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회 스웨덴영화제 청년 앰버서더 - vol.5 [클라라 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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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희곡 <닫힌 방>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그러니까 이런 게 지옥인 거군.
(중략) 지옥은 바로 타인들이야."
웹툰과 드라마 제목인 <타인은 지옥이다>로 우리에게는 잘 알려진 말일 것이다. 어떠한 목적을 지니고 태어난 '즉자'로서의 사물과는 달리 인간은 고정된 목적 없이 '실존'하는 존재로서 매 순간 달라지는 '대자'로서의 운명을 타고났지만, 타인들은 나를 어떠한 목적을 지닌 사물처럼 '고정'하여 이해하고자 하는 데서 불균형은 시작된다. 희곡 속 닫힌 방 안에 갇혀있는 세 사람이 서로를 규정하려는 서로에 의해 고통받는 것처럼, 사회 속에서 우리는 타인들에 의해 규정당하게 되고, 그렇게 우리는 개인 스스로 목적 없는 그 자체로서의 '실존'을 방해받는 지옥 속에 살게 된다는 것이다.
굳이 사르트르의 어려운 실존주의 철학 이야기를 장황하게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분명히 인간관계의 어려움을 느끼며 살아간다. 나를 바라보는 많은 이들의 시선 속에서 일정한 사회적인 규범, 예절을 지키며 사는 것에 우리는 큰 에너지를 소모하기 때문이다.
지금 소개할 <제11회 스웨덴영화제> 상영작 <클라라 솔라>의 주인공 '클라라'는 타인에 의해 '고통'을 받는 수준을 넘어, 40세의 중년이 가까워오는 나이가 되도록 그것이 '고통'인 줄도 모르고 살아온 인물이다. 남미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엄마, 조카 '마리아'와 함께 살아가는 클라라는 성모 마리아와 연결되어 있는 성스러운 '성녀'로서 병든 마을 사람들을 치료하고, 축복을 내리는 일을 하며 살아왔다. 클라라의 엄마는 그녀에게 그녀가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라 말하며 그녀가 개인적인 욕구를 표현하고, 그 욕망을 해소하고자 하는 것을 억압하며 그녀에게 '성녀'로서의 삶을 강요한다. 오른쪽으로 심하게 굽은 클라라의 척추로 인해 폐에도 위험할 수 있다며 수술을 간곡히 권유하는 의사의 말에도 엄마는 하느님이 주신 몸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이유를 들며 클라라의 몸에 칼을 대고 수술을 하는 것을 극구 반대한다. 심지어는 지극히 원초적인 욕구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자위를 하려는 클라라에게 엄마는 '나쁜 짓', '더러운 짓'을 하면 안 된다며 손에 매운 고추를 묻히기도 한다.
그렇게 클라라의 엄마의 강압적인 지배 아래 이 가족은 '성녀'로서 살아가는 그녀의 일상 속 모든 순간을 지배한다. 옷을 갈아입는 것부터 씻는 것까지 엄마와 조카 마리아의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해낼 수 없는 클라라는 정신적인 성숙은 15살인 마리아의 그것보다 발달하지 못했다. 이렇게 태어난 순간부터 몇십 년 동안 클라라는 스스로를 자신의 의지에 의해 살지 못한 채 철저히 '타인'들에 의해서만 규정되어 그 틀에 갇혀버린, 어떻게 보면 '성녀'라는 이름의 지옥 속에서 살고 있는 불운한 여성이다. 언제나 타인에게 둘러싸여 사회적 스트레스 속에 살아가는 클라라는 반대급부적으로 자연 속에서 혼자 거닐며 곤충이나 동물들과 교감하고 소통하며 이를 해소한다. 마을에 찾아오는 관광객들을 상대하기 위해 집에서 기르는 백마 '유카'는 그녀의 분신이자, 유일한 친구이기도 하다. 유카가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지만 '클라라'의 말은 듣는 장면들에서는 클라라가 일반적인 사람과 다른 '마술적'인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그녀의 앞에 청년 '산티아고'가 등장하며 마치 소녀의 '사춘기'처럼 그녀 주변을 단단히 잠그고 있던 틀에 균열이 가해진다. '산티아고'는 사실 클라라가 아닌, 그녀의 조카 '마리아'와 사랑을 싹 틔우지만 그들 사이에서 클라라는 남모르게 '산티아고'에 대한 연정의 마음을 품으며 점차 스스로의 자아를 자각해나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산티아고도 그녀의 모습에 연민을 느꼈는지 그녀를 도우며 둘은 함께 점차 그녀에게 금기되었던 것들을 깨뜨려나간다. 