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이 홍대영을 위해 쓰는 리뷰
*본 리뷰는 <18어게인> 1~8화를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농구선수로서의 꿈은 다정과 아이들이 미래라고 했던 2001년 멈춰 선 줄 알았다. 그 뒤로 성종전자 서비스1팀 사원이 되기 전까진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꾸려가기에 바쁜 시간이었을 거라 당연하게 여겼다.
<18어게인>을 통해 대영을 만나게 된 우리나 다정 모두 대영의 꿈 앞에선 공평하게 무지했다.
이건 거지 같은 직장상사 때문에 사표 쓰고 나오는 거랑 다른 문제야.
책상 탁 치고 고개 빳빳이 들고 나오는 건 영화에서나 있는 일이고 이건 좀 달라.
근데 이거는 훨씬 조용해.
그만둔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 일도 없이 그냥 조용해.
- 연극 <마우스피스> 中 리비의 대사
연극 <마우스피스>에서 과거 촉망받는 신진 극작가였던 리비는 시대정신과 적당히 타협하는 작품만 쓰길 원하는 기성세대와 극작 세계에 질려 기나긴 슬럼프를 겪는다. 자연스레 집필도 멈추고 돈벌이도 마땅치 않아 싫어하는 엄마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와 함께 산다. 사람을 잘 만나지 않고, 지루한 하루 끝 어두컴컴한 식탁에 앉아 통조림 파스타를 먹는, 이전이라면 상상치도 못한 구질구질한 중년의 삶을 이어가는 중이다. 그러다 솔즈베리 언덕에서 아마도 자살을 기도하다 한 소년을 만난다. 그 소년은 언덕 밑으로 떨어지려는 자신을 안아 구해줬다. 그 소년, 데클란과 처음으로 진지한 대화를 하게 되었을 때 그는 리비에게 '왜 작가였었던 사람이냐'고 묻는다. 작가를 그만두게 된 자신의 시간을 설명하는 긴 독백을 위의 대사로 시작한다.
운동선수로서 한창 전성기일 스물여섯, 그제서야 대영은 다시 운동선수로서 자신의 인생을 그려본다. 그동안 운동과 담쌓았으니 테스트를 통과하는 기적은 일어날 리 없고 밑도 끝도 없이 노력한다. 코트 여기저기 내던져진 농구공을 담고, 담았던 농구공으로 홀로 연습하고. 땀방울이 떨어진 바닥을 기다란 밀대로 밀고 또 민다. '내가 있던 곳에 다시 두 발을 붙이고 있다면 기회는 분명 온다.' 예전 같지 않은 실력에 자존심이 상해도 그 생각으로 버텼을 것이다.
가까스로 기회가 찾아오려는 찰나 대영은 아무 미련 없이 놓는다. 시우가 아프다. 두 달간 실내체육관 바닥을 닦으며 얻은 연습 기회를 포기했을 뿐이다. 감독의 뜻을 대신 전하러 온 동창 일권에게 '좋은 기회지만, 이젠 안된다'고 거절하고 돌아서 다시 상자를 나르면 될 뿐이다. 아이들이 아장아장 걸을 때 즈음 다시 펼치려 한 꿈은 소리 없이 접힌다. '그만둔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 일도 없이 조용해.'
운동을 할 수 없으니 술담배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고 싶은 일'이 없는 이에게 오늘은 살아내야만 할 의무에 다름 아니기에. '해야만 하는 일'에 책임을 다하다 보면 하루가 가고, 딱 한번 고객의 비위를 맞추지 못한 일이 컴플레인으로 돌아온다. 고과가 깎이고 상사는 "넌 대체 잘하는 게 뭐냐"며 자존심을 있는 대로 깨놓는다. 내일도 부지런히 몸을 쓰고, 만족도 조사 10점을 주실 고객님을 위해 감정노동까지 해야 하기에 가장 손쉬운 위안을 찾는다. 술. 마신다고 당장 일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만 온종일 고생한 대가로 알딸딸하게 잠들면 힘들었던 일이 흐릿해지니까.
