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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규 Oct 26. 2023

[꼬문생각] '누칼협'의 사회학

고대문화 부록 '꼬문생각' 151.5호 기고

    요즘 어째서인지 보기 거슬리는 ‘밈’이 하나 있다. “누가 칼 들고 협박함?”, 이른바 ‘누칼협’이다. 처음에는 ‘누텔라 칼로 발라 먹기 협회’ 같은 우스개를 줄인 말인가 싶었는데, 스스로 선택했으니 알아서 버티라는 의미였다. 처음에는 시도때도 없이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라오던 것이 이제는 자연스럽게 일상의 대화까지 침투했다. 누군가의 선택을 두고 ‘칼 들고 협박’한 것이 아닌 이상 본인이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는 것처럼 들렸다. 단순한 유행어에 너무 진지하게 임하는 것 같지만, 그 단순한 것이 우리가 무엇을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지, 그래서 무엇을 용인하고 무엇을 거부할지에 큰 영향을 준다면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이유로 충분하다.


    처음 ‘누칼협’을 듣고 화가 났던 때는 올해 초 전철역에서 친구를 기다리며 스마트폰을 보던 중이었다. 누군가가 일행과 약간의 언쟁을 벌이며 내 옆을 지나갔다. “막말로, 누가 이태원 가라고 칼 들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그게 왜 국가 책임이야?”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사람들이 죽은 것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건을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하지 말고 ‘순수한’ 추모를 해야 한다는 말이 이어졌다. 그에게 누가 이태원에 제복 경찰을 배치하지 말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는지 되묻고 싶었다.


    우리는 살면서 ‘선택’을 수없이 많이 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선택의 결과에 대한 책임이 무조건 자신에게 있음을 의미하진 않는다. 예를 들어, 쉽게 해고될 수 있는 비정규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발전소 직원이 야간 2인 1조 근무 규정을 어기는 사측에 규정을 지키라며 항의하는 선택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언제든지 말 잘 듣는 다른 이들로 ‘대체’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김용균 씨는 홀로 현장에 들어가 목숨을 잃었다. 누군가 칼을 들고 협박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선택’은 분명 인력을 충분히 고용하지 않은 하청업체, 더 나아가서는 노동권을 온전히 보장하지 못하는 구조에 책임이 있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인파를 관리할 인력을 배치하지 않아서 이태원에서 159명이 죽었고, 하천의 둑을 정비하지 않아 오송의 지하차도에서 14명이 죽었으며, 건설노조를 ‘악’으로 규정, 탄압해 춘천지법 강릉지원 앞에서 1명이 죽었다. 인하대에서, 강남역과 신당역 화장실에서, 구의역과 성수역의 스크린도어에서, 삼다수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고, 잃고 있다. 이들의 죽음을 두고 ‘누가 칼 들고 협박했냐’며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기는 쉽다. 그리고 이런 맥락으로 쓰이는 ‘누칼협’은 그 쉬운 책임 전가를, 더 쉬운 밈의 방식으로 행하는 셈이다.


    ‘누칼협’이나 ‘알빠노’ 같은 말이 ‘나쁜’ 밈이니 쓰지 말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러한 종류의 밈들은 사회의 상태를 나타내는 일종의 증상이자, 현실의 정치성을 은폐하는 말장난 중 하나에 불과하다. 그 원인이 되는 사회의 구조와 신자유주의적 세계관, 정치에 대한 혐오가 바뀌지 않는다면 밈을 ‘올바르게’ 교정하는 것 따위는 별 소용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를 바꾸자는 거창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사실 그게 가능할지도 잘 모르겠다)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정치적이고 그 사회 구조의 영향이 매우 크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 정치와 구조를 직시하자는 것이다.


