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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rangebluegray Oct 16. 2020

예민한게 아니라, 많이 참은거야

아니, 내가 예민한 것도 맞지만 네가 무례하기도 해

 몇 달 만에 친한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잘 지내?' 냐는 인사 하나 없이 지금 여자친구와 헤어졌으니 빨리 소개팅 할 사람을 구해달라는 연락이었다. 그 와중에 조건은 매우 까다로웠다. '피부가 하얗고, 순둥순둥하게 예쁘고, 직업이나 성격도 무난하게 괜찮고 재밌고 착한 사람'으로 구해달라고. 


 나는 최선을 다해 여러명에게 친한 동생의 매력을 어필하며 소개팅 주선을 시도했다. 몇 시간 만에 적어도 다섯 명 정도의 사진을 보내주었는데, 그 중 셋은 이 친구가 본인의 스타일이 아니라고 했고, 둘은 상대방 쪽에서 거절했다. 평소에 용건이 있어야만 연락을 하는 것 자체를 싫어하기 때문에 최근까지 연락을 했던 사람들에게만 쭉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해 두었고, 나도 적당히 누군가가 답장을 주면 동생에게 알려 줄 참이었다. 


 막 여자친구와 헤어져서 누군가라도 만나야겠는 그 마음은 이해를 한다. 그래서 나름대로 열심히 찾아봐 주려고 노력 중이었다. 마지막 후보의 의사를 물어봐주겠다고 한 지 한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아직 연락 없어?'라는 톡이 왔고, 나는 아무런 이모티콘이나 'ㅋㅋ' 없이 '나도 기다리는 중' 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그 답장에 내가 되돌려 받은 말은 너무나 어이가 없었다. 


"예민하누 ㅠㅠ"


 내가 조울증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나에게 연락을 했겠지만, 나의 상태를 다 떠나서 기본적인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10년 넘게 알아왔어도, 몇 달간 연락두절이다가 안부 인사 하나 없이 다짜고짜 소개팅 좀 알아봐달라는 말부터, 오후 내내 끊임없는 카톡으로 본인의 상황을 토로하고, 그러다가 예민하다니. 


 나는 내가 예민하다는 점을 아주 잘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과잉으로 참는 경향이 있다. 어지간하면 사람들의 진지한 고민상담부터 사사로운 이야기까지 다 들어주는 편이고, 무리한 부탁을 청해와도 내 능력이 닿는다면 어떻게든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런 점을 잘 알고, 본인이 필요할 때만 연락을 취하거나 자기 멋대로 나와의 관계를 이어가다 나에게 손절당한 친구들도 몇몇 있다(본인들은 끝까지 왜인지 모르겠지만). 


 가끔 사람들은 '적당한 선'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다. 본인이 바쁘고 집중해야 때가 있는 것 처럼,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는 점은 왜 간과하는 걸까. 왜 적당히 참아줄 때 알아서 물러서는 법을 모르는 걸까. 이 친구의 기준에서 나는 몇 달만에 급작스럽게 연락해서 '누나 나 소개팅 좀' 이라고 말해도 되는 사람인걸까. 내가 조울증인 건 알릴 생각도 없었지만 잘 지내냐는 질문조차 스킵해도 될 만큼 돈독한 사이라고 생각하는걸까.


 여태껏 나는 나에게는 엄격하면서 타인에게는 관대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상대방의 무례함을 나의 예민함으로 애써 억누르고 외면해왔다. 그렇지만 앞으로는 나에게도 기준이 있다는 걸 누구에게든 보여주려고 한다. 내 기준에서 '이건 좀 아니네?' 싶은 생각이 들 때는 언제든지 상대방이 알아차릴 수 있도록. 갑작스럽게 연락을 해 와 돈을 빌려달라거나, 썸남과 애매한 상황이라거나, 심심한데 지금 당장 나올 수 있냐는 말에,


"너 지금 이러는거 무례한거야."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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