후회한단 말은 해선 안됐었지만, 대영 말처럼 진심이 아니었다. 다정과의 삶을 후회하는 게 아닐 테다. 꿈과 낭만이 사라진 자신의 삶에 대한 연민에 잘못된 감정을 이름 붙였다. 이렇게밖에 살지 못한 홍대영, 나 자신에 대한 분노인데.
대학에 갈 수 없었다. 당장 나의 젊음을, 쌩쌩한 한 몸을 바쳐 오늘을 살아갈 돈과 바꿔야 했다. 그 사이 같이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은 대학생이 됐을 거고 일반 기업체로 취업을 하든 '사'자 되든 흔히 어른에게 기대하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모이면 동창이라는 녀석들 입에선 서로의 연봉 얘기뿐이다. 아니면 재테크. 업계가 어떻고, 주식이 어떻고, 집값은 또 어떠하며. 여전히 '사원'인 대영이 입을 달싹이면 은근한 무시가 감돈다. 사랑하던 다정은 퇴근 후 집에 와 자신을 보며 "창피해"라고 얼굴을 찌푸리고, 아이들은 술 마시는 자신이 넌덜머리 난다는 표정을 짓고선 방에 홀랑 들어가 버린다. 30대 후반 남성 가장에게 기대하는 사회적 지위, 동창들의 업신여김, 저를 한심하게 여기는 가족들의 모습으로 얽힌 다차방정식을 놓고 어떻게 해야 답을 구할 수 있을지 끙끙댔을 테다. 그나마 지금 할 수 있는 건 실장 승진 이리라. "이번에 승진만 하면 다정이도 돌아올 거야." 5년마다 있는 승진 발표로 기대가 부풀었다.
기어코 삶은 대영의 콧대를 꺾어놓았다. 가족에게 떳떳하게 향할 일말의 희망마저 구겨졌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정과 시아, 시우의 곁으로 돌아갈 방법은 승진에 있지 않단 것.
자신의 유명세 때문에 상처 받을 서연이 걱정돼 야구를 그만둘지 고민하는 지훈에게 다정은 말한다. 혹시라도 후회할 것 같으면 야구선수로서의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훗날 결정을 후회하는 걸 알게 된다면 서연이 마음은 어떻겠냐고, 자신은 누군가에게 짐이 된 것 같다며. 대영에 대한 다정의 미안함은 천천히 두 사람의 관계를 흔들었다. '나만 아니었다면 대영은 촉망받는 농구선수가 됐을 텐데.' 혹시나 대영도 그렇게 생각할까 봐 마음 졸인 날도 있었을 테다. 다정은 리포터라도 하며 계속 아나운서 합격의 문이라도 두드리는데, 대영은 그러지도 못하고 가장이 되어버려서. 대영이 후회하지 않도록 가정에 더 최선을 다하며 살아왔을 다정이라 대영의 후회한단 절규가 잊혀지지 않았을테다.
가족들을 위해 기꺼이 꿈을 포기했던 대영이지만, 다시 가족 곁에 돌아가기 위해선 역설적이게도 꿈을 꾸어야 한다.
다정과는 '다시 사랑한다면', 시아와 시우에게는 'Somebody'가 되는.
그리하여 서로의 마음에 남아있는 부채감과 미안함, 죄책감을 털어내야 한다. 희생이 아닌 각자의 삶을 행복으로 꽉 채우며.
비 오는 날, 더 이상 아이들에게만 우산을 건네지 않길.
우산을 쓰고 가라던 다정을 붙잡아 같이 쓰고 가던 그날처럼 우산 아래 나란히 걷길.
짜릿한 버저비터를 꽂아 넣는 농구선수는 되지 못했을지언정 혼자 비는 맞지 않길.
다시 열여덟이 되어 꾸는 꿈은 온전히 네 것이 되길, 홍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