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아이는 해맑은 미소로 현충관에 들어섰다. 꽃다발을 들고서는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아이에게 현충관은 어떤 곳이었을까.
지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하던 순간, 학생들의 탈출을 돕다 순직한 교사들이 있다. 2018년 1월 16일. 이날은 양승진·박육근·유니나·전수영·김초원·이해봉·이지혜·김응현·최혜정 교사의 합동 안장식이 열린 날이었다.
수십 명의 유족들은 현충관에서 합동 안장식을 지켜봤다. 분위기는 엄숙했다. "사자(死者)는 냄새를 맡고 산자는 맛을 본다는 말이 있습니다. 꽃봉오리가 사자를 향하도록 해주세요." 헌화를 준비하는 유족 대표들에게 현충원 관계자는 이런 말을 했다. 추모사를 읽자 유족들은 더 이상 감정을 숨길 수 없었다. 딸을 잃은 어머니, 남편을 잃은 아내, 아버지를 잃은 딸의 눈에서는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취재를 하다 보면 인터뷰 요청을 하기 어려운 순간이 있다. 유족을 취재하는 순간이 특히 그렇다. 이날도 묘역을 서성거렸다. 장례절차를 마친 뒤에도 묘역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하고 싶었던 말이 있던 걸까. 고(故) 전수영 선생님의 어머니는 어젯밤 딸의 책상에 앉아 하고 싶은 말을 정리해봤다고 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마음을 한 자 한 자 써 내려간 글을 내게 건네주었다. 어머니가 건넨 A4용지에는 이런 글이 쓰여있었다.
"세월호 참사로 순직한 선생님들은 2014년 사고 후에 바로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했습니다. 법에 보장이 되어 있음에도 4년 가까이 힘든 재판 과정을 거쳐 이제라도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어 부모로서 위안이 됩니다. 제 딸인 전수영 선생님의 경우, 세월호 침몰의 위험한 순간에 학생들의 구명조끼와 안전을 챙기느라 초등학교부터 다져진 수영실력에도 불구하고 정작 자신은 챙기지 못했습니다. 미안하다는 짧은 메시지만 남기고 죽음을 직감하며 제자들을 구하다가 순직했습니다. 끝까지 책임을 다하고 희생되신 선생님들이 우리 사회에 귀감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전수영 선생님은 교무수첩 앞장에 '항상 학생을 생각하는 선생님이 되겠습니다'라고 적어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 다짐대로 하늘나라에서도 어린 제자들을 항상 보살펴줘서 학부모님들의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어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종이를 받아보는 순간 머리를 '쿵'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왜 그랬는지는 명확히 설명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우리 수영이가 살아있었다면 좋은 선생님이 됐었을 것"이라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이미 좋은 선생님이셨다고 생각했다.
묘소로 영현 봉송을 한 뒤 70cm 깊이에 하관을 했다. 그 뒤 흙을 한 줌씩 뿌리는 '허토' 과정이 진행됐다. 정말 이별의 순간이 찾아온 것일까. 고(故) 양승진 선생님의 노모는 영현이 땅속에 묻히자 오열하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승진아 좋은 곳에 가서 편히 살아라."
"천국에서, 아름다운 꽃동산에서 아프지 말고 행복하게 잘 지내라 승진아. 언젠가는 엄마가 갈게. 잘 가 승진아."
노모는 고인을 보낼 수 없다는 듯 땅속으로 손을 뻗어 수차례 쓰다듬기를 반복했다. 눈물이 이미 다 마른 줄 알았는데,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은 끝이 없으리라.
9명의 교사는 지난해 먼저 안장된 단원고 고창석 교사 옆에 나란히 자리했다. '교사'가 현충원에 안장되는 것은 이번이 최초라고 했다. 현충원장은 "목비(나무로 만든 비석)를 먼저 설치했다가 나중에 석비(돌로 만든 비석)로 교체하는 기존 방식과는 달리 이번엔 처음부터 석비로 성분(묘소를 만드는 일) 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대전 현충원에서 안장식을 진행하며 교체용 목비 대신 석비를 세우는 건 처음 있는 일이다.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