보라색 끈이 둘러진 말뚝 밖으로 넘어갈 수 없었던 그녀와 함께 경계를 넘어서 주고, 클라라의 유일한 친구인 유카가 관광객 유치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듯하자 그녀를 다른 목장에 팔아버리려는 엄마를 피해 유카를 풀어주며 혼자 강가에서 살도록 피신시키고 힘들어하는 클라라와 함께 그녀는 혼자 갈 수도 들어갈 수도 없는 강에 함께 몸을 담그며 그녀를 위로한다. 그리고 영화 내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에 우울한 무표정과 짜증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얼굴에 처음으로 웃음꽃이 피어난다.
(*이후부터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계속해서 '성녀'로서의 삶 안에 옭아매려는 엄마와 가족들, 그리고 점점 자유의지를 지닌 주체적인 '자아'가 싹트기 시작한 클라라 사이에서는 점차 갈등의 골이 깊어지기 시작하고, 그 갈등의 골은 조카 마리아의 15세 생일 파티에서 결국 폭발하고 만다. 산티아고를 사랑하지만, 그는 결국 마리아의 연인이 되고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 립스틱조차 엄마의 눈치에 마음대로 칠할 수 없는 스스로의 모습에 크게 낙담하고 마는 클라라. 그 과정에서 다른 조카 프란에게 강가에서 죽은 백마의 유해를 발견했음을 전해 들은 클라라는 슬픈 마음을 위로받고자 산티아고와 사랑을 나누려 하지만 거절당하고, 결국 그녀는 괴성을 지르며 폭주하면서 조카의 생일파티를 망쳐버리고 만다. '사춘기'라는 질풍노도의 시기가 결국 성숙한 성인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번민의 과정이듯, 친구의 죽음과 첫사랑에게서 처음으로 큰 상처를 받게 되는 이 순간이 다른 시선에서 보면 오히려 그녀에게는 홀로 일어서야 한다는, 자유의지에 의해 스스로 결정하는 삶의 필요성을 자각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제목은 <클라라 솔라>이지만, 영화 속에서 그녀는 클라라로 불릴 뿐 아무도 그녀를 '솔라'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솔라는 그녀만이 알고 있는 '비밀 이름'이기 때문이다. 클라라는 자기 주변의 사람들과 생물들에게 자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 이름'을 짓는데, 조카 마리아는 클라라를 엄청나게 조른 끝에 자신의 비밀 이름을 듣고는, 그 아름다움에 눈물을 흘릴 정도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 이름이 무엇인지는 영화 속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마리아'는 그 나이대의 여자 아이들이 그렇듯 누군가에게 예뻐 보이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을 가장 원하는, 아름다움에 민감할 아이다. 결국 '비밀 이름'이라는 것은 자유 의지를 지닌 어떤 한 개체가 자신이 실존하며 가장 원하는 것에 대한 '충족'의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 점에서 클라라의 비밀 이름이 '솔라'인 이유는 가족과 사회의 그늘에서 벗어나 온전히 혼자이고 싶은 그녀 안의 내재된 욕망을 표현하고, 충족하고, 해소하는 최후의 수단이었을 테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자아'를 완성하고자 자신을 옭아매던 성녀상과 집을 불태우고 떠난다. 가족과 마을 사람들은 아마도 화마 속에서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할 것이고, 이를 통해 그녀는 가족과 마을의 억압된 지배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그리고 홀로 강에 들어간 그녀는 오른쪽으로 심하게 굽어있던 자신의 척추를 바로 맞추기 시작한다. 누군가를 치유하는 데에만 사용해 온 스스로의 내재한 힘을 처음으로 자신을 향해 사용한 것이다. 그리고 죽은 줄 알았지만 자연 속에서 홀로 죽지 않고 오히려 살아있었던 유카의 모습은 홀로 일어서서 자신의 인생을 살아갈 클라라의 미래를 암시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아름다운 숲 속 자연과, 그 안에서 펼쳐지는 '마술적 사실주의'가 잘 담긴 장면들이 인상적인 영화였다. 