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일이팔 Jun 30. 2021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 (1)

오늘 하루는 진짜 망했구나.

재수 없다 혹은 바람맞다. 지금 우정의 상황을 대변하는 동사들이었다. 오늘 아침부터 종일 왜 이러냐. 우정은 양꼬치 가게 앞에 털썩 앉아 울고 싶었다.



시초는 활기차게 시작해도 모자랄 오전에 부리나케 걸려온 전화  통이었다. 클라이언트가 원했던 디자인과는 너무 다른 결과물이 나왔는데 어떻게  일이냐 따졌다. 차라리 이전 시안으로 되돌려 놓으라고 아우성쳤다. 우정이 담당한 건이었기에 다시 한번 들여다보니, 지난주 부장이 우정이 제시한 디자인은 트렌드에 맞지 않는다며 자신이 원하는 대로 디자인을 수정하라고 지시했다.   왔구나. 갑자기 방향을 바꿔 수정하면 클라이언트의 예상과는 다른 결과물이 나올지도 모른다고 여러 차례 얘기했지만, 그럴수록 부장은 우정을  없는 디자이너로 헐뜯으며 혀를 찼다. 그렇게  없어서 어디 일하겠어? 우정이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내뱉는 부장이었다.


안타깝게도 우정은 까라면 까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결국 부장의 의견보다는 조금 수정한 채 시안을 클라이언트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렇게 폭탄처럼 떠밀려왔다. 팀원 모두가 부장이 강력하게 주장한 디자인이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부장은 자신은 전혀 그런 기억이 없다면서 생떼를 썼다. 이번만 해도 벌써 다섯 번째였다.

이제 회사를 관둬야 하는 시기가 온 건가. 우정은 서랍 속에 손때가 탄 사직서를 제출할까 망설였다. 부장실에서 나오는 우정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웠다. 일단 사표를 제출하더라도 벌어진 일은 마무리 지어야 했다. 우정은 클라이언트에게 손이 발이 되도록 빌어 이전 시안에서 어떤 부분을 더 수정하길 원하는지 물었다. 사람 좋은 웃음을 마무리로 긴긴 전화가 끝나자마자 우정은 동기인 수진에게 바로 메신저를 날렸다.


오늘 저녁에 약속 있니?

아니. 너 깨지는 소리가 우리 부서까지 들리더라. 김부장 또 기억 안 난대?

들렸다니 긴 설명은 필요 없겠네. 이따 퇴근하고 보자. 오늘 부장을 양꼬치 그릴에 매달아 버릴 거야.

양꼬치 그릴 좋지. 이따 봐.


우정은 부장이 퍼 올린 똥물을 대신 뒤집어쓴 채 다시 작업을 진행했다. 오늘 하루를 이렇게 망친 채 마무리하기 싫었다. 저녁은 양꼬치에 옥수수 온면을 잔뜩 먹자. 그리고 내일 저 새끼 얼굴에 사표 던진다 내가. 속으로 이를 부득부득 갈며 하루를 버텼는데. 불행하게도 우정의 고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먼저 퇴근한 우정이 양꼬치집 앞에서 수진을 기다리는데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자정 즈음에 온다던 비가 수진보다 빨리 우정을 찾아왔다. 비가 조금씩 굵어지더니 어느새 장대비를 양산했다. 우정은 양꼬치 가게 옆 편의점으로 비를 피했다. 우산을 살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다가 그치지 않을 것 같은 비에 작은 우산을 하나 샀다. 이로써 우정의 집에는 8번째 우산이 생기는 순간이었다.


장대비 덕분인지 양꼬치집 웨이팅이 순식간에 줄어들었다. 대부분 비를 피해 다른 음식점으로 이동한 듯했다. 수진이 오면 바로 들어가도 되겠다. 그때 편의점 옆 상가 계단에서 비를 피하던 우정에게 문자가 하나 날아왔다. 오늘 우리 팀 실적 잘 나와서 회식한대. 미안. 회식이 동기를 앗아가 버렸다. 종일 꿈꿨던 아름다운 저녁의 마무리는 기름진 양꼬치가 아닌 쫄딱 젖은 자신 뿐이었다. 우정은 왠지 서러움이 밀려왔다.


물에 담근듯한 구두부터 종아리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정장 바지, 8번째 새로 산 우산, 꼬불꼬불 올라온 곱슬머리까지. 우정의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다. 자그마한 행복 하나 건지지 못한 채 이대로 집에 들어가긴 싫었다. 그렇다고 양꼬치를 혼자 먹기에는 양꼬치 가게 안에 사람들이 너무 그득했다. 뭐라도 먹어야 할 텐데.


우정은  상가 안내판을 눈으로 훑었다. 맨 꼭대기 층에 바(bar)가 있었다. 자주 오는 양꼬치 가게인데도 그 위에 바가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혼자서 가기엔 딱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밥보다는 술이 고픈 타이밍이었다. 우정은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10층 버튼을 눌렀다.


올라간 바는 시끌시끌한 1층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리, 조용하고 느슨한 재즈 음악이 흘렀다. 약간 어두운 조명에 빈티지 인테리어가 차분한 분위기를 더했다. 사람들도 조용히 각자의 얘기에 집중하느라 쫄딱 젖은 우정을 신경 쓰지 않아 다행이었다.


우산꽂이에 우산을 두고 앉을자리를 탐색했다. 혼자서 4인 테이블을 차지하기는 눈치가 보였던 우정은 바텐더 앞 미니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높은 스탠드 의자에 자연스럽게 앉는 것까진 좋았는데 그다음이 조금 문제였다. 소주파였던 우정은 친구들 따라 바에 와서 칵테일만 홀짝거려봤지, 혼자 술을 시킨 적은 없었다. 바텐더가 내민 메뉴판에는 순 모르는 이름들의 위스키나 칵테일 이름이 적혀있었다. 고민하는 우정을 눈치챈 바텐더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저희 바는 처음이세요?"

