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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규 Apr 02. 2020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읽고 : 상상력의 거세

「자본주의 리얼리즘 - 대안은 없는가?」 마크 피셔 저, 박진철 역

 “우리는 모순 속에 살고 있습니다. 야만적이고 극도로 불평등한 상황, 모든 존재가 오직 돈으로 평가되는 이 상황이 우리에게 이상적인 것으로 제시됩니다. 이미 확립된 질서를 옹호하는 자들이 아무리 자신의 보수주의를 정당화하려고 해도 진정으로 이 질서가 이상적이라거나 멋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대신에 이들은 나머지 모든 것이 끔찍하다고 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가령 우리가 완벽히 좋은 상황에서 살고 있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운 좋게도 완전히 나쁜 상황에서 살고  있지도 않다고, 우리의 민주주의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피로 얼룩진 독재보다는 낫다고, 자본주의는 부당하지만 스탈린주의 같은 범죄는 아니라고, 우리는 수백만 명의 아프리카인이 에이즈로 죽도록 방치하지만 밀로셰비치처럼 인종주의적 민족주의를 선포하지는 않는다고,  우리는 비행기로 이라크인을 살해하지만 그들이 르완다에서 하듯 마체테로 사람 목을 베지는 않는다고 말이죠.” (본문 p.17-18, 알랭 바디우,『윤리학 : 악에 대한 의식에 관한 에세이』)


 자본주의는 무엇인가? 현대의 자본주의를 단순한 '생산-유통-소비'의 경제체계라고만 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현실을 만들어낸다. 누군가의 삶과 죽음을 가르고, 거대한 환경 재앙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우울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현대인이라면 아마 자본주의에 문제점이 있다는 데에 분명히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마르크스의 예언과는 달리 여전히 세계에 널리 퍼져 더 이상 '자본주의화'할 곳이 없을 정도로 번성하고 있다. 무엇이 자본주의로 하여금 그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당연한 현실'로 존재하게 했을까?


 근본적으로는 선전기술, 더 넓게 보자면 위기관리가 그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가 가장 유토피아에 근접했으며("자본주의가 없었다면 이런 화려한 성장도 없었어!"), 자본주의 외의 다른 정치적-경제적 상상력을 악―적어도 '철부지 같은 생각'―으로 치부하는("그러면 차라리 북한으로 가든가!") 선전기술이 자본주의에 닥쳐올 위기를 싹부터 잘라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크 피셔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칠드런  오브 맨」을 보면서 우리는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프레드릭 제임스와 슬라보예  지젝의 구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 슬로건은 내가 '자본주의 리얼리즘'capitalist realism이라는 표현으로  의미하는 바를 정확하게 포착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유일하게 존립 가능한 정치-경제 체계일 뿐 아니라 이제는 그에 대한 일관된 대안을 상상하는 것조차 불가능하다는 널리 퍼져 있는 감각이 그것이다. (본문 p.11)


  지젝의 '자본주의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라는 문구는 자본주의가 '사실real'을 독점함으로써 대안에 대한 상상력을 거세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소비에트가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정신 나간 소리 취급을 받기 시작한, 그리고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자본주의-민주주의 체제에서 더 이상의 변증법적 진보는 없을 것이라며 '역사의 종말'을 선언한 90년대 이후 세대에게 자본주의 이외의 선택지가 없다는 것은 문제조차 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인지해야 한다. 자본주의는 이제 일종의 자연의 일부로, 인간 사회에 있어서 필수적이며 필연적인 요소로 여겨진다. 그렇게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정상'으로 다가오며, 그 너머의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된다.


 글을 읽으며 아마도 많은 이들이 고개를 갸웃할 것이다. 물론 우리는 자본주의 너머의 것을 상상할 수 있다! 상상력은 본래 경계를 뛰어넘는 것 아닌가? 상상력으로 뛰어넘지 못할 주제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부분에서 그 상상의 방향을 약간 뒤트는 선전기술이 역할을 발휘한다. 비非자본주의적 상황에 대한 상상을 곧장 디스토피아로 연결 짓는 것이다.


 1991년 해체된 소비에트가 대표적인 예시다. 많은 사람들이 배급을 받기 위해 긴 줄을 서고,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는 와중에 사회적 혼란 속에서 각종 범죄가 만연하는 디스토피아는 우리가 '자본주의 너머의 것'을 상상할 때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다. 국내에는 비슷한 예시로 비참한 북한의 현실을 끊임없이 되뇌는 것이 있다. 베네수엘라의 경제위기를 이야기하며 산업구조와 국제유가 등의 복잡한 이야기나 경제제재 같은 대외적 요소는 무시한 채 오로지 좌파 정치의 무능과 모순으로 연결 짓는 기사들 역시 좋은 예시다.


