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돌아보니 음악 애호가였구만그래
예술은 인간이 문명을 이루기도 전부터 향유한 특권이었다. 인간은 손을 쓸 수 있게 되면서 동굴에 벽을 그리고, 음성을 자유자재로 낼 수 있게 되면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되었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예술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에 늘 포함되며 같이 성장하였다. 오죽하면 염세주의자인 쇼펜하우어조차도 고통만 가득한 인간의 삶과 역사에 희망이 되는 것이 예술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모든 예술은 각자의 고귀한 가치를 가지고 있으나 그중에서도 음악은 매우 특별하다고 말하였다. 미술, 문학 같은 예술은 쇼펜하우어가 평생동안 언급한 '의지와 현상'에의 모사를 나타낸 반면, 음악은 의지 그 자체의 원형을 보여주는 예술 형태이기 때문이다.
2021년, 30대 중후반 가을을 맞이하고 있는 지금 이 와중에 그 예술을 마음껏 영위하고 있다. 이 글은 그 수단에 대한 기록이다.
0~5세
유치원도 들어가기 전 유년기, TV를 제외하고 집에 있는 유일한 음악 소스는 골드스타라고도 불렸던 금성전자의 붐박스였다. 카세트테이프를 넣을 수 있게 만들어졌던 붐박스 하나로 음악을 들었고, 누나들이 방학 때 탐구생활을 라디오로 들으며 방학숙제를 할 수 있게 하였다.
태어난 뒤로 언제부터 음악을 들었는지는 당연히 모른다. 하지만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내가 들은 '최초'의 음악은 당시 '베비라'라는 아동복 브랜드 매장에서 나눠준 캐럴 테이프였다. 거기서 어린이들이 부른 캐럴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이 내가 기억하고 있는 생애 첫 음악이다.
정확한 가사도, 음질도, 그 당시의 나이나 계절까지, 모든 것이 기억나지 않는다. 유일하게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은 오래된 붐박스에서 흘러나왔던 남아인지 여아인지도 모를 그 음성에 대한 느낌뿐이다.
6~10세
오래된 연립주택을 떠나 아파트로 이사를 온 우리 가족, 1990년대 중산층의 상징은 단연 '전축'일 것이다. 어느 날 아버지께서 큰집에 있던 것과 비슷한 모델로 전축 세트를 거실에 설치하였다. 엄청난 크기의 전축은 어린아이의 눈으로 보기에 제법 신기한 장치로 보였겠지만 그 쓰임새를 제대로 알 리 없던 어린아이는 그저 수많은 버튼을 눌러보고 이퀄라이저를 제 멋대로 움직여보기만 할 뿐, 그 새 흥미를 잃어버렸다.
근데 아마 이것을 설치한 아버지도 모든 기기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계셨던 것 같지는 않다. 전축이 집에 있는 동안 그 음악을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LP로 음악을 듣던 그 시절, CD플레이어라는 게 나오면서 음악 감상의 간편함이 가히 혁명적으로 개선되었다. 아버지는 어떤 브랜드인지도 모르는 소형 CD플레이어를 가져와 전축 위에 올려놓았고, 클래식 모음 CD도 세트로 구비해놓으셨다. 그것을 가장 많이 이용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10살도 되지 않은 나였다. 음악 감상의 목적이라기보다는, 케이스에서 CD를 꺼내 기계에 넣으면 음악이 나온다는 거 자체가 신기해서 그랬던 거였다.
11~15세
시간이 흘러, 초등학교를 지나 중학교에 들어갔다. 당시에는 어학 목적의 카세트테이프 시장이 매우 호황이던 때였다. 영어교재를 사면 뒷부분에 카세트테이프가 포함되어있었고, '찍찍이'라고 부르던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지고 구간을 반복하며 영어공부를 하는게 유행이었다.