    잠시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서, 우선 우리를 둘러싼 세계가 매우 ‘정치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경찰이나 군 같은 합법적인 국가폭력의 영향력 아래에서 살아가며, 투쟁의 산물로 만들어진 노동법과 선거법 등의 제도를 누리고, 끝내 죽음을 맞을 때까지도 각종 법률을 준수하여 장사를 치른다. (화장한 뒤 그 재를 뿌리는 ‘산분장’은 얼마 전까지 합법적으로 할 수 없는 장사였다) 조금 더 일상에 밀접한 수준으로 들어가자면 당장 지금 내 책상에 놓여있는 콜라 캔 역시도 정치와 무관하지 않다. 빼곡하게 적힌 영양 성분표에 어떤 내용을 적을지 규정하는 것도, 전 세계에 유통되는 콜라의 상표를 보호하는 것도 정치의 산물이다. 때로는 미국이나 자본주의에 대한 비유로 사용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정치적인 것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곧 우리가 정치적인 것들과 수없이 상호작용하며 생활하고, 우리의 생각보다 많은 것들이 정치의 문제와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의 선택이 오로지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주변 세계와 구조의 책임 역시 크다고 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앞서 살펴본 용례와 같은 ‘누칼협’, ‘알빠노’ 따위 밈의 악용은 유머의 탈을 쓰고서 공적 연대를 거부하고 특권을 공고히 하려는 욕망을 비정치적으로 포장한다. 지킬 특권이 없는 이들도, 공적 연대의 수혜를 받을 수 있는 이들도 유머의 방식으로 반복하며 추상적인 효용감만을 충족한다. 죄책감을 덜고 사회 구조에 대한 접근을 차단해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릴 수 있게끔 해주는 장치인 셈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밈의 사용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일상적이고 비정치적일 것을 요구하는 대화는 밈의 사용 여부와는 상관없이 구조와 사회에 대한 접근을 차단한다. 특히 반복되는 사회적 참사나 산업재해 등에 대한 태도가 대표적이다. “순수하게 추모만 해야지,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드는 인간들은 악질이야!” 같은 말들 말이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은 너무나 명백히 정치적인데 어떻게 그 죽음으로부터 ‘순수한’ 무언가만을 찾을 수 있으며, 어떻게 비정치적인 추모만을 할 수 있는가? 이러한 맥락을 무시하고 그들의 죽음 앞에 ‘누칼협’을 운운하거나 ‘순수한 추모’를 요구하는 것은 비정치적인 포장으로 기득권이 없는 이들의 정치적인 이익을 해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노골적으로 정치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서이초등학교에서 교사가 자살한 뒤로 이어진 주호민 작가에 대한 논쟁이나, 오송 지하차도 참사 현장에서 웃음을 보인 공무원에 대한 비난이 한 예시이다. 교사의 노동권 보호, 장애 아동 교육 체계의 허점 등 문제의 근원적인 해법을 고민하는 것보다 주호민 작가 개인에 대한 비난과 옹호가 우선시되고, 수해에 총체적으로 무능하게 대응한 정부와 지자체보다는 이름 모를 어느 공무원이 더 큰 죄인이 된다.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가 그 구조, 즉 정치로부터 기인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고 악한, 부주의한 개인을 찾아 책임을 물으려 하니 동력이 분산되고 제대로 된 해결은 멀어지기만 한다. ‘탈정치’가 정치적으로 강력한 프로파간다인 이유이다.


    정치를 더러운 무언가로, 우리와는 동떨어진 것으로, 그래서 순수함과는 반대에 있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내 삶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비정치적인 유머의 탈을 쓴, 그래서 생활 속에 녹아드는 밈들이 구조와 정치를 지워버릴 여지만 줄 뿐이다. 여러분 모두 부자 되세요’와 ‘나만 아니면 돼’부터 ‘헬조선’과 ‘수저론’을 거쳐 ‘누칼협’과 ‘알빠노’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가 일종의 사회적 파산, 혹은 정치적 파산을 겪는 중임을 보여주는 것 같다면 과장된 해석일까? 모두가 부자가 될 수도, 나만 잘 살 수도 없으며, 개인의 노력은 생각보다 힘이 없다는 사실에 ‘자력갱생’의 신앙이 깨지고 냉소와 절망의 학습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최근 연쇄적인 흉기 난동 사건이 있었다. 흉기 난동을 예고하는 글도 수없이 올라왔다. 이 사건들도 ‘누칼협’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파산의 과정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구조와 정치를 가리면 수많은 문제의 원인은 자신에게서, 또는 주변의 개개인에게서 찾을 수밖에 없다. ‘주변 사람들은 다들 행복한데 나만 불행하다’는 불만, 관심과 인정에 대한 갈망, 우울증을 비롯한 정신 질환이 뒤따를 수도 있다. 그렇게 학습된 절망과 분노가 범죄자 개인의 특성과 맞물려 타인, 특히 공격하기 쉬운 약자에게 표출된다면 그 결과는 어떻겠는가. ‘누칼협’이 밈이 된 시대에서 ‘칼부림’ 사건이 반복된 것이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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