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그때 최선을 다했고, 그래서 후회하지 않아
이제, 언제 해외여행을 갈 수 있을지 모른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내년이 되면 좀 다닐 수 있지 않을까?' 라며 희망적으로 이야기했지만, 나날이 늘어가는 해외 확진자를 보면 대한민국에 살고 있어서 다행인 지경이다.
외국에서 자랐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나는 연휴 때마다(대부분 계절이 바뀔 때마다) 해외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여행지에 가기 전부터 여행 일정을 대략이라도 꼼꼼하게 짜고, 가서도 가고자 했던 곳들은 천재지변이나 철도 파업이 일어나지 않는 한 모두 다녀오는 편이었다. 그렇게 여행을 다녀와야, '아, ~할 걸' 이란 생각보다 '아, 그때 거기 가길 너무 잘했고, 그 레스토랑 너무 맛있었고, 기회가 되면 꼭 또 가야지'라는 만족감이 남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2019년 12월, 나는 대학교에서 처음 만난 10년 된 친구와 함께 뉴욕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여행 5일 차였던 12월 25일 크리스마스날, 친구와 나는 타임스퀘어 지하철역의 한 복판에서 싸웠고, 여행을 다녀온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 연락 한 번 없는 상태로(나에게는 손절) 각자의 인생을 살고 있다.
친구와 싸운 이유는 너무나도 단순했다. 하지만 깊게 파고 보자면 지난 10년 간, 서로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고, 친구가 던진 마지막 한 마디가 이 관계는 억지로 꿰맬 수 있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게 했다.
"그럼 내 기분이 제일 중요하지, 뭐가 중요해?"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언제 다시 올 수 있을지 모르는 이 여행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하고, 여행 중에도 노력하고, 남은 일정을 어떻게 해야 후회가 없는 여행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친구와 중간에 삐끗하긴 했어도 대화로 잘 해결하고, 여행의 목적이 달랐다면 잘 맞춰서 마무리 하자는 의미에서 용기 내서 말문을 열었던 건데, 돌아오는 대답은 너무나도 내 생각 밖이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이 아니면' 대화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코로나를 예견한 건 당연히 아니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뉴욕으로 여행 올 수 있을지도 몰랐고, 그때가 아니라면 친구와, 20대의 마지막에 다시는 이렇게 자유롭게 여행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친구는 다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나중'이 있을 것이라고. 지금 당장 기분이 상했으니 대화는 나중에 하고, 뉴욕 여행도 나중에 누군가와 다시 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지만 다음은 없다. 돈과 시간이 있다고 한 들, 코로나가 창궐하는 이 시국에 여행은 갈 수도 없고, 서로가 대화하고자 하는 타이밍도 달랐기 때문에 친구와 나에게는 대화할 '다음'이 없다.
친구는 그때, 내가 내미는 손을 잡았어야 했다. 친구는 그때 나에게 상처가 될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었을지도 모르고, 그 말을 후회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10년 간, 그리고 그 크리스마스 다음 날 아침까지도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지금 후회하지 않는다. 10년이나 된 친구를 잃었다는 아쉬움 같은 것도, 지난 추억이 아깝다는 생각 같은 것도 없다. 그 친구는 나에게 '그냥 살면서 알았던,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렇지만 '언제 밥 한 한번 먹자'라는 말 같은 건 없을 사람, '다음에 만나자'라는 연락 같은 건 없을 사람으로.
나는 정말 친한 사람들에게는 '다음'이라는 말을 잘하지 않는다. 늘 구체적인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것으로 내 마음의 최선을 다한다. 왜냐면 나에게 막연한 '다음'이라는 건 없고, 나에게서 '다음에' 혹은 '나중에'라는 말을 들었다면, 나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거나 앞으로도 만날 만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 생각보다 다음과 나중은 쉽게 오지 않아요. 지금 그냥 생각나는 대로 던진 말 한마디 때문에, 혹은 코로나 같은 상황을 초월하는 천재지변 때문에 등등. 다음이 있을 수도 있겠죠. 내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감정 소모적인 대화를 감당할 힘이 남아 있다면. 자가 격리할 돈과 시간이 있고 마스크를 낀 관광객을 받아 줄 관광지가 있다면. 단지 언제가 될지 모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