또한 삼성의 '마이마이'나 소니의 '워크맨'이라 불리던 소형 카세트 플레이어를 옆구리에 차고 돌아다니는 애들이 생겨나면서, 길거리 리어카에서 파는 가요 모음 테이프는 아버지가 수시로 누나들에게 사주던 선물이었다.
중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아버지는 날 전자랜드로 데려가서 카세트 플레이어 코너에서 원하는 것을 골라보라고 하였다. 기억이 매우 희미하지만 고르는데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은 또렷하다. 누나들만 있던 워크맨을 나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기대감, 그리고 오래 쓸 물건이니 제일 멋진 모델을 고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행복한 시절이었다. 군더더기없이 깔끔한 디자인이었던 이 모델은 그저 어린 중학생 마음에 큰 감동이었다. 그 후 언제 잃어버렸는지, 집에 처박혔다 버려졌는지.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애지중지 하던 워크맨도 카세트테이프 사용이 뜸해지면서 관심과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당시는 밀레니엄을 앞두던 1999년, 여러 음악 매체가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던 때였다.
16~20세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브런치에 쓰면서 정말이지 징그럽게 많이 언급한 내용이다). 이것저것 정리를 하면서 전축은 어디론가 사라졌고, 별 관심도 없던 나는 어머니에게 전축이 어디로 갔는지 묻지도 않았다. 그렇게 음악에 대해 진심이던 때도 아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에는 어머니가 사주신 휴대용 CD플레이어로 음악을 들었다. 가장 유행하던 브랜드는 파나소닉이었다. '음악사'라고 불렀던 음반가게에서는 이름도 모르는 가수들이 부른 영화 OST를 주로 팔고 있었으며, 올드팝과 영화음악을 좋아하던 나는 그런 '정통성'도 없는 음반의 주 고객이었다.
당시에는 '백폰'이라고 불렸던 헤드폰이 인기였다. 뒤통수에 뭔가를 걸고 다니는게 학생들 보기에 힙하기도 했고, 이어폰의 경우 같이 음악 듣자는 짝꿍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으니 선호하지 않았다.
2000년이 지나면서 일반 시중 PC에도 CD라이터기가 달려서 나왔다. 안그래도 복제의 천국이었던 그 시절에 날개를 달아준 꼴이다. 문구점에서 CD라벨 스티커도 팔고 있었으니 자켓만 인쇄해서 케이스에 끼우고 라벨을 CD 겉면에 붙이면 그 자리에서 해적판 CD가 완성되었다. 고3의 시절, 기숙사에서 살던 시절 깊은 밤의 유일한 위안거리는 CDP로 잠깐 듣는 음악이었다.
20~25세
수능을 보고 대학생이 되었다. 고향을 떠나 서울로 진학하며 누나들과 살게 되었다. 당시 직장생활을 하던 큰누나가 입학 선물로 MP플레이어를 사줬다. 당시 최신유행이던(이라기보다는 선택지가 없었다) 아이리버 제품이었다(2004년 당시 256mb 제품이 20만원이 넘었다! 지금 아이리버 mp3를 검색하면 나오는 16기가 제품이 5만원이 안된다)
조그셔틀이 맛이 가서 힘을 주고 그래야 작동이 잘 됐지만 MP3플레이어는 정말로 편한 물건이었다. CD를 갈아 끼울 필요도 없고 손가락 동작 몇 번이면 앨범을 골라 들어가며 노래를 바꿀 수 있었다. 당시에도 256메가는 그렇게 큰 용량을 아니었기에 MP3 파일당 3~5메가였던 음악을 30여 곡밖에 저장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저 좋은 시절이었다.
지금이야 스마트폰도 쓸 수 있는 군대라지만 당시에는 통신보안이 매우 엄격했던 시절, 전자손목시계를 제외하면 그 어떤 전자기기도 반입할 수 없었다. 자연히 사용하던 아이리버 플레이어도 놓고 입대하였다. 그렇게 신나게 인생을 낭비하고 1년 남짓이 지났을 때, 외박을 나왔다가 무려 '밤길'에서 MP3 플레이어를 줍게 되었으니..
