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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캥 Jun 28. 2020

내 집 마련기-2

진작 일어났어야 할 일

200X년, 군대에서 병장을 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큰누나가 결혼을 하게 되었고 살면서 처음으로 새로 가족이 생기는 것을 경험했다. 성이 다른 사람이 평생 가족으로 살게 되는 것, 새롭기도 하고 막연히 긴장되기도 하였다. 


보통 사랑하는 누나를 데려가는 남자라고 하면, 남동생으로서 텃세를 부릴수도 있는 것이 본능이라고 할 수 있겠다. 아버지도 일찍 돌아가시고 다른 남자형제도 없으니 왠지 나라도 뭔가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고. 어차피 쓸데없는 걱정이었지만.


남자형제 있는 여자랑 결혼을 안 해봐서 잘 모르겠다. 어떤 기분일지.


몇 년 전에 작은누나도 결혼을 하면서 새 가족이 한 명 더 생겼다. 한번 겪고나니 긴장도 이전보다 덜했다. 보통 외부인, 외간남자라 하면 죄다 나사 하나정도 빠진 얼간이같은 이미지가 강한데(나도 타인에게 그렇게 보이겠지), 매형들은 지금까지 우리 가족의 부족한 점을 완벽하게 메워주는 존재가 되었다. 가족들 말은 안 들어도 매형 말은 들으니까.


어릴 때 상상해본 매형의 이미지(좌)와 현재의 인식(우), 상남자와 상놈은 글자 하나 차이다.



매형 말대로 집을 (어떤 대가(대출)를 치르더라도) 구매하기로 결정, 임장을 시작했다.


사실 지금 살고 있는 집과 같은 단지에 전세를 놓고 갭투자를 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하기도 했고. 부동산 시장이 미쳐 돌아가는 시점, 그리고 불경기가 계속되는 한 서울 부동산 시장의 전망은 절대 어둡지 않았다. 그리고 현재 시점으로 나라에서 작정하고 부동산과 갭투자를 조지고 있는 상황을 보았을 때 가끔 투자를 해도 괜찮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3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는 시점, 고향에서 올라온 어머니와 같이 산다고 생각하니 입술이 바짝바짝 타는 기분이었다. 그래, 그럼 내가 나가자.


사랑이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어야 그 형태가 뚜렷하게 보이는 법이다.


전월세를 놓지 않는다는 건 오롯이 내 역량 허용범위에서 자가를 해야 한다는 뜻, 서울 중심부를 들어가기엔 자금이 달렸고 서울 밖으로 나가자니 독립 겸 투자 양쪽을 포기하긴 어려웠다. 결국 현재 살고 있는 곳보다 좀 더 외곽으로 빠지되, 서울 내에 머물자는 결정을 하게 되었다. 


현재 강서구 부동산은 '마곡동과 아이들'로 표현할 수 있겠다.


일단 과해동, 오곡동, 오쇠동, 개화동은 뺐다. 비하하자는 게 아니라 실제로 아파트가 없는 동네이기 때문에, 또한 다른 동네를 알아보기 전에 염두해둬야 할 조건이 있었다.


1. 직장과 지금보다 가까울 것, 멀더라도 10분 이상 더 차이나지 않을 것(염창, 화곡동 제외)

2. 준공연도 15년 이하일 것

3. X억 이하일 것(마곡동, 가양동, 등촌동, 내외발산동, 염창동 제외)


뭐 조건을 몇 개 더하기도 전에 3번에서 줄줄이 떨어져 나가버렸다. 결국 남은 것은 방화동, 공항동뿐이었는데 사실 공항동이라는 동네가 있는지 부동산 지도를 보기 시작하면서 알게 되었다. 방화동에 괜찮은 매물들이 있었지만 마곡동과 가까운 아파트들은 슬금슬금 방화라는 글자를 지우고 죄다 마곡으로 이름을 바꿔 칠해놓고 무섭게 가격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일제의 배급을 받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창씨를 개명하는 조상님들의 마음이 이런 것인가.


환금성을 생각하면 세대수도 많아야 하고, 주변 아파트 단지도 많아야 하며 학군도 좋아야 한다. 최종적으로 결정한 곳은 내가 설정한 조건은 모두 갖췄지만 환금성에 대비한 조건은 하나도 맞추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 감당 가능한 상황에서 입주할 수 있는 그 이유 하나로, 지금의 집으로 입주를 결정했다. 이제 나머지 자금을 융통할 시간.



6년간 모은 돈이 한방에 나가는 순간

LTV에 신용대출, 회사 대출과 모은 돈을 다 합하니 조건 3의 금액을 갖추게 되었다. 어디 이게 공짜로 들어온 돈인가. 이에 따른 원리금은 이제 고스란히 내 월급에서 빠져나가게 되는 것을. 원기옥을 끌어모으듯 대출을 땡겼으면 방화동에 있지만 '마곡'의 이름을 칠해놓은 아파트도 가능할 수 있었겠지. 하지만 미래만 바라보며 살기에는 현재의 행복이 더 중요했다. 다행히도 미친놈처럼 돈을 써재낀 건 딱 입사 첫해뿐이었고, 이듬해부터 지금까지 유태인의 영혼이 빙의한 것처럼 돈을 모아왔다.  허무한 것은 자부심을 가지고 모은 돈의 총액이 정작 집을 구매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


월급날 통장상황, 이자를 노리는 은행들의 공격이 시작됐다.


사실 대출 과정과 아파트 구매 과정 모두를 세세하게 글로 담으려고 했지만, 이미 개인적인 얘기는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한 것 같다. 똥 싸다 만 기분이 들긴 하지만 집 마련 얘기는 여기까지. 사실 30대 미혼이 내 집 마련을 했다는 건 대단한 사실은 아니다. 은행의 힘만 제대로 빌리면 어떤 형태로든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저 집안의 어른들이 조금 일찍 차례차례 떠났다는 것, 그 어른들이 평생을 알뜰하게 살아 기틀을 마련해주었다는 것, 그리고 운 좋게 장손으로 태어났다는 것, 여러 가지 조건이 운 좋게 맞아떨어져 그렇게 살 집을 운 좋게 구하게 되었다. 암울했던 10대와 불행했던 20대를 보낸 것에 대한 보상의 기분도 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집안 어른들 이상으로 경제적으로 건전하게 살아 장차 나의 가족들을 위해 또 다른 기틀을 만들어주는 것, 내가 얻은 모든 열매는 내 가족의 피와 사랑을 양분으로 삼아 거둔 것이 아닌가. 당연할 수도 있는 것을 당연하지 않게 생각하며 사는 건 그저 양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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