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블랙코미디
한재림 감독의 네 번째 장편작 <더 킹>은, 본인의 이전 필모그래피의 장점을 두루 갖춘 수작입니다. <연애의 목적>의 재기 발랄한 유머에 <우아한 세계>의 주제의식과 분위기를 더했습니다. 전두환 정권부터 이명박 정권까지의 한국 현대사를 재조명하며, 영화인지 실제인지의 모호한 느낌을 받게 되는 영화입니다. 굉장히 친절한 영화이기 때문에 정치를 잘 몰라도 쉽게 볼 수는 있을 겁니다. 물론 알고 있다면 연상되는 실제 사건들이 떠올라 더 재밌게 볼 수도 있겠지만요.
호불호가 갈릴만한 요소가 많습니다. 가장 크게 갈릴만 한 게, 영화의 전체적으로 깔려 있는 태수의 내레이션입니다. 내레이션을 비롯한 여러 영화 속의 요소 때문에, 마틸 스콜셰지의 영화인 <더 울프 월 스트리트>나 <좋은 친구들>이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내레이션이 줄 수 있는 장점은, 조금은 멀게 느껴질 수 있는 정치라는 소재를 조금 친밀하게 느끼게 끔 할 수 있죠. 또한 태수라는 인물의 감정선을 따라가며 그에게 공감하며 영화를 볼 수 있기도 하고요. 물론 그럼에도 내레이션이 과하게 느껴질 경우엔, 그에 따른 피로도를 느낄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의 경우엔 내레이션을 끝까지 이어간 건 과하게 친절했다고 봐요.
영화의 장르도 그러합니다. <더 킹>은 기존에 많이 나왔던 부조리한 권력을 다룬 영화들과는 결이 다릅니다. 아마도 블랙코미디에 가깝겠죠. 가령 정의로운 인물 혹은 정의로워지는 인물이 권력에 대항하여 정의를 찾는 영화는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에서 통쾌함이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는 어렵습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이 다름이 너무 좋았습니다. 어쩌면 뻔하다고 느끼면서도 계속 보게 되는 그런 류의 영화를 생각하고 극장을 찾으신 분들이라면, 이 영화의 낯섦에 당황할지도 모르겠네요.
굉장히 스타일리시합니다. 영화의 초반부는 부감 쇼트가 굉장히 많이 사용됩니다. 더불어 롱테이크를 비롯한 카메라 워킹의 적절함으로 외부자로서 그들의 세계를 엿보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장면 전환도 독특했고 편집 또한 좋았습니다. 태수의 권력을 태수가 존재하는 공간의 넓어짐과 좁아집으로 표현했다는 것도 탁월했구요. 특히나 저는 영화에서 쓰인 음악이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뭔가 대단하거나 추잡스러운 상황이 나와야 될 것 같은 곳에서 이어지는 음악이 '버스 안에서'라니.
보통 이렇게나 주연급 배우들이 많이 나오는 영화에서는, 일부 캐릭터의 이미지 구축에만 집중되어 다른 배우들은 상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덜 받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허나 <더 킹>에서의 배우의 활용은 정말 좋았습니다. 저는 배성우 배우의 연기가 베스트였습니다. 특히나 좋았던 건 이 영화에서 그려내는 여성 캐릭터였습니다. 영화에서 대표적으로 나오는 두 여성 캐릭터는, 모두 피동적이지 않고 주체적인 성향을 띄고 있습니다. 김아중 배우가 연기한 상희라는 캐릭터가 행하는 몇몇 선택의 이유가 기존의 영화와는 달라서 좋았습니다.
영화의 단점이라고 느껴지는 부분은 크게 없습니다. 표현하자면 위에서 말했듯 호불호가 갈릴 부분은 생각보다 많죠. 굳이 따지자면 134분이라는 러닝타임은 생각보다도 더 길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딱히 불필요하다 생각되는 부분은 없었다는 것은 다행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부분이 많으니 유의해주세요.
