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 스파이스 1집 [deli spice]에 대해
영미권 음악 잡지나 웹진은 밥먹듯이 음반 줄 세우기를 한다. 역대 100대 음반, XX년대 100대 음반, 올해의 음반. 심지어 반기, 분기에다가 월별로 순위를 매기기도 한다. 경향을 한눈에 파악하거나 지나간 명반을 복기하기 좋아 독자들에게 잘 팔리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의 평론계나 언론이 리스트를 매기는 일은 뜸하다. 그나마 weiv 정도가 이어엔드 리스트를 내놓는 정도 같다. 한국 대중음악의 역대 명반 순위를 전격적으로 매긴 적도 단 두 번. 추억의 잡지 sub가 1998년 처음, 2007년 웹진 가슴이 선정해 경향신문에 공개했을 때가 마지막.
처음 순위를 매겼던 sub가 델리 스파이스의 데뷔 앨범을 4위에 올린 일은 이례적인 것이다. 고작 한 해 전에 발표한 앨범이 시대를 견뎌낸 70~80년대 명반 사이에. 10위권 내 가운데 당시 최신이라 할 만한 90년대 음반으로는 이 음반과 이상은의 공무도하가가 유일했다. 이후 9년이 지났던 가슴의 순위에서도 10위권을 지킨 9위. 90년대 이후 음반 가운데는 가장 순위가 높았다.
평론가인 김윤하는 당시 선정의 변으로 “이전과는 다른, 어떤 새로운 차원으로 청자들을 이끌어줬다”라고 적었다. '어떤 새로운 차원'? 물론 인디 1세대, 한국형 모던록의 태동 등의 표현으로도 이 음반의 가치는 어느 정도 설명이 된다. 하지만 인디, 모던록이라는 규정만으로는 이 음반이 얼마나 괴이했을지 설명하기가 어렵다. 음반에 수록된 몇 곡을 아래처럼 짝을 맞춰 들어보면 이해가 쉽다.
1.노 캐리어 vs. Happy Mondays - Kinky Afro
4.콘후레이크 vs. Stone Roses - Don’t Stop/Waterfall
5.기쁨이 들리지 않는 거리 vs. Inspiral Carpets - Two Worlds Collide
8.누가? vs. 808 State - In Yer Face
9.투명인간 vs. The Smiths - This Charming Man
10.오랜만의 외출 vs. Oasis - Slide Away
11.사수자리 vs. The Durutti Column - Sketch for Summer
어느 편으로든 기시감이 든다. 델리 스파이스의 곡마다 짝을 매긴 음악을 만든 밴드들은 모두 영국 맨체스터 출신이다. 대부분 매드체스터 밴드로 분류되거나 매드체스터의 자장 안에 있는 밴드다. 그렇다면 델리 스파이스의 이 음반은 매드체스터 앨범이라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니다. 매드체스터는 장르가 아니라 하위문화 혹은 현상이기 때문이다. 하우스와 사이키델릭 록, 징글쟁글한 기타 사운드가 뒤섞인 ‘배기 사운드’로 매드체스터의 음악적 경향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매드체스터의 핵심은 그 에너지였다.
말하자면 매드체스터는 68의 맨체스터식 재현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68의 시위 군중에 동조했고(“Bye Bye Badman”) 68의 언어를 따랐다(‘The Durutti Column’). 무엇보다 매드체스터의 대부라고 할만한 토니 윌슨 스스로가 상황주의자를 자처했다.
델리 스파이스의 데뷔 앨범은 그 혁명에 가까웠던 에너지와는 거리가 멀다. 희대의 촌스러움을 장착하고 마약을 즐기며 어떤 것에 저항하는 것을 기치로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매드체스터라는 엄브렐라 텀에 묶인 오합지졸 밴드들의 스타일을 기이하게도 잘 베껴냈다.
그것조차 대단한 능력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괴상하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브릿팝의 시대에 철 지난 매드체스터 사운드를 했다는 것도, 밴드마다 제멋대로인 매드체스터 사운드를 한 앨범에 담았다는 것도 괴상하다. 그들은 도대체 왜?!
이유 여하를 떠나 대중은 이 앨범을 어떤 흐름의 시초 같은 것으로 보기로 하고 그 흐름을 모던록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단지 그 이유만으로 명반이라 평가받기에는 부족하다. 오히려 우리에게 소개된 적이 없었던 매드체스터를 통째로 가져오는 것을 조악하지 않게 해낸 일이 더 기발하기 때문이다.
2018년 다시 한국 대중음악 명반 100선 같은 것을 꼽는다면 이 앨범은 과연 어디쯤에 있을까. 사람들이 고작 챠우챠우 한 곡만 기억하는 이 앨범이 진정 역대 4위나 9위에 놓일 만큼 명반일까. 시간의 평가가 어찌 됐건 우린 20여 년 전 이 앨범이 보여준 기괴한 정성을 충분히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