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아는 눈을 떴다. 밖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습기 찬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잠결에 축축한 흙과 풀 내음이 느껴졌다. 마치 여름을 알리는 전령인 양, 바람은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서울의 거리를 휘지르고 다닌 끝에 방안에 도착해 그녀의 심장을 뛰게 했다. 방 안에 모기가 날아다니는 것 같았고, 괜히 다리가 가려워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그리고는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여름….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카메라 렌즈에 튄 물방울, 얼음 통에 담긴 화이트 와인. 매미 울음소리는 그녀를 무인도의 해변, 경험해본 적 없는 노스탤지어로 데려가 혼을 쏙 빼놓았다. 이즈음 그녀는 난간에 몸을 굽히고 아래를 내려다보는 상상을 했다. 그 속에서 그녀는 꽃과 햇살에 누그러진 사람들의 기대와 꿈 한가운데서 다음 계절이 당도하는 것을 지켜보곤 했다.
그녀는 연희동의 한 빌라에 살았다. 그녀의 방은 외딴 섬에 있는 별장 같았다. 옅은 녹색 벽지에 모네의 그림이 걸려있었고, 책이 반쯤 꽂혀있는 책장과 호두나무 테이블, 붙박이 옷장, 그리고 누워있는 침대가 전부였다. 그녀는 인테리어엔 관심이 없었다. 잠을 자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쓸 수만 있으면 충분했다. 테이블 위에는 늘 잡지 한 권이 펼쳐져 있었다. 유일하게 구독하고 있는 잡지였다. 그녀는 그 책으로만 세상으로부터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이번 호는 음악과 저항에 대한 것이었는데, 음악에 대해서라면 제법 단호한 취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튀니지 래퍼의 삶의 애환이나 드뷔시에 대해 읽으며 지루해하던 참이었다. 그녀는 이 동네가 마음에 들었다. 한적함을 찾는 무리들 때문에 이따금 소란스러워지기는 해도 말이다. 이웃 사람들은 아침 일찍 출근하는 것 외에 조깅을 하거나 개를 산책시키려고 나왔다. 그들 중 몇몇은 서로 얼굴을 알았고 길을 걷다 마주치면 친절하게 안부를 물었다. 욕심이라곤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한 뼘짜리 가게를 열었다. 꽃집 여자는 문앞에서 스프레이를 뿌려 향기를 퍼트렸다. 주택가인 것 같은 골목길에는 보물 같은 위스키 바나 카페가 새로 열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지트를 들키지 않으려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평화롭고 부질없었다. 일하는 법은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잠을 자고 책을 읽는 숙명 속에서 살았고 신탁에 따라 무위를 섬겼다. 그녀는 아침에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눈을 뜨곤 했다. 그러면 간단하게 식사를 하거나 아니면 공복으로 동네를 한 바퀴 산책했다. 지나가는 길에 단골 카페에 들러 커피를 마시고, 바람이 잘 드는 적당한 곳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낮이 되면 집으로 돌아와 잠을 잤다. 잠에서 깨면 책을 읽거나 영화를 봤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 그녀는 삶을 허비하는 이 극적인 방식이 마음에 들었고, 매일 자신을 바람 속으로 조금씩 흘려보냈다. 디지털의 획기적인 발전이 그런 삶을 뒷받침했다. 또 하나는 우연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우연을 사랑했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가능성의 실현이 아니라 삶이라는 거대한 연극의 복선이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가장 열정적일 때는 정교한 우연의 장치들이 만들어낸(혹은 만들어냈다고 믿는) 순간뿐이었다. 주영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흥미를 느끼기는 했지만, 그와 마주칠 때마다 유리잔을 떨어트리는 멍청이들이 없었다면 먼저 말을 걸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옆으로 돌아누워서 베개에 뺨을 부볐다. 언제부터 잠이 든 지 알 수 없었지만(새벽 늦게 들어온 것은 확실했다) 잠은 온데간데없이 달아났고 상쾌한 기분이었다. 손가락으로 이불을 꼭 붙든 채 방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바닥에 벗어 던진 옷들이 눈에 들어왔다. 현관문부터 침대 앞까지 어제 입었던 옷들이 점점이 떨어져 있었다. 불현듯 어제 일이 떠올랐다. 그, 남자의 이름은 주영이었다.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야기하던 그의 모습이 불안해 보였고, 그를 위로해 주고 싶었다. 밤늦게 홍제천을 다다랐을 때 그녀는 이미 지나치게 취해 있었다. ‘신경 쓰지 마요. 그러지 마세요.’ 그녀는 말했다. 그다음부턴 기억이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무사히 집에 돌아왔다. 그는 집에 잘 들어갔을까? 무슨 일은 없었는지 신경 쓰였지만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몸이 달았다. 이불을 치우고 일어났다. 사랑은 사람을 주체적이고 적극적으로 만든다. 그녀는 널부러진 옷들을 집어들다가 안에 있던 책을 발견했다. 낯익은 제목, 그가 빌려줬던 책이었다.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뒤 책을 신발장 위에 가져다 놓았다. 무작정 카페에서 기다리다 마주치는 것 말고는 돌려줄 만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현관문을 열자 축축한 공기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어째서인지 집 앞 골목에는 아무도 없었다. 월요일 아침인데도, 마치 세상이 잠시 멈춘 것처럼.
그 뒤로 며칠 동안, 그녀는 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기다려 보았지만 한 번도 주영을 마주치지 못했다. 테이블에 올려놓은 그의 책을 우두커니 쳐다보고서, 이전에 그가 공모전에 관련된 이야기를 했던 것을 떠올렸다. ‘이제 집에서 글을 쓰기로 했는지도 몰라‘ 그녀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그가 무슨 글을 쓰는지 물어본 적이 없었다. 다음에 다시 만날 수 있다면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은 비가 올 것처럼 흐렸고, 옅은 안개가 껴있었다. 그녀는 집으로 가는 길을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서서히 생각 속으로 빠져들었다. 벤치에서 그의 가슴에 기댄 순간이 선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욕망하기보다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것에 익숙했고, 기다리기보다 포기하는 것에 더 적합한 인간이었다. 그녀는 가늘게 눈을 뜨고, 이제껏 점 같았던 시간이 촘촘히 모여 어딘가로 도달하려는 것을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