"아, 네. 제가 술을 잘 몰라서요."

"그럼 이전에 드셨거나 익숙한 이름은 있으실까요?"

"음.... 모히또도 마셔봤고.... 다른 것도 과일 들어간 거였는데 잘은 모르겠네요."

"그럼 라임모히또로 한잔 드릴까요?"

"네. 그냥 모히또로 주세요."


웃으며 메뉴판을 가져간 바텐더가 작고 따뜻한 물수건 하나와 핑거푸드를 챙겨주었다. 안주될만한 걸 하나 시킬 걸 그랬나 고민하던 우정은 이내 그만두었다. 친구들과 왔을 때는 한없이 편했던 바였는데, 혼자 오니 생각보다 아직 바의 분위기가 익숙지 않아 오히려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느낌이었다. 손을 바삐 움직여 음료를 준비하는 바텐더가 힐끗 우정을 보며 다시 말을 걸었다.


"밖에 비가 많이 오나 봐요."

"네. 갑자기 쏟아지더라고요."

"실내 온도가 낮진 않으세요? 수건 있는데 수건 드리거나 에어컨 온도를 좀 더 올려드릴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원래 바텐더들은 저렇게 친절한가? 게다가 잘 생겼네. 뉘 집 자식이 저리 잘 생겼을고. 우정은 신경 써주는 바텐더가 고마우면서도 조금은 어색했다. 바텐더는 눈이 마주칠 때마다 말을 걸어왔다.


"손이 되게 가늘고 예쁘시네요."

"아하하. 칭찬 감사합니다."

"손 모델하셔도 되겠어요."

"그런가요?"


우정은 손이 가늘고 예쁘다는 칭찬을 종종 듣곤 하는데 이번 칭찬은 마주 보고 있어서인지 조금 낯부끄러웠다. 이후에는 바텐더와 눈이 마주칠까 괜히 핑거푸드만 만지작거렸다. 우정의 시선이 정처 없이 진열된 술 어딘가를 헤매고 있을 즈음 라임 모히또가 나왔다. 예쁜 칵테일의 비주얼에 웃음이 조금 솟아났다. 고갯짓으로 눈인사를 한 뒤 라임모히또를 조금 들이켰다. 소주를 즐겨 마시던 우정에게는 달달한 음료수에 불과했지만, 속이 조금은 시원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하루를 시원하게 마무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칵테일은 입맛에 맞으세요?"

"네. 시원하고 맛있네요."

"음.... 낮에는 종종 1:1 클래스로 칵테일 만들기도 하고 있으니까 관심 있으시면 이 번호로 연락 주시고 언제든 편하게 놀러 오세요."

"말씀 감사합니다."


우정은 바텐더가 건네는 작은 종이를 받았다. 작은 종이는 고급스러운 재질의 가게 명함이었다. 명함에는 가게 전화번호와 사장 레이 딱 두 가지만 적혀있었다. 레이? 익숙한 닉네임이다 싶었는데 지금까지 얘기를 나눴던 바텐더였다. 단순한 가게 바텐더인 줄 알았는데 사장님이셨구나. 앞면에도 심플하게 가게에 대한 정보만 있더니 뒷면에는 아무런 글씨도 없었다. 1:1 클래스에 대한 종이인 줄 알았더니 단순 가게 명함이었나 보다.


바텐더는 조금 어색해하는 우정을 눈치챘는지 조금 거리를 두고 테이블을 정리했다. 그 사이 우정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작은 핸드백에 명함을 쏙 넣었다. 다시 혼자가 된 우정은 어느새 곡이 바뀐 재즈 음악에 긴장을 풀고 칵테일을 홀짝홀짝 마셨다. 어느새 바텐더도 가끔 우정에게 눈길만 둘 뿐, 단골손님인 듯한 사람과 얘기하느라 멀어진 지 오래였다. 등 뒤로 사람들이 오가는 소리가 종종 들릴 뿐 그 누구도 혼자 온 우정을 방해하지 않았다. 다들 이래서 혼자 바에 오는 건가. 느슨한 외로움이 되려 포근하게 느껴졌다.


차가운 칵테일을 반 정도 비웠더니 조금씩 찬기가 서렸다. 아까 바텐더가 에어컨 온도를 조금 올린다고 했을 때 말을 들을걸. 뒤늦게 후회해봐야 소용없었다. 느슨했던 몸이 조금씩 추위에 굳었다. 조금 움직일 필요성을 느낀 우정은 화장실에 다녀오기로 했다. 마침 조금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보는 우정에게 바텐더가 다가왔다.


"필요하신 게 있으세요?"

"혹시 화장실이 어디 있나요?"

"화장실은 저기 제일 안쪽에 있습니다."

"어디요?"


우정이 바텐더가 가리킨 방향으로 몸을 틀어 바닥에 발을 디디자 비에 젖은 구두가 쭉 미끄러졌다. 이윽고 왼손에 걸려있던 모히또잔과 핑거푸드가 와장창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모든 사람이 우정을 쳐다봤다. 그 순간만큼은 잔잔히 흐르던 재즈 음악도 뚝 끊긴듯한 기분이었다. 어정쩡하게 테이블을 잡고 일어난 우정은 엎질러진 라임모히또와 깨진 유리잔으로 엉망이 된 바닥을 보며 생각했다. 오늘 하루는 진짜 망했구나.








이게 원래... 이렇게 길게 쓸 게 아니었는데 두 편으로 나누게 됐네요. ㅎㅎ
매거진의 이전글 30분 뒤 몽마르트 언덕에서 만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