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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nokno Oct 26. 2024

7

 대개 사람들은 전 애인들의 단점을 전화번호부처럼 정리해 놓은 뒤 새로운 이성을 만날 때마다 (단점이 적혀 있는)페이지를 들추면서 혹시 중복된 번호가 있는지 찾다가, 겹치는 것이 하나라도 있으면 황급히 뒷걸음질치곤 한다. 마치 아무도 쓰지 않은 골드 번호가 존재할 거라고 기대하면서 어느 통신사에도 가입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윤아도 그런 면에서는 마찬가지였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대기업에 들어가고 싶어하는 다른 청년들처럼 정력적으로 살았고 그러면서 크고 작은 연애도 제법 해보았으므로 남자들에 대한 주관이 있었다. 주영을 처음 보았을 때 잘 생겼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좋아하는 타입은 아니었다. 각진 얼굴에 언뜻 화가 났거나 피곤한 것처럼 보이는 무뚝뚝한 표정이 말을 걸기 꺼려져서였다. 게다가 윤아가 겪었던 그런 외관의 사람들은 얼굴에 드러난 그대로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툭하면 짜증을 냈고, 자기 감정을 챙기는 데 급급했다. 하지만 우연히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아마 처음으로 말을 건 날이었을 것이다), 애수에 찬 눈동자와, 위에 드리운 아카시아 꽃 같은 눈썹을 보고 말을 걸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던 것이다. 그는 마치 세상의 모든 근심과 슬픔을 품에 가득 안은 채 시시포스처럼 오르막을 오르는 것 같았고, 아주 짧은 행복을 맛본 뒤에 다시 그것들과 다시 그것들과 한몸이 되어 굴러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또 그는 글을 썼다. 이제 서울에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십 몇 년 사이에 글은 다시 진보적인 위치를 되찾았다.


 이튿날 퇴근하자마자 주영은 윤아의 번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뭐 하고 있어요?’ 그녀가 떠나기 직전에 받아두었던 번호였다. 주영이 입을 떼는 순간 그녀의 눈에 일순 망설임이 스치는 듯 했지만, 나리는 비가 도와주었다. 잠시 후에 답장이 왔다. ‘산책하고 있어요’ 그들은 한 시간 뒤에 카페에서 만났다. 약속한 것처럼 구석 자리에 마주앉아, 각자 노트북과 책을 올려놓고서 한참 동안 마주보았다.

주영이 말했다.

“이 자리에서는 카페 내부가 한눈에 보이거든요. 광각 렌즈처럼요. 카운터에서 직원이 주문을 받고 커피는 내리는 모습도 볼 수 있고, 사람들이 문을 열고 들어올 때도 제각각 달라요. 누구는 다른 사람과 웃으면서 들어오고, 피곤한 눈으로 커피 생각에 가득차서 오는 사람도 있고요. 그것들을 하나하나 관찰하는 재미가 있죠.”

윤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저랑은 정반대인데요. 여기 앉으면 턴테이블과 스피커만 보여요. 구석까지는 빛이 안 들어와서 어둑어둑하고, 다른 사람들도 더욱이 안 보이고요. 전 누가 눈앞에서 부산스럽게 왔다갔다하면 집중이 안 되거든요. 그러고 보면, 카페는 원래 다른 사람들과 대화하고 쉬라고 만든 공간인데 뭔가에 집중하려고 온다는 게 웃기지 않아요? 하지만 이곳은 예외에요. 뭔가에 빠져들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놓았잖아요.”

그녀는 주영이 쓰는 글도 궁금해했다. 그들이 앉은 자리의 테이블은 넓었지만 플라스틱 칸막이가 서로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결국 고심 끝에 윤아가 일어나 그의 자리 옆에 함께 앉았다. 그녀에게서 새벽 공기와 풀잎 냄새가 났고, 조명에 비춘 옆얼굴이 도드라져 보였다. 그는 속으로 긴장과 절망감에 한숨을 쉬었다.

윤아가 ‘오’ 하고 작은 탄성 소리를 냈다.

“정말 한눈에 다 보이네요? 관객석에서 연극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그 표현 좋은데요.”

