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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혀님 Jun 12. 2018

"사랑은 부르주아 구성물"

펫 샵 보이즈의 선동

펫 샵 보이즈의 가사는 즉물적이다. 열정, 사랑, 섹스, 돈, 폭력, 종교, 불의, 죽음. 이런것들을 에두르지 않고 나열한다. Paninaro의 가사는 곧 펫 샵 보이즈의 음악이다. 펫 샵 보이즈의 음악은 자기 현시의 수단이다. 5년 전 발표한 Love is a Bourgeois Construct. "사랑은 부르주아 구성물이다." 펫 샵 보이즈만이 할 수 있는 기이한 선동이다.


Pet Shop Boys - Love is a Bourgeois Construct


"당신이 떠난 순간이 날 도운 셈. 사랑은 부르주아 구성물이라는 현실을 깨닫게 해줬으니까." 사랑은 길었는데 이별은 한달음에. 그대와 나눴던 사랑의 언어는 저대로 할리퀸 소설을 써내려 갔는데 이제 둘만의 은어는 외국어처럼 멀다. "잊지 않은 단어나 떠올리며 외국어마냥 영어를 말해본다." 사랑이란 게 있었나. 사랑은 한낱 "환상", "뻔한 착오" 따위에 불과하다. 사랑도 유물론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지나간 감정조차 명세서에 매길 수 있다. "당신이 잃은 것을 셈하고, 그 덕에 치뤄야 하는 내심의 고소함." "사랑은 내게 의미없는 것이다." 여기서 선언하고 폭로한다. "사랑은 부르주아 구성물이다." "그래서 난 부르주아로 살기를 포기한다."


사랑이 감정의 눈먼 착취에 기꺼이 속아주는 것이라면 다시는 당신 없이 속지 않으리. 펫 샵 보이즈는 이별으로 무너진 자존감과 배신감 따위를 사회학적 겉멋으로 포장한다. 사랑을 계급제의 사회적 구성물로 환원한 뒤 젠체하던 대학시절 과제뭉치 사이에 처박는다. 대충 이렇게 정리할 수도 있겠다. "있는 놈들이 하는 배부른 감정놀이가 사랑 아니더냐." 시원하게 내뱉고도 뒷맛이 씁쓸할 수밖에 없다. 이 모든 시시한 호언장담이 가장 큰 자기기만이기 때문이다. 사랑과 이별을 이렇게 아름다운 선동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펫 샵 보이즈 뿐이다.


펫 샵 보이즈에게 자본주의 혹은 계급 문제는 기묘한 질문이다. 혁명의 세계가 무너진 뒤 충돌을 애증으로 노래했다. 닐 테넌트는 역사학도였다. 특히 러시아 혁명사는 잦은 레퍼런스였다. 펫 샵 보이즈의 팝 아트는 자본주의 대신 혁명을 바라봤다. 혁명세계가 붕괴하던 1990년. "나의 10월 교향곡을 다시 쓰거나 혹은 수정해야 할까. 혹은 넌지시 헌정대상을 '혁명' 대신 '계시'로 바꿔야 할까."


Pet Shop Boys - My October Symphony


곧이어 Go West. 헌정을 뭉개버렸다. 시간이 지나 20세기를 회고했다. 그들은 어떤 선동도 사랑하지 않았다. "나는 혁명으로 가는 티켓을 샀다. (그런데) 동상들이 무너졌을 때 환호했다. 모두가 썩어버린 것을 부수기 위해 왔다. 그러나 그들은 좋은 것마저 함께 없애버렸다."


"사랑은 부르주아 구성물." 그래서 이 구절에는 한편의 선동, 한편의 냉소가 담겨 있다. 한때 혁명에 대한 사랑을 믿었지만 이제는 환멸이 남았다. 그들이 처음 레닌이 혁명으로 가는 경로를 서늘하게 노래하던 때를 생각한다. "제네바 호수에서 핀란드 역까지. 넌 어디까지 가봤는지."


Pet Shop Boys - West End Girl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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