소니도 MP3 플레이어 시장에 뛰어들면서 Walkman 브랜드를 그대로 가져왔었던 것이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이어폰까지 꽂힌 채로 버려진 것을 길거리에서 주운 것이다. 주위를 둘러봐도 원 주인을 찾을 힌트가 전혀 없던 상황이었기에(없길 바랬던 거지만) PC방으로 가서 소리바다였는지 프루나였는지 뭔가를 켜서 음악을 받았다. 플래시메모리 형태라 연결케이블같은건 필요도 없었다.
그렇게 부대로 가지고 들어간 소니 워크맨 MP3 플레이어, 전역할 때까지 길었던 군 시절의 밤을 즐겁게 보냈다. 충전이야 당직일 때 하면 됐다. 중간에 한 번 부사관에게 걸린 것 같긴 한데 전역 때까지 가지고 있었던 것 보면 뺏기지는 않았나 보다. 기억이 희미하다.
26~30세
군대를 다녀오니 작은누나가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 후반, 역시 당시 센세이션이었던 아이팟 나노 4세대를 선물받았다. 3학년이었다. 인생 쉽게 산다.
앨범자켓을 보며 조그센서를 휙휙 돌리며 음악을 고를 수 있었다. 인간의 삶은 점점 간편해졌다. 턴테이블에 lp와 바늘을 올리던 시절에서 CD를 갈아 끼우는 시절로, 그리고 음악을 손가락 하나로 몇십 개의 앨범을 휘저으며 들을 수 있는 시절이 된 것이다.
문제는 없다시피 한 스태미너의 조루 배터리, 그리고 거지같은 아이튠즈 동기화 시스템이었다. 듣고싶은 노래의 추가나 듣기싫은 노래의 삭제는 꿈도 못 꿀일, 그대로 연결해서 PC에 있는 전체 음악의 동기화를 기다려야 했던 때였다. 당시에도 애플빠 친구들은 있었기에 불평만 했다하면 돌아오는 것은 "익숙해지면 그것만큼 편한 게 없어"라는 쉴드질 뿐이었다.
그래도 멋지잖아, 애플은 감성이지 라는 마음으로 쓰던 아이팟 나노는 예비군 훈련을 다녀온 후 세탁한 군복과 함께 수명이 다해버렸다. 정말이지 군대는 빼앗을망정 뭔가를 주지않는 곳이 맞는 것 같다. 다행히도 당시 스마트폰을 구입한 작은누나가 필요없어진 아이팟 터치를 주면서 음악생활은 끊기지 않게 되었다. 휴대폰과 터치를 둘 다 들고다녔던 너드 얼리어답터 시절.
31~35세
부모님을 축내고, 누나들도 축내며 대학원까지 졸업한 막내아들이 드디어 직장에 들어가 돈을 벌기 시작했다. 그리고 전축을 샀던 그 당시 아버지의 경제력을 갖추게 되며 나 또한 아버지같은 취향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도 당시는 오디오가 필요없었다. 스마트폰이 생기면서 부피만 차지하고 필요없어진 아이팟 터치는 팔아버리고 아이팟의 손맛을 잊지 못해 나노를 다시 구매하였다.
2015년 당시는 MP3 플레이어 자체가 이미 사장사업으로 떨어지던 그 시절, 사람들은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스트리밍으로 듣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의 나는 직접 가지고 있는 음원을 듣는 것을 더 선호하였기에, 끝까지 구식 방법을 고집하였다(지금도 그렇다). 음악 취향이 클래식, 재즈, 올드팝 위주이기에 최신음악이 나오는 스트리밍이 그다지 필요없었기 때문이다. 무제한이 아니니 데이터 나가는 것도 싫었고.