죽어버린 자신의 딱정벌레에 숨을 불어넣어 살려내는 장면과, 마지막 굽은 자신의 척추를 스스로 맞춰 넣는 장면들을 통해 우리에겐 잉카, 아즈텍과 같은 신비한 고대 문명으로부터 이어진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이국적인 신비로움을 체험할 수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진행된 감독과의 영상 인터뷰에 나탈리에 알바레즈 메센 감독 역시 스웨덴 사람이지만 본인의 뿌리는 남미 코스타리카임을 밝힌 그녀는 남미 사람이기에 느낄 수 있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인 감정과 자연 풍광의 아름다움을 관객들과 나누고 싶었다고 소회를 남기기도 했다.
그렇다면 영화 <클라라 솔라>는 자신의 '자아'를 지키기 위해 타인과 어울리는 것을 포기하고 숲 속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는 것일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영상 인터뷰에서 나탈리에 알바레즈 메센 감독은 이런 말을 남겼다.
'혼자'라는 단어는 강력한 단어이지만, 동시에 슬픈 단어이기도 하다.
'홀로' 살아간다는 것은 그만큼 그 개인이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하지만, 반대로 말 그대로 '혼자'라는 것은 외로움이 가득한 슬픈 상태와도 같기 때문이다.
앞서 서두에서 이야기했던 장 폴 사르트르는 타인과 사회는 ‘나’의 실존을 방해하는 지옥이지만, 이를 느끼면서도 결국은 사회적인 동물로서 타인과 멀어질 수 없는 비운의 운명을 인정했다. 희곡 <닫힌 방>에서 문이 없는 방 안에 갇힌 세 사람도 결국은 스스로의 현실을 직시하고 방에 남는 것을 택한다.
“타인은 우리에게 지옥이지만,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데 분명한 역할을 한다”
사르트르는 분명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또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타인이 지옥이 되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음으로써 점점 자유의지를 지닌 '나'로서의 실존에 가까워질 수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우리는 내 '자아'의 실존을 위협받으면서 불가피하게 사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기도 하지만, 사람과 함께하며 위안받고자 '자발적으로' 사회와 타인들과 연대하는 삶에 동참하기도 한다. '산티아고'는 클라라의 구애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 클라라에게 산티아고는 그녀의 자아를 인식하고, 발현하도록 그 불씨를 틔우는 것을 도와준 조력자이며, 그녀의 구원자였다. 살다 보면 점차 느껴지는 것이지만, 세상엔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다.
그녀가 몸을 담근 강물도, 어찌 보면 티 없이 맑고 깨끗하다는 물의 의미보다는 여러 수중 생물들이 살며 배설한 배설물, 흙탕물이 섞인 더러운 물에 가까울 것이다. 자신을 완전무결한 순수함의 결정체로서의 '성녀'로 만들며 오히려 자신을 옭아맨 집에서 사용하는 깨끗한 물이나, 성수보다 오히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 스스로로 일어서며 때 묻은 세상과 마주할 수 있는 '용기'와 '힘'이었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지난 글에서 소개한 제11회 스웨덴영화제의 개막 작품 <타이거즈>의 주제 의식과 비슷한 결을 지니고 있는 듯하다. 나를 둘러싼 타인들의 시선과 기대에 둘러싸여, 말 그대로 '타인'이 지옥인 이 사회를 살아가려면 옳고 그름을 스스로 판단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온전한 '나'로서의 고민과 사유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영화 <클라라 솔라>는 우리에게 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