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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셀린 Dec 22. 2020

주홍 글씨

2012

주홍 글씨

 멀리서도 왔다. 심지어 하늘을 날아왔다. 모두들 걱정이 태산 같았다. 과연   있을까. 정녕 모두에게 득이 되는 일인가. 위험하지는 않을까. 살릴  있을까. 하지만 살려야 한다. 드디어 도착을 했단다. 그런데 의식 확인이  된단다. 어쨌든 어서 음성이 나와야  텐데. , 드디어 올라올  있게 되었단다. 두둥. 오늘 온단다. 도착하였다. 타국 에크모 카테터는 이렇게 생겼구나. 크게 다를 것은 없었다. 어느 날인가 의식 확인이 되었다. 뒤이어 재활 훈련도 시작할  있었다.   마치 끼워 맞춘 것처럼  이식까지 진행되었다. 예후도 괜찮았다.    병동으로 올라갔다. 맞다. 당신이 아는  사람. 해외에서 COVID 19 감염 이후  이식까지 진행한  최근 퇴원, 이런저런 방송용 인터뷰까지 이뤄지며 소소한 주목을 받았던  환자의 매우 축약된 생존기이다.

 끝이 보일까 싶은 환자, 그리고 의료진의 여정이었다. 다 같이 울고 웃고 짜증내고 보람 있고. 지금도  그렇듯 그때도 그랬다. 클래식 음악을 선호하고 스페인어를   알았다는 . 그리고 흔치 않은 질환으로 입원한 것과  경로 정도가 특이하게 여겨졌을 . 가만히 짚어 보면  환자도 그저 상태가 좋아져서 일반병동으로 올라간 사람  하나인 것이다. 이러한 공평한 감정은 옳다. 반드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누군가의 따뜻한 미소, 다른 누군가의 놀라운 이해심 혹은  다른 누군가의 기대하지 않았던 친절함은 단연코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다.
 그의 인터뷰 영상을 지켜보고 있자니 사실 조금 낯선 감이 있었다.  기억으로는  침상에  없이 누워있기만 했었으니까. 피부는 하얗고 반질반질 윤이 난다. 그보다 빛나는 눈빛과 침착한 어투, 그리고 인공기도 탓에   번도 들어본  없던 또렷한 목소리가 있었다. 그래, 원래 저런 사람이었을 테지. 당연한 것인데도  새롭다. 기관절개관이 있던 목에는 꿀색 드레싱이 밀착되어 있었다. 조금  오른쪽으로 어떤 흉터가 보였다. 화면 상으로도 눈에 띄고 조금 단단한 갈색 구멍 같은 것들이었다. 저기에 뭐가 있었지.
 아아, 기억이 났다. 거긴 에크모 카테터가 박혀 있었다.  이식  제거한 지는 한참 되었지만 아직도  자리에서 지난날을 상기시키려 하고 있었다.

 COVID 19 그에게 남긴 흔적이었던 것이다. 목소리도 다행히 돌아왔고 체중도 아프기 전으로 회복했지만  상처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자신이 평생토록 인지하던 바디 이미지에서는 찾아볼  없었던 것이겠지. 그보다  슬픈 것은 
뭇사람들은 어리석고  어리석어서 그에게 계속 ‘COVID 19 감염자라는 꼬리표를  흉터처럼 기억할 것이라 사실이다.
 어떤 완치자는 직장을 잃었고 다른 사람은 인간관계 자체가 일그러졌다고 했다. 심지어 파혼당한 사람도 있고 자신은 조심히 다녔지만 이유도 모른  낙인이 찍힌 사람도 있다고 했다. 물론 완치 이후 자신의 주변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고 자신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글쎄. 분명 어느  구석은 자신도 모르게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아주 작은 예로 마스크 없이 외출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질 정도로 우리 모두의 의식은 재정립되었으니까. 오죽했으면 스마트폰은 놓고 나와도 마스크는 잊지 않고 챙긴다는 지인도 있었다. 사람들로   버스 안에서 기침만 살짝 해도 모두가 자신을 주목하는 세상이다. 널따란 카페에서 누군가 시끄럽게 떠들면  소음 자체를 신경 쓰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턱에 걸친 마스크 바깥으로 내뿜는 비말에 주목한다. 신규 간호사들이 입사를 해도 정확히 어떤 얼굴을 가졌는지는 모른다. 머리 색과 목소리, 그리고 눈동자로 구분해야 한다. 그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애매한 친구 따위 만날  없다. 너무나 많은 것들이 직결되어 있으므로. 타의적 굴레와 스스로의 양심  사이에 즐거운 것은  개월  하나도 없었다. 참아 낸다. 견딘다. 잔뜩 곪은 여드름처럼 터질  같지만 터뜨리지 않는다. 분명히 흉이 남을 것이므로. 어느새 이렇게 우리는 변했다. 슬프지만 영민한 적응력이 아닐  없다.

  귀를 만져 보았다. 귓바퀴가 시작되는  부분. 하루에 적어도 8시간 이상은 마스크의 끈이 걸쳐 있는  부분. COVID 19 범람하던 초기에는 욕창이 생겨서 거즈를 대어 보기도 하고, 마스크를 벗고 있어도   같은 착각이 들더니 어느새 조금 단단해져 있었다. 심지어 이제는 오래 써도 아프지 않게 되었다. 이곳저곳 경유하여 COVID 확진자로 입실한 환자들도 마찬가지이다. 욕창 상태이거나 이미 치유 과정을 급하게   거친 반쯤 마른 인절미 같은 조직이 만져진다. 굳은 살도 아닌 것이  기분이 좋지는 않다. 에크모가 남긴 주홍글씨의 낙인을 건드리는 시감이 든다.  혼자서 마시는 맥주도 나름대로 맛있다. 그렇지만  혹은 서넛이 머리를 맞대고 마시는 것은 말도  되게 시원할 것이다. 어떤 것이 무슨 상처를 남겼든 간에  털고. 분명 마침표가 있을  터널의 끝에서 오히려 침착하게 그땐 그랬었지, 하며 쓴웃음을 지을 것이다. 인생은 거기서 끝이 아니니까.   걸음을 떼어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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