그러나 나노 7세대는 사용 2년차가 되기도 전에 또다시 세탁기에서 최후를 맞이하였다(이런 병신!). 주머니에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 가벼움이 원망스럽다.
직장생활이라는 건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학교처럼 공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연속적인 노동의 시간이다. 자차로 출퇴근하는 나에게 휴대용 음악 플레이어는 이제 필요없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자연스럽게 퇴근 후 안락한 시간을 보낼 방법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렇다, 이렇게 아버지가 하던 그 취미생활을 영위하게 된 것이다.
2010년에서 20년대로 넘어가던 시점, 현대사회에는 음악을 들을 때 전축처럼 요란한 방법이 필요없다. 음악을 들을 소스와 그것을 재생할 스피커만 있으면 됐다. 당시에는 사장돼버린 MP3시장을 탈피한 새로운 시장인 고음질 음악 플레이어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중고를 구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블루투스 스피커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자리도 많이 차지하지 않고 무엇보다 밤에 누워서 은은하게 나오는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점이 좋았다. 하지만 앉으면 눕고싶은게 인간의 본성, 매번 음악을 고를 필요없이 전원만 켜면 음악을 즐기고 싶어졌다.
절대 남자의 삶에서 들어가서는 안 되는 길, 오디오에의 길이 시작됐다.
3테라바이트 NAS를 설치한 후, 가지고 있는 음원을 모두 욱여넣었다. 몇천개나 되는 곡을 집어넣었는데도 1테라 넘기기가 힘들다. 오디오에 대한 별다른 지식도 없는 상황이다보니 무리할 필요가 없었다. 올인원 패키지로 지른다. 직장생활 3년차, 무서울 게 없는 시절이다.
전원만 켜면 전에 틀었던 음악 리스트대로 음악이 나온다. 서버 안에 몇백개의 앨범, 몇천개의 곡이 들어있다. 클래식, 재즈, 팝, 컨트리, 락 모든 장르의 음악을 돌아가면서 재생하는데 몇 초의 시간밖에 소모되지 않는다. 인간의 삶은 더욱 편리해졌다.
36세~ 그리고 현재
내가 최초로 기억하는 아버지의 나이보다 더 먹었다. 당시의 아버지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아직 가족은 없지만). 잘 집이 있고 돌아다닐 차가 있다. 바야흐로 무르익는 30대 중후반이다.
어느덧 음악의 공간감이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앰프의 출력도 못마땅하다. 몇 년안에 결혼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 소비할 수 있는 시간은 지금뿐이다!
이렇게 오디오 세트를 갖추고 30대 후반의 가을을 맞이하였다. 막귀조차도 깨달을 수 있는 음질의 개선이다. 고음과 저음을 구별하며 음악을 더욱 깊게 감상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가청주파수는 점점 떨어져간다. 어떤 대상을 깊이 알 수록, 그 대상은 나를 점점 놓는 기분이다.
이 정도로 삶과 음악의 흔적을 돌아보니 나는 음악 애호가인 것을 모르고 살아온 음악 애호가였다. 낡은 골드스타 붐박스에서 영국제 하이파이 오디오까지, 방법이야 변했지만 기기가 아닌 음악 자체를 좋아하는 기본자세는 잊지 않고있다.
음악뿐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그것을 즐기는 방법도 삶을 돌아보다 보면 체계적으로 변화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질적인 것(예를 들면 점점 커지는 집과 차), 그런 것을 벗어나 정신적으로 삶을 즐기는 수단도 세련되게 발전하는 게 삶의 재미인 것 같다. 점점 방대해지는 것도 재미지만 점점 단순화되는 것도 삶의 큰 재미일 것이다.
적어도 지금, 음악의 측면에서는 더 나아가고 싶지 않다. 그러기엔 경제적으로 가성비가 심하게 떨어지는 취미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저 등짝을 때릴 와이프가 없는 지금, 언제 처분할지 모르는 이 남자의 로망을 즐기는데 열중해야겠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