 대안에 대한 상상력의 정치적 거세는 창작물에서도 두드러진다. 자본주의 너머를 그리는 대부분의 창작물은 자본주의의 공백을 곧 홉스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일컬어지는 자연 상태로 그린다. 전형적인 예가 바로 좀비물인데, 좀비물의 핵심은 좀비가 아니라 사회가 무너진 세상에서 만나는 다른 인간이지 않은가? 이는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라는  자본주의의 대원칙을 충실히 따르는 것이며, 자본주의 질서가 없는 세상은 이기적인 개인들의 무한한 생존 투쟁―즉, 홉스적인 자연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암시이기도 하다. 결국 그 이기적인 개인들의 투쟁을 문명적인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 권위적인 질서와 경찰국가가 필요하다는 일종의 메시지가 담겨있다고 볼 수도 있는 부분이다.




  이 시대의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자본주의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황금만능주의를 비판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아보기 힘들고, 비정규직의 양산에 문제의식이 없는 노동자와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꼬집지 않는 지식인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거리로 뛰어나가 혁명을 외치는 이들은 그보다도 찾기 힘들다. 길거리에 나가 정치적인 견해를 물어본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는 합리적 중도(좌/우)파입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이로부터 피셔가 캐낸 것은 자본주의를 진지하게 믿지 않는 사람들의 냉소가 자본주의의 재생산을 이끈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교장 선생님의 훈화를 진지하게 듣지 않지만 어찌 되었든 아침 조례는 진행되듯이 말이다.


 우리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믿는가, 믿지 않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마치 좀비 영화 속 치안 공백 상태가 정말 홉스적인 자연 상태로 이어질지에 대한 문제가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듯이. ("영화는 영화잖아!") 결국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실재하는, 정상적인 자연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는가? 결국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단순히 대안이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자본주의가 구조적으로 그 대안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본주의의 비극적인 현실을  알고 있다. 산업재해로 죽어나가는 사람들과 반지하방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매체를 통해 흔하게 전해진다. 그러나 '자본주의 리얼리즘' 세상에서  대안은 생각할 수도, 존재할 수도 없다. 앞에서 보았듯이 상상력을 거세당하기도 했고, 설사 어떤  나은 대안을 상상하더라도 그것을 이론화하고 실현할 여유와 역량 없기 때문이다. 결국 무력함 속에서 '자본주의'라는 현실에 대항할  없음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게 되고, 이는  자본주의가 자연의 일부가 되게끔 한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조금 해보자.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배계급에게 완전고용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을 더 싼 값에 부릴 수 없다는 뜻이다. 노동자의 목줄을 쥐고 있는 것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본가들에게, 마르크스가 산업예비군이라 불렀던 계층은 필수적인 존재들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빈민촌은 오점이나 실패를 드러내는 부분이 아니라 필수요건으로 자리 잡는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 『설국열차』(2013)에 등장하는 '꼬리칸'을 만들어내며 전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노동자들은 이른바 '룸펜 프롤레타리아'라는―부랑자, 매춘부, 범죄자 등등...―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 단순하게는 집에 돌아가 먹을 컵라면 값이라도 벌기 위해 자본가들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리게 된다. 임금 삭감과 비정규직화, 위험의 외주화까지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장 생계가 끊기는 노동자들에게 자본주의의 대안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이 실현될 수 있느냐, 같은 이야기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러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듯, 벼랑 끝까지 내몰리는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유지에 있어서 어찌 되었든 위험요소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출몰할지도 모른다!) 앞서 짚었듯 자본주의가 지금의 위상을 차지하게 된 데에는 바로 이런 위험요소에 대한 훌륭한 관리가 아주 큰 역할을 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양극화가 심각해진 1880년대 독일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을 막기 위해 시작된 사회보장제도가 좋은 예시다. 이를 당근이라 한다면 한편으로는 경찰력과 사법기관 같은 국가폭력은 채찍이라 할 수 있겠다. 큰 비용이 들어가는 당근과 채찍은 주로 3S 정책―'screen, sport, sex'―으로 대표되는 선전기술이 병행되는데, 이것이 나치의 선전장관 괴벨스가 독일 국민들의 집집마다 라디오를 보급한 이유다. 어찌 되었건 방송을 제작하고 송출하는 비용이 훨씬 더 싸게 먹히니까! 궁극적으로 그들의 목표는 현실에서 눈을 돌리는 것, 또는 최소한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을 떠올릴 여유나 능력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대안은 없다'는 통념은 이런 환경 속에서 퍼졌다. 아니면 그런 통념을 퍼뜨리기 위해 이런 환경이 만들어졌든지.




 프로파간다 없는 이데올로기란 상상하기 어렵다. 선전 없는 스탈린주의나 파시즘을 상상할 수 있는가? 그러나 자본주의는 누군가가 그것을 옹호하지 않더라도, 오히려 그래야 더 잘 작동한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최고의 사상이라며 떠벌리거나 이를 믿으라고 부추기지 않는다. 그저 나머지 것들보다 더 낫다고만 말한다. ("자본주의는 거지 같지만 이보다 나은 체제는 찾을 수 없어!") 이렇게 자본주의에 대한 옹호는 물론이요, 냉소, 또는 냉소보다 훨씬 강력한 의미의 비판마저도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공고히 하는 데 사용된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구성원들에게 자본주의에 대한 냉소를 허용―오히려 부추기기도 한다―하면서도, 그를 통해 스스로를 유지하는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끊임없이 재생산하여 별 대안 없이 체제에 순응하도록 한다. 자본주의는 그렇게 대항할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여지며, 이것이 바로 피셔의 '자본주의 리얼리즘' 개념인 것이다.


