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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H Green Oct 07. 2024

차별과 분리는 ‘미래 교육의 적’

2023.11.20

나는 그저 운이 좋은 자일 뿐이다. 나의 사촌 동생 중에는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이가 있으며, 나의 고등학교 시절 동급생이 중증뇌병변 장애 학생이었고. 그리고 초등학교 친구와 대학 후배 중에는 소아마비로 하반신이 불편한 학생이 있었다.


‘내가 운이 좋다고 표현한 것’을 오해하지 마시라. 내가 그런 장애가 없어서 운이 좋다는 것이 아니니. 나는 내 주변에 이런 친구와 사촌 동생 덕분에 그들을 나와 다르게 보지 않게 된 것이어서 운이 좋다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그리고 한참 사춘기 시절과 대학생 시절 나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지금보다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더 차가웠던 때 나는 아무런 선입견 없이 그들과 시간을 보냈다. 함께 놀고, 함께 배웠다.


반응의 속도와 배움의 속도와 방향이 다를 뿐, 그들은 어떤 것에는 오히려 나보다 뛰어나게 잘하기도 하고 더 세심하고 민감하고 친절했다. 이런 행운의 시간들 속에서 성장한 나는 누구에게든 강하게 말할 수 있다. 누구와도 차별 없이 어울려야 아이들은 배우게 되고 제대로 행동하게 된다고.


대안학교를 찾는 청소년 중에는 배움에 느린 학생들이 있다. 학교라는 시스템에 잘 적응하는 아이들에게만 시선이 고정된 사람들에게 그들은 다른 이들의 성장에 방해물로 보인다. 이 얼마나 오만하고 섬뜩한 차별인가!


다른 곳도 아닌 학교는 학생들의 교육에 ‘평균’ 혹은 ‘표준’이라는 것에 순응하는 순간 ‘미래’가 어두워진다. 보편교육을 가르치는 학교의 모든 교육 방법과 시스템은 짧게 잡으면 100년 길게 잡아도 200년 정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오면서 학교는 변해왔고, 지금도 변하고 있고 앞으로도 변해야 하는 기관이다.


그 변화 중에 오늘 필자는 ‘통합교육’을 넘어 ‘포용 교육’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1970년대 시작된 ‘통합교육’은 단순히 장애 유무의 문제나 능력의 차이를 넘어 지금은 다양성과 차이를 수용하고 포용하는 것으로 확대를 요구받고 있다. 나는 ‘통합’보다 ‘포용’이라는 표현이 학교 현장에 흡수되기를 강력하게 바라는 교육자이자 2023년을 살아가는 시민이다.


이미 20년 전인 1994년 유네스코 「살라망카 선언(Salamanca Statement)」에서 통합교육(Integrative education)과 차별화된 개념으로 포용(포함) 교육(Inclusive education)을 정의하였다.


학교 교육에서 포용은 ‘모든 학생이 가치 있고 존중받는다고 느끼며, 뚜렷한 소속감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것이다. 영어에 ‘All means all’인 것처럼, 포용교육 안에서는 어떠한 아이도 차이에 대한 차별이 없어야 한다. 즉 완전 포용(Full inclusion)을 학교 교육은 실현해 나가야 한다. 차별하고 분리하는 교육은 절대 ‘미래’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살라망카 선언에서 제안한 포용 교육의 정의

포용적인 학교의 근본 원칙은 모든 아이들이 보이는 어려움이나 차이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한 함께 배워야 한다는 점이다. 포용적인 학교는 학생들의 다양한 요구를 인식하고 대응해야 하며, 서로 다른 학습 스타일과 속도를 수용하고 적절한 교육과정, 체계적인 배치, 교수 전략, 자원활용, 지역 사회와의 협력을 통해 모든 학생들에게 질 높은 교육을 보장해야 한다. 각 학교에서 직면하는 학생들의 특별한 교육적 요구에 맞추기 위해 지속적인 지원과 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한다.(UNESCO, 1994)



경쟁을 통한 교육의 성과에만 경험과 보상을 받았던 자라면 나의 이런 이야기가 이상하고 불편할 수 있다. 더 심하게는 나를 공격하고 싶어 근질근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포용교육은 전 지구적인 인류의 보편적 교육의 흐름이다. 이를 거스르는 것은 과거로 향하는 퇴행일 뿐이다. 포용교육의 포기는 신분으로, 성별로, 피부색으로 나눴던 그 과거로 교육을 되돌리자는 것과 똑같은 것일 뿐이다.


나는 시대적으로 여성을 차별했던 학교 교육안에서 성장하면서 그 성차별이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지 잘 알기에 싸워왔다(여전히 싸우고 있다). ‘여자는 기계를 못 다뤄, 여자는 수학을 못 해, 여자는 공대 갈 수 없어, 여자는 많이 배우면 쓸데없어, 여자는 리더십이 약해, 여자는 여자는... ’.


지금은 절대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수많은 성차별이 학교 교육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루어졌던 시간을 살아오면서 아무런 가치도 없는 것에 사회가 얼마나 많은 낭비를 했는지 충분히 경험했다. 자신이 선택하지도 않았던 ‘성’ 하나가 너무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으로 나누고, 그것도 다른 성의 타인이 규정하였던 오랜 시간 동안 수많은 여성들의 삶은 비참했다.


이런 배제와 차별을 직접 경험해서 그런지, 나는 다른 어떤 배제와 차별에 매우 민감하다. ‘배제와 차별’이라는 느낌이 오면 ‘분노의 버튼’이 작동해 참지 못하고 상대에게 사나워지기도 한다.


21세기, 나의 ‘분노의 버튼’이 사라져야 할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요즘은 그 분노의 버튼을 더 자주 누르게 된다. ‘성적’이라는 것으로 차별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고, 심지어는 ‘실패자’라는 낙인이 10대 청소년들에게 찍히기 때문이다.


다양성에 대한 포용을 포기하는 사회는 아무런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지옥 같은 곳일 뿐이다. 학교 교육이 포용을 포기하는 순간 모든 것은 비정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피해가 남의 일이라 여기는 분이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여자의 지적 능력이 남성의 지적 능력에 비해 매우 낮다고 믿었던 자와 같은 수준의 무식한 판단일 뿐이다.


배제와 차별이 무서운 이유는 사람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든 그 희생자는 모르는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와 당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배제와 차별을 없애야 하는 1차 기관은 학교다. 12년의 초중등 교육 동안 학교는 미래 세대에게 버려야 하는 낡은 가치가 아닌 미래가치를 제대로 가르쳐야만 하는 책무가 있다. 이는 선택이 아니다. 학교 교육에 종사하는 모든 교육자의 의무다. 포용교육은 우리 교육기본법 제2조의 교육이념에 나타난 ‘민주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는 기본 중의 기본이다.


학생들이 개별적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고 감사하고 서로 알아가고 함께하는 태도를 가질 때, 비로소 학교 교육이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지 않을까. 생태계의 건강함이 생물다양성에 있다는 것이 상식이듯, 다양성을 포용하는 교육을 위해 오늘도 나는 여전히 사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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