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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이아 Sep 04. 2022

"알아서 잘하잖아요."

내가 듣고 산 말 #첫번째

혼자서 책 만들고 살면 능력자를 만날 때가 많다. 책 제작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의 능력자를 만날 수 있는 게 '독립출판'세계다. 부캐인 작가로서 글만 잘 쓰는 게 전부가 아닌 본캐의 능력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독립출판 세계가 재밌다.) 포토샵이나 인디자인 같은 책 제작에 필요한 디자인 프로그램을 잘 다루는 것은 기본이고 본업의 노하우는 강연 수준인 경우도 심심찮게 만난다. 덕분에 책방에서 마주치는 모든 작가님이나 페어에서 마주치는 모든 작가님과의 대화에선 배울 것이 항상 많다. 신박한 시도를 한 책도 자주 만나는데 인쇄소에 어떻게 부탁하면 못 이기는 척해주는지 꿀팁을 얻은 적도 많다. 후후. 자신의 책은 자신이 만드는 동질감으로 얻어진 인연이다.


내 책 만드는 것보다 남 책 만드는 데에 관심이 많다 보니 모든 출간 책을 유심이 본다. 다양한 레퍼런스를 모아 두어야 편협하지 않은 책을 만들 수 있으니까. 라는 변명으로 많이 산다. 재밌고 예쁘고 신박한 책이 널려 있는데 안 사곤 못 배기지.


최근에 한 작가님은 개정판을 작업하며 표지를 바꿨다며 가제본을 슬쩍 보여주었다. 기존의 귀엽고 알록달록한 표지에서 깔끔하고 분위기 있는 사진 표지로 바뀌었다. 기존 책도 내지에 정성이 한가득이었지만 개정판은 더 정성이 한가득이었다. 디자이너를 갈아 넣어도 나오기 힘들다는 모든 내지의 레이아웃과 요소에 디자인이 된 것은 기본이고 사용 폰트도 유료 폰트에 편집자를 갈아 넣어도 나오기 힘들다는 꼼꼼한 검수까지 거친 책이었다. 혼자서 다 만든 예쁘고 퀄리티 높은 책이라면 안 살 이유가 없지. "아니, 세상에, 참말로, 어떻게 이렇게 예쁘게 만들었어요?" 나의 혀 내두름이 호들갑처럼 느껴졌는지 작가님은 "아이쿠. 이아님도 알아서 잘하잖아요."라며 칭찬에 칭찬으로 화답했다.




느슨한 연대보다 선택적 연대를 좋아하는지라 가급적 모임은 원데이로 끝낸다. 참여한 모임도 원데이로 꼼지락꼼지락 한 게 많다. 그래서 원데이 클래스나 강연, 강의 듣는 걸 좋아한다. 같은 내용이라도 누가 진행하느냐에 따라 느낌이 다르고 혹시나 내가 다 아는 내용이라고 해도 그동안 놓치고 살았거나 새롭게 알게 되는 부분이 꼭 하나씩은 있다. 그리고 모든 정보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하거나 바뀌기 마련이다. 어제와 오늘의 내 몸무게도 바뀌는 걸. 그러니 정보는 들어두어 나쁜 게 없다. 정보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들어보는 건 덤이다.


모든 책은 읽으면 무엇이든 남는 것처럼 모든 대화는 하면 무엇이든 남는다. 그것이 정보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영감을 주어 개인의 발전에 기여한다. 는 게 내 생각이다.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 이곳저곳 기웃대는 게 흡사 하이에나나 미어캣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증언이 있다. "이아님은 알아서 잘하잖아요. 근데 왜 들어요? 정보 빼내는 하이에나예요? 경계하는 미어캣이에요?"




정체를 지우고? 참여해도 가끔 진행자가 물어볼 때도 있다. "이아님은 왜 왔어요? 알아서 잘하잖아요." 애매한 웃음으로 넘기거나 사회적인 의의를 들먹인다. 그러고 나면 현타와 이상한 감정이 찾아온다. 그동안 내가 허세를 얼마나 떨었으면 이런 말을 들을까. 잘 보이고 싶어서 너무 설치고 다닌 건 아닐까. 좋게 봐주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실제와의 괴리감이 생긴다. 


'알아서 잘한다'를 받아칠 변명을 생각했다. 대충 칭찬으로 하는 말이니 가볍게 넘기면 되지만. 완벽주의가 아닌 내가 봐도 나는 알아서 잘한 적이 없다. 사람들의 눈에 스치는 물음표를 마침표로 고치고 싶었다. 스치는 물음표라도 물음표는 물음표니까. 하이에나도 아니고 미어캣도 아닌 데다 칭찬이라 가볍게 넘기기엔 양심이 찔렸다. 


1. 알아서 못 한다. : 이게 진짠데 왠지 안 먹힐 느낌이라. 패스.

2. 아직 조무래기다. : 이것도 진짠데 말투를 못 살리겠다. 패스.

3. 이렇게 열심히 해서 그렇다. : 사실도 아니고 왠지 재수 없어 보인다. 패스.

4. 감사합니다. : 이건 좀 너스레가 필요한데 그런 거 없다. 패스.


그렇게 고심해서 찾은 변명이 "재밌어서요."다. 간결하게, 거짓 없이, 손발 오그라들지 않을.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나도 타인도 '납득할 만한'. 




불특정 여럿에게 들은 공통적인 말은 머리에 남는다. 마치 내 책을 읽은 불특정 독자들이 남긴 피드백 중 공통부분을 발견한 것처럼. '나'라는 책을 읽고 말해준 거니까. 그럼 진짜 그런가 곱씹어본다. 의도치 않았던 부분이라면 더 곱씹어본다. 책갈피를 꽂아두고 까먹고 있다가 같은 말을 또 들으면 자동으로 그 페이지가 촤라락 펼쳐진다.


나도 분명 한 질문에 '에이. 이미 알아서 잘하셨잖아요.'라는 댓글을 단 적이 있었는데. 그때 어떤 마음이었더라. 진짜로 이미 잘해서 그렇게 남겼었는데. 그렇다면 다른 이가 봤을 때의 나도 저런 느낌이려나. 질문을 남긴 이는 나와 같은 기분이었으려나. 


'잘'이라는 개념은 기준이 제각각이라 애초에 명쾌할 수 없는 명제다. 그걸 알면서도 납득할 만한 변명을 찾고 납득할 만한 이유를 찾는다. 잘한다는 말을 그대로 납득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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