 책의 마지막에 실린 조디 딘과의 대담에서 피셔는 이를 명확히 요약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지만, 그 명제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직접 설득한다는 의미에서 이데올로기적이지는 않습니다. 그것이 이데올로기적인 까닭은 오히려 자신이 저항할 수 없는 힘이라고 사람들에게 확신시키기 때문입니다. 책에서 저는 일터에서 신자유주의적 변화를 실천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이러한 업무들 중 어떤 것도 믿지 않아. 이 일은 그저 지금 해야 하는 것일 뿐이야"라고 말하는 관리자의 사례를 들었습니다. (중략) 당연한 말이지만, 이데올로기는 비정치적으로 보일 때, 그저 사물들이 존재하는 방식처럼 보일 때 가장 강력합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언제나 이런 탈정치화 효과를 만들어 냅니다. (본문 p.189)


 요약하자면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두 층위에서 작동한다. '자본주의는 대항할 수 없는 것'이라는 믿음을 선전하고 이를 수용하게 만든다. 다른 한 편으로는 자본주의적 지배에 수긍하는 것은 정치적 문제가 아닌 실용적 문제라는 통념을 퍼뜨린다. 그러니까, 우리가 자본주의의 문제에 대해 아무리 냉소적으로 거리를 둔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행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리얼리즘 이데올로기는 실상을 은폐하는 환상의 수준을 넘어서, 우리가 인지하는 사회적 현실 자체를 재구축하는 무의식적 수준에 있다. 자본주의의 대안은 없다는 통념은 판단이 아니라 무의식에 기초하지 않는가? 굳이 그 대안이 있는지 생각해보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 답이 '없다'라는 것을 느끼고 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이미 그 무의식의 수준까지 침투해있다.


 피셔는 위의 대담에서 "실종된 것은 우리의 정치지 정치 그 자체가 아닙니다.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좌파의 병리 현상입니다."라고 말했다. 어떤 맥락에서 보면 피셔는 희망을 잃지 않고자 했던 것 같다. 정말로 대안은 없는가? 마크 피셔는 우울증을 앓다가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인상 깊었던 구절 몇 개로 이만 글을 줄여야겠다.


 「칠드런 오브 맨」에서 파멸은 장차 일어날 일도 이미 발생한 일도 아니다. 오히려 파멸은 지금 겪고 있는 일이다. 파멸이 발생한 정확한 순간은 없다. 세계는 한 번의 대폭발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서서히 빛을 잃고 흐트러지면서 점차 허물어진다. 무엇이 파멸을 야기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파멸의 원인은 먼 과거에, 어떤 악한 존재의 변덕(일종의 부정적인 기적, 혹은 참회로는 풀 수 없는 저주 같은)처럼 보일 만큼 현재의 절대적으로 동떨어진  과거에 놓여 있다. 애초에 저주의 시작을 예상할 수 없었듯 예상할 수 없는 개입만이 그런 파멸을 완화할 수 있다. 행위는 소용없다. 무의미한 희망만이 의미를 만든다. 무력한 자들이 가장 먼저 찾아드는 곳인 미신과 종교가 급증한다. (본문 p.13)
 사실 자본주의의 리얼리즘은 이런저런 반자본주의를 배제하는 것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다. 슬라보예 지젝이 도발적으로 지적하듯이 어쨌거나 반자본주의는 자본주의에 널리 유포되어 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악당은 매번 ‘악한 기업’으로 판명 난다. 이런 반자본주의적 몸짓은 자본주의 리얼리즘을 무너뜨리기는커녕 실제로는 강화한다. (본문 p.29)
 자본주의 리얼리즘은 신자유주의에 굴복했다는 사실뿐 아니라 사회적 상상력의 쇠퇴와도 관련됩니다. 자본주의의 종말보다 세계의 종말을 상상하는 것이 더 쉽다는 말은 단순히 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이 나올 개연성인 낮다고 우리가 생각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제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가 어떤 모습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는 뜻도 담고 있습니다. (본문 p.140)
 하지만 저는 냉혹한 현실주의에 대한 저 호소들은 자본주의에도 좋은 어떤 것이 있다는 믿음에 의해서만 혹은 적어도 자본주의가 가장 덜  나쁜 체계며 그 외에 다른 모든 체계는 더 나쁠 것이라는 믿음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령 자본주의는 ‘인간 본성’의 ‘사실성’reality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좋은 것이며 이런 이유로 자본주의는 ‘제대로 작동하는’ 반면에 다른  체계들은 그렇지 못하다는 거죠. 그러나 자본주의가 다른 대안들보다 더 바람직하다는 식의 주장도 여전히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자본주의가 다른 어떤 체계도 능가할 것이라는 승리주의적 의기양양함의 문제는 아닙니다. (본문 p.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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