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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원 Mar 02. 2024

'공평'같이 뻔한 것은 답이 아니다

영화 <오징어와 고래>

영화를 보다보면 으레 영화 속 인물들 중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지, 그 선악의 판단에 먼저 집중하게 될 때가 많다. 물론 '선악'이라는 가치가 어떤 이야기를 이해하고, 사람을 이해하기 가장 쉬운 잣대인 것은 분명하다. 이 놈은 착한 놈이고,이 놈은 나쁜 놈이니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누굴 욕해야 할지가 일단 결정된다. 그것만으로도 그 이야기는 충분히 재밌어지고 보고 들을 만한 것이 된다.  

특히 내게는, 이번에 노아 바움백 감독의 <오징어와 고래>라는 작품을 보면서 더욱 그랬다. 그의 영화는 지극히 모든 관심과 집중을 '인물'에 쏟는다. 그의 영화를 구성하는 인물들이 한데 모여 일으키는 상호작용 속에서 각각의 캐릭터가 지닌 고유하고 독특한 성격이 이따금씩 비친다. 이야기 자체는 어디서든 일어날 수 있는 뻔한 것일지 몰라도, 그것을 이루고 자아내는 인물들에게서 고유하고 독창적인 스토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실,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뻔하지 않은 것들이 모여 만들어내는 뻔한 이야기. 


영화 <오징어와 고래> 속에서 작가 부부인 버나드(제프 다니엘스)와 조안(로라 린니)은 뉴욕에서 두 아들 월트(제시 아이젠버그)와 프랭크(오웬 클라인)를 키우며 살고 있다. 독선적이며 자기중심적인 버나드와, 그런 버나드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외도를 거듭하는 로라는 가정 생활을 이어가다 결국 이혼과 함께 별거를 결정하고 두 아들을 '공동 양육'(Joint Custody)하게 되며 여러 사건들을 겪게 된다.

부부는 '공동 양육'을 말하며 '공평'에 대해 말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 둘 다 너희를 사랑하니까 그렇단다. 하지만 자식에 대한 이 부부의 사랑은 '사랑'이라기보다는 '욕심'에 가깝다. 이들이 말하는 '공동 양육'은 협력이라고 하기보다는 '자녀들' 이라는 보물을 차지하기 위한, 차라리 '전쟁'에 가깝다. 자녀들 앞에서 서로 끊임없이 반목하고, 으르렁대며 약점과 치부를 서슴없이 드러내는 두 부모 사이에서 아이들의 마음에 남는 건 사랑이 아닌 상처다. 매주 금요일 저녁 <금쪽같은 내새끼>에서 오은영 박사님과 상담하는 가족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는 그림 아니던가. 


아이들에게서도 특징적인 점이 엿보인다. 아버지 버나드에게서 보이는 특유의 '열등감에서 비롯한 듯 보이는 우월감'을 빼닮은 첫째 월트는 아버지를 좋아하고, 또 존경한다. 그리고 공동 양육 과정에서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외도 사실에 대해 듣게 된 월트는 어머니에 대한 반감이 더욱 커진다. 

반면, 둘째 프랭크는 뭐든지 제멋대로인 아버지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으며, 오히려 세심하고 신중한 어머니를 더 좋아하는 태도를 보인다. (영화 속에서 두 아이가 같은 상황에서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이는 장면들이 등장하는데 이 영화를 감상할 때 매우 흥미로운 포인트들 중 하나다.)  

결국 이 영화에서 '선악'의 틀에 완벽히 갇혀버린 건 영화 속 인물들이다.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고 있는 부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조차 부모 중 한 쪽의 편에 서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첫머리에서 그 모든 것을 한 장면에 담았다. 아버지와 첫째, 어머니와 둘째가 편을 먹고 테니스를 치던 그 장면에서 말이다. 무슨 윔블던 복식 결승전이라도 되는 듯 작은 서브 실수에도 욕을 하며 심한 짜증을 내고, 월트에게 엄마의 약점인 백핸드를 공략하라고 지시하던 아빠 버나드. 그리고 그 작전을 충실히 이행하는 월트. 그 모습을 보다못해 나가버리는 엄마 조안. 

하지만 이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진 않다. 영화는 월트, 프랭크 두 아이들의 모습에서 보는 이에게 한 가지 아이러니를 선사한다. 그것은 바로 아이들이 사실 겉으로는 아빠와 엄마 둘 중에 한 사람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일 뿐, 다른 한 쪽을 버리지 않고 또 다른 면에 그것을 간직해 뒀다는 것이다. 둘째 프랭크는 엄마를 좋아하지만, 일이 틀어질 때마다 심하게 짜증을 내며 욕을 내뱉는 모습은 아빠 버나드의 그것과 몹시 닮아 있다. 첫째 월트는 엄마를 증오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마음 속으로는 세심하게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고 마음을 토닥여주는 엄마의 모습을 마음 한 켠에 좋은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결핍된 것이 더 커보이는 못된 본성을 지닌 인간은 무언가를 판단할 떄, 같은 것을 보고도 그것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바라본다. 결국은 그 모든 것이 나의 '욕심'에서 발(發)한다. 누구에게나 보여지는 모습은 하나일 뿐, 그것을 때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보는 건 나 자신의 욕심에 따른 시선이라는 것이다. 


결국 부부가 진심으로 '공동 양육'을 원했다면, 그들이 말했어야 하는 것은 '공평'이 아닌 '인정'과 '양보'였다. 어떻게 사람의 삶이 '공평'이라는 말로 무 자르듯 가볍게 재단될 수 있겠는가. 억지로 베어내려고 하면 남는 것은 피와 상처일 뿐이다. 부부는 서로 자신의 결핍만을 우선시하며 격앙될대로 격앙된 미움의 감정을 아이들에게까지 전가했다. 그런 알량한 가치를 들이대며 이를 아이들에게 설득하려한 것은 내가 아이를 더 사랑하는 부모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었다.

이 이야기가 뻔하디 뻔하다고 느껴지는 만큼 그것은 우리의 삶에 더 가까이 가닿아 있다. 영화 <오징어와 고래> 속의 독특한 개성을 지닌 이 인물들을 나와 내 주변으로 쉽게 치환해볼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렇게 영화를 매개로 '인정'과 '양보'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나조차 내가 가진 것보다는, 내게 없는 것이 더 커보이는 못난 인간일 뿐이다. 나도 그런 본성을 이기는 현명한 인간을 꿈꾸지만, 뻔하디 뻔한 삶 속에 갇힌 몸으로 그 경지는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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