영화는 태수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됩니다. 거의 모든 시점을 태수의 내레이션을 따라 이어가죠. 단순히 스토리만 놓고 보면 이 영화는 평이합니다. 권력에서 버림받은 인물이 다시 절치부심하여 그들에게 복수하는 뻔한 이야기이죠. 다만 스토리는 평범할지 몰라도 영화는 뻔하지 않습니다. 영화 속엔 흥미로운 요소가 많거든요.
어떠한 시점으로 영화를 보느냐에 따라 굉장히 다른 느낌을 받을 듯합니다. 극 중의 한강식의 행동에 대해서 대다수의 국민들은 분노를 느낄 거라 생각합니다. 허나 영화의 말미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한강식을 그렇게 나쁜 사람으로 직접적으로 묘사하진 않고 있습니다. 정말 자신이 대한민국의 역사인 양 당당합니다. 물론 한강식이 실제 인물을 아니지만, 실제로는 아마 한강식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그들이 더킹을 본다면 한강식을 악역이라 생각할까요? 오히려 그들은 이 영화의 교훈은 '개는 주인을 물 수 있으니 확실하게 키워야 한다'라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한강식이라는 인물이 그 자리까지 갈 수 있었던 건, 철저히 만들어진 이미지 때문일 겁니다. 태수는 어린 시절 한강식을 동경하고, 그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뉴스나 신문에선 그들의 겉모습만 보여주지, 그의 뒷모습은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화 속에서 나오는 '이슈는 이슈로 막는다'라는 말이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할 정치적인 이슈를 막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고작 연예인의 가십거리입니다. 그런데 이게 영화 속의 이야기만이 아니라는 것이 정말로 뼈 아픕니다. 영화의 메시지는 확실합니다. 우리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
만약 태수가 의로운 인물이었다면 저는 이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을 겁니다. 영화 속에서 의로운 사람이 없다는 점이 좋았습니다. 악과 차악을 다투는 인물들만 존재합니다. 물론 두일이 태수를 구해준 것을 두고 의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허나 그것은 우정을 생각한 행동이지 의로운 행동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두일의 더러움이 씻기는 건 아니구요. 물론 두일의 그런 행동 때문에 '누가 검사인지 깡패인지 모르겠다'라는 내레이션이 설득력이 있어 보이긴 합니다.
어찌 됐건 이 영화에는 정의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안희연 검사를 정의로운 사람이라 볼 수도 있으나, 그의 행동 역시 권력을 위한 수단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대사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정의보다는 검사의 위신이 먼저죠. 마찬가지로 태수도 정의를 위하여 한강식에게 복수한 것이 아닙니다. 복수를 위하여 만들어진 정의로운 사람인 거죠. 영화의 후반부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이 또한 미디어가 만들어 낸 이미지입니다. 만약 영화를 보며 이 모든 전말을 알고 있음에도 박태수를 국회의원으로 뽑아야 한다고 생각하신다면, 이것 역시 영화가 만들어낸 이미지에 속은 겁니다.
태수의 대사 중에 과거의 다른 선택을 했었다면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투의 후회 섞인 내레이션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전 장면에서 자신의 집 앞을 찾아온 한강식과 양동철의 차의 헤드라이트에 비친 태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개인적으로 제일 좋아하는 대사와 장면입니다. 마치 모든 것에서 버림받은 상황에서 구원받은 듯한 표정입니다. 한 번 권력을 맛본 사람은 그걸 쉽게 놓지 못한다고 하죠. 이 두 장면을 연계시켜보면 그가 후회하는 것은 의로운 행동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후회가 아니라, 지금의 자신의 상황을 만든 자신에 대한 후회인 것입니다. 우리가 수 없이 볼 수 있는 뉴스에서 그들이 말하는, 국민에게 송구하고 저 자신에게 후회한다는 말이 과연 어떠한 행동에 대한 후회일까요.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미디어에 속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절대로 전부는 아니니깐요. 그럼에도 우리가 조금이라도 덜 속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 간단합니다.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다소 무거운 말이기에 언급하기 조심스러우나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이 있습니다. 저는 이에 덧붙여, 정치를 외면한 국민에게 미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과거의 과오를 잊지 말고, 현재의 공권력에게 관심을 갖는다면, 더 나은 미래가 올 거라 생각합니다.
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