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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Mar 18. 2020

Dilemma

2003

이브닝 근무 중이었다. 최근 코로나 19(아아, 단어만 들어도 굉장한 피로감이 몰려온다) 때문에 신경 쓸 일이 굉장히 많아 병동 전체가 살짝 민감한 분위기인 것도 있었다. 더군다나 그 날은 책임간호사의 역할을 해야 하는 부담까지 안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갑자기 신환을 마구 배정하는 MAT의 매정한 전화에 벌써 머리가 지끈거렸다. 게다가 방금 CPCR로 업무를 시작해서(다행히 환자는 살렸지만) 오늘은 굉장히 터프한 날이 될 것이다-라는 공기가 병실 전체에 팽배했다. 


담담해지자. 이럴 때일수록 냉정해야 한다. 급하게 굴었다가는 당연히 될 일도 안 되는 수가 있다. 진한 커피를 꿀꺽꿀꺽 마셨다. 예정된 신환 중 둘을 받아내었다. 다행히 간호사들의 합이 잘 맞는 날인 듯했다. 잔잔하게 일어나는 짜증 같은 것은 모두들 잠시 접고 으쌰 으쌰 하는 분위기가 솔솔 풍겨 났다. 이 분위기 그대로, 조금 후들이 닥칠 마지막 신환을 위한 준비를 차곡차곡하고 있을 무렵, 레드 알람이 울렸다. 5번이었다. 산소포화도가 89%였다. 


다 싫다고 했다. 여태껏 수많은 치료를 했고 그 정도면 할 만큼만 것 같다고 또렷하게 의견을 내세웠다. GVHD가 피부에 발현하여 잔뜩 붓고 거뭇한 각질로 뒤덮인 얼굴이었지만 눈동자만은 검고 맑았다. 이론 상 연명치료를 할 여지는 분명 있었으나 그 단호한 결정으로 투석과 인공기도 삽입은 하지 않기로 하였다. 환자 스스로 낫지 않는 이상 더 이상의 치료는 없는 것이 계획이자 인간 존중이었다. 

“내 삶의 끝은 내가 정하리라. 비록 내 의지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이 정도면 되었다. 남편과 아들, 댁들에겐 많이 미안하지만 나는 너무 피곤해. 더 이상 아프기가 싫어. 이런 불쾌함은 그만 느꼈으면 좋겠어. 어쨌든 내 인생이잖아. 이해해줘. 나는 이제 잠들고 싶어.”


담당의는 일반병동에서부터 그 환자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해주었다. 지금부터는 환자의 결정을 존중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천천히 끝을 준비하면 되는 것이었다. 문제는 면회였다. 최근 중환자실 면회 전면 제한이라는 초강수를 두고 있었다. 그나마 비공식적인 예외 사항으로 임종 직전 수준이 아니면 면회 자체가 금지되어 있는 상태였다. 담당의는 아직 그 단계는 아니지만 보호자가 어머니에게 굉장히 잘하는 아들이라고 하며 지금부터라도 같이 있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슬쩍 내비쳤다. 

사실 평소 같으면 고민할 가치도 없는 일이었다. 당장 둘을 만나게 하고 마지막까지 함께 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임종 간호의 핵심 같은 것이었으니까. 환자는 편안하게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스스로 마무리를 하고, 보호자는 힘들지만 그 결정을 같이 따라주고 받아들이는 과정에 동참하는 것. 내가 만약 둘 중 어느 입장이라도 엄청난 한 같은 게 맺히지 않을까 싶었다. 담당 간호사도 이건 면회해줘야 하는 게 아니 나며 우울해했다. 우리는 똘똘 머리를 맞대어 보기로 했다. 


환자는 중환자실 입실 전부터, 아니 코로나 19가 들불처럼 번지기 전부터 외부가 아닌 병동에 아들과 늘 함께 있었다. 그래서 역학적인 문제는 배제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다. 힘이 있는 의견들을 구해야 했다. 다행히 해당 교수도 임종 전까지 공간적인 문제만 없다면 함께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어떻냐는 뜻을 보내왔다. 유엠 또한 여러 문제들을 두고 보아도 면회가 맞을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무엇보다도 일단 서둘러야만 했다. 일 분 일 초가 이 환자에게 남은 생애였으니까. 

다만 가장 큰 걸림돌은 문제는 원칙에 대한 것이었다. 면회에 대한 형평성과 지금의 결정이 현 시국에 과연 옳은 행동인가 대한 것이었다. 하나가 허용되면 그다음은 무척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지금의 결정은 관습법처럼 일례가 될 수도 있음이었다. 신중하고 그리고 빠르게 결정해야만 했다. 


우리는 환자부터 생각하기로 했다. 차가운 방 안에서 홀로 생을 마감하는 것은 저주에 가깝다고 느꼈다. 아들을 불렀다. 다시 한번 보호자에게 역학적 위험성에 대한 질문을 하였고 감염 증상 같은 것은 없는지 되물었다. 마스크를 단단히 쓰게 하고 비닐 가운을 입히고 장갑을 건넸다. 환자가 있는 방의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꾸벅꾸벅 조는 듯 숨을 쉬던 환자는 아들을 보자 힘겹게 아는 체를 하였고 손을 내밀었다. 아들은 눈물을 흘리며 다가갔고 문은 다시금 닫혔다. 붉은 경보가 초인종처럼 조심스레 울렸다. 산소포화도는 85% 정도였다.


한 시간 후-예상보다 빨리 끝을 알리는 알람이 들렸다. 동시에 아들의 오열이 동굴처럼 울렸다. 짐승처럼 눈물을 쏟는 그를 보며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말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 순간에는 침묵이 정답이었다. 아주 조금씩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이성의 끈이 돌아올 무렵 아들에게 장례절차에 대해 설명을 하고 위로의 뜻을 전했다. 정산을 위해 아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정성스레 사후 처치를 하였다(그 사이에 또 다른 신환이 왔다). 되돌아온 아들은 그래도 처음보다 진정된 얼굴로 환자와 병실 밖을 나섰다. 고개를 꾸벅 숙였다. 때마침 나이트 근무 간호사가 빼곰 인사를 하였다. 어느새 교대 시간이었다. 담당의와 담당 간호사 그리고 나, 서로 수고했다는 말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일단은 다른 환자들을 맡고 있었으니까. 그러고는 유야무야 퇴근을 해버렸다. 조금은 허황된 마음으로 그리고 약간 싱숭생숭한 느낌으로 침대에 누웠다. 잠을 설칠 것 같았다. 그때 카톡 알람이 울렸다. 


“선생님! 오늘 너무 감사했어요. 환자 보내고 이렇게 저렇게 할걸 후회하는 경우 많았는데, 오늘은 오래간만에 잘 보내드린 거 같아요 선생님 덕이예요ㅠ.ㅠ 오그라들지만 새벽 갬성으로 카톡 보내보아요ㅋㅋ굿밤 되셔요”


환자는 고통 없이 자유로워졌다. 아들은 너무나 슬퍼했다. 우리는 고민했다. 현실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은 결정, 옳다고 느끼는 것에 대한 의지, 누군가를 생각하는 모두의 배려. 오늘 우리를 진심으로 움직이게 만든 것들이었다. 사람이 살면서 어떤 확신을 스스로 느끼는 때가 과연 몇이나 있을까. 적어도 지금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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