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으려는 노력조차 않는 자들에게. '재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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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은 가까운 곳에 있다.
자주 쓰이는 문구 중 하나다. '진실'이 아니더라도 '행복'이라는 단어 등으로 대치시켜서 사용되는 문구다. 와 닿지 않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영화 '재심'(김태윤 감독, 런타임 119분)은 끊임없이 이 문장을 반복한다. 진실은 가까운 곳에 있다고. '재심'은 진실을 찾아낸 사람들과 찾기를 거부한 사람들 간의 갈등을 그려낸다.
2000년, 익산 약촌오거리에서 한 택시기사가 살해당한다. 진범은 사건 현장을 벗어나고, 대신 우연히 사건 현장에 있었던 소년 '현우'(강하늘)이 누명을 쓰고 10년간 옥살이를 하게 된다.
한편 '준영'(정우)은 여러 실수 끝에 돈과 명예 모두 실추한 변호사다. 친구 '창환'(이동휘)을 통해 로펌에 들어가기 위해 허드렛일(무료 법률 상담)을 하다가, 2000년에 일어났던 일명 '익산 약촌오거리 사건'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준영은 이 사건을 해결한다면 분명 로펌 내에서 자리매김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사건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조사를 진행하면서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느끼고 이 사건을 단순히 명예와 돈을 위한 길이 아닌, 마땅히 변호사로서 현우의 누명을 벗겨줘야 하는 책임감을 가지기 시작한다.
경찰은 현우가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과 그의 오토바이 안장 밑에서 발견된 칼을 빌미로 범인으로 지목한다. 경찰은 지속적인 폭행 끝에 현우에게서 거짓 진술을 받아 낸다. 칼이 살해된 택시 기사의 상처 너비와 일치하지 않자 현우의 집에서 크기가 일치하는 칼까지 찾아온다. 취조 과정에서 그들은 현우의 몸에 그려진 문신을 보고 말한다.
너 같이 몸에 낙서한 놈들이 사람 죽이더라.
현우의 겉모습만 보고 뱉은 저 발언과 같이 경찰은 제대로 된 진위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보이지 않는다. 이 점은 사건 현장에 있었다는 사실과 안장 밑에서 칼이 발견됐다는 사실 만으로 현우를 범인으로 몰고 가는 모습에도 드러나지만, 경찰이 오토바이 안장 밑을 확인할 때에 상징적으로 표현된다. 안장 안에는 검정고시 대비 문제집과 칼이 들어 있었다.
검정고시 대비 문제집은 현우의 '순수함'과 '진심'을 뜻한다. 다방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동료 '수정'(김연서)을 멀리서 바라보고 그 책 안에 그림을 그리는 모습과 아버지 뻘 되는 사람들이 와서 수정의 허벅지를 주무르는 것을 불편해하는 마음을 상징한다. 칼 또한 문제집과 동일 연장선 상에 놓인다. 다방 주인의 겁탈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수정이 휘두르는 칼을 현우는 빼앗는다. 현우는 수정이 저지를 뻔한 살인을 막아낸다. 폭력의 상징물인 칼 또한 현우의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경찰은 칼 바로 밑에 있던 그 책을, 칼 속에 숨겨진 일화를, 그리고 현우의 진심을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우를 범인으로 지목하기 위한 명목이다.
이 영화에서의 '악'은 진실과 진심을 외면하는 이들로 구성돼있다.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현우의 참된 모습을 본다. 그런 이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현우의 어머니'(김해숙)다. 현우의 진심을 가장 또렷하게 보는 인물 중 하나인 그녀는 모순적으로도 눈이 보이지 않는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준영 또한 현우의 순수함에 눈뜨게 된다.
법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믿으며 경찰에게 직접 복수하려는 현우를 준영은 막아 세운다. 칼을 뽑아 든 현우에게 준영은 본인이 사건 해결을 통해 유명해지려고 했던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준영은 현우에게 차라리 자신을 먼저 찌르라고 한다. 준영이 본인의 목 앞에 칼을 가져다 놓음에도 불구하고 현우는 찌르지 못한다. 그러는 현우에게 준영은 말한다.
못 찌르겠지? 너 살인범 아니라 그래. 넌 살인범이 될 인물이 아니야. 내가 널 알아.
그리고 약속한다.
내가 법정에서 증명해줄게 너! 절대 살인범 아니라고!
준영은 현우의 진심을 제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긴 여정을 거쳐야 했다. 그는 동료의 배신, 외부의 압박, 돈에 휘둘리는 이해관계 속에서 몇 번이나 사건을 포기할 뻔했다. 하지만 그런 난관을 통해 준영은 결국 현우의 진실을 보는 법을 익힌다. 하지만, 준영은 현우의 진실만 보는 방법만 익힌 것이 아니다.
그는 진실과 진심을 찾는 노력을 하는 방법을 배운다.
영화는 재심 과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 초반부에 사용됐던 현실과 과거 간의 간격을 카메라 무빙으로 메우는 기법 등으로 재판을 보여줬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 내에서 가장 매끄럽게 표현된 장면 중 하나였다. 현재에 서 있는 준영의 시야에 자연스럽게 과거의 사건 현장을 불러내는 모습은 감탄을 자아냈다.) 하지만 재심 과정이 없어도 영화의 메시지는 뚜렷하다. 진실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을 감독은 강조한다. 그리고 그런 진실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못한 이들을 규탄한다.
본인도 그런 적이 있었는지 생각하게 되는 영화다. 진실을 못 찾은 게 아니라 내가 찾으려는 노력을 한 적이 없었던 것이 아닐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