 그녀가 스크롤을 내리며 글을 보는 동안 주영은 그 모습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정면에서 보았을 때 생각보다 더 얇고 긴 코, 집중하면 으레 앙다무는 입술, 한 뼘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데도 주위에 보이지 않는 유리 장벽이 있는 것처럼 그는 조금도 손을 댈 수 없었다. 전날 윤아가 먼저 떠나고 나서, 그는 남은 하루를 잠시 나눴던 대화와 숙취로 보냈다.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으면 아까 있었던 일들이 조금 열화된 영상처럼 흘러갔다. 하지만 그가 입을 떼었을 때 맞은편에서 대답하는 사람은 윤아가 아닌 윤정이었다. 실제와 달리 윤정은 쿡쿡거리고 웃음을 흘리지 않았고, 재미있다는 듯이 재잘거리지도 않았다. 윤정은 책은 커녕 영화도 보지 않는 사람이었다. 글이라곤 회사에서 의례적으로 쓰는 회의록 말고는 없었다. 그럼에도 그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들은 어느 시구보다도 뇌리에 깊이 새겨졌다. 주영은 침착하게 유튜브 영상을 틀었다. 그가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을 때 쓰는 방법이었다. 유튜브 영상들은 뇌를 마비시키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제거했다. 그는 잠에 들 때까지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세 페이지까지 내려갔을 때 윤아가 허탈해하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남자가 제정신이 아닌데요. 미친 사람이잖아요.”

그녀는 마치 자신이 글 속의 여주인공이 된 것처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인에게 집착하는 것도 모자라서 의심으로 죽이려고 하네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죠? 여자는 왜 이런 남자하고 결혼을 하게 된 거에요?”

주영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그녀가 보기에는 조금 전과 달리 엄청나게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이유가 남편의 엄청나게 잘생긴 외모라면 이해하겠어요?”

“설마, 농담으로 하는 말이죠? 그래도 내면이 병들었다는 걸 결혼 전에 몰랐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물론 그뿐만은 아니었어요. 여자는 남자의 침착함과 듬직함도 좋아했고요. 그건 결혼하고 나서도 변하지 않았어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표현된 거죠… 어쨌든 제 생각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에요. 글이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요. 저는 이다음에 벌어질 일들이 궁금했어요. 사랑이라는 감정이 작동하는 방식을요. 이런 상황에서조차 사랑이란 감정은 둘 사이에서 버젓이 남을까, 아니면 모습을 감추고 다른 것으로 변모할까.”

글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자 잠깐 그는 자기연민에 빠진 왜소한 직장인에서 날카로운 예술가가 되었고, 윤아는 그 확신에 찬 태도가 놀라우면서도 마음에 들었다. 그는 아마도 자신도 모르는 어떤 지점을 향해 끊임없이 닿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는 없는 방향성이었다.

그녀가 물었다.

“결말은 정해졌나요? 자세하게는 말고요. 해피 엔딩인지 아닌지 궁금해서요.”

주영이 설명했다.

“행복하지 않을 거라는 건 분명해요. 저 사람들은 처음부터 만나면 안 됐거든요. 물론 남자가 구제불능인 탓이지만요…. 이미 사랑한 이상 떨어지든 억지로 붙어 있든 불행하겠죠. 그리고 더욱 불행한 건, 골이 깊어지고 나서도 그들은 열정으로 가득 찼던 때를 떠올리며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남아 있다고, 서로 조금이라도 이해해 보려고 발버둥칠 거란 거에요.”

윤아는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괜히 읽은 것 같아요. 머리만 복잡해지고. 사랑은 원래 그런 걸까요? 그 순간이 언제 찾아올지도 모르는데도 우린 사랑을 해야 할까요, 왜…?”

중얼거리는 말이 마치 나비의 날갯짓처럼 여운을 흘리다 사라졌다. 그제야 스피커의 노랫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전성기가 한참 지난 남자 그룹의 노래였다. 맞은편에 앉아 침착한 표정으로 책을 읽고 있는 여자가 테이블 밑으로 박자를 타고 다리를 건들거리는 게 보였다. 주영은 자신들도 마찬가지로 수면 아래서 버둥거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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