애플 헬스 레코드와 Microsoft가 개발중인 시스템 (뭔지는 모르겠으나)에 의료정보를 제공해야 함.
패자
환자: 새 시행령이 환자에게 여러모로 득이 되는 반면 한편으로는 재앙이 될 수 있음. 법적으로 환자가 엡에 다운받은 개인정보는 공유하거나 팔수도 있는데 만약 앱이 해킹되면 보안 문제가 될 수 있음. 또한 정보가 잘못되거나 명확하지 않으면 자신의 건강정보나 치료내역에 대해 잘못 혼동될 수 있음
병원과 클리닉: 보안사고가 더욱 빈번해질것으로 예상됨
EHR 벤더: EHR회사들은 반드시 써드파티 앱과 인터페이싱할수 있는 API를 설치해야 함. 2년의 기간이 주어지며 만약 Information Blocking에 관여될 경우 건당 최고 $1 million의 벌금을 물수 있음. Epic과 Cerner는 독점적인 위치가 흔들릴 수 있음.
Epic: 가장 큰 패자. 줄기차게 이 Rule을 반대해온 Epic은 별다른 큰 저항도 못해보고 통과되는 결과를 봐야 했음. Epic은 자사의 EMR 시스템을 그동안 칼을 갈아온 실리콘밸리 경쟁자들에게 활짝 개방하게 되었음.
결과적으로 이번 싸움의 최대 패자가 된 Epic은 정말이지 Epic답게 싸웠습니다. Epic의 이러한 똘끼는 춥고 조용한 유타보다 훨씬 시골인 위스콘신에서 40년이라는 역사동안 EMR 한우물만 파온 장인정신의 회사이기 때문에 만들어진 기질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묵묵히 기술개발에 힘쓰고, 고객을 항상 우선 가치로 두며, 외연적인 성장에 한눈팔지 않고 천천히 전진해온 Epic이기에 필자는 이후의 행보가 또 기대됩니다. 어쩌면 Epic은 다음 단계를 이미 준비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Epic과 골리앗이 앞으로 어떤 싸움을 해 나갈지 흥미진진한 전개를 기대합니다. 근데 아무도 관심이 없..............
Acknowledgement: 시대를 앞서간 명저 "헬스케어와 클라우드의 만남"은 신수용/박유랑 교수님의 저서입니다. 혹시 필자가 쓴 책으로 혼동하실까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