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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메르 Lemaire

권태로운 패션 생활에 새로운 관점을 준 브랜드

by knokno

야만적인 사람은 옷으로 덮고, 부자와 멍청한 사람은 치장하고, 우아한 사람은 입는다는 말이 있다. 사람을 만났을 때 입고 있는 옷과 옷을 대하는 태도로 어떤 사람인지 언뜻 파악할 수 있다는 뜻이다. 누구나 내면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겉모습 또한 은연중에 내면에서 흘러나와 형성되는 것 아니던가? 바꿔 말하면 이 세상에서 우리는 어떤 옷을 고르고,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약점을 숨길 수도 있고 보여주고자 하는 것을 드러낼 수도 있다.

나는 이 점을 매우 늦게 깨달은 편이다. 옷과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억은 중학교 때, 학교가 끝나면 집과 PC방 사이에서 고민하는 나와 달리 동대문이나 홍대로 향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몇 년이 지나 대학교를 다닐 때도 비슷했다. 티셔츠나 신발을 그때그때 예뻐 보이는 것을 사서 걸치고 다녔다. 조금 늦게 들어간 군대를 전역한 뒤에서야 처음으로 옷을 어떻게 입으면 좋을지, 이것과 저것을 같이 입으면 어떤 느낌을 낼 수 있을지에 대한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여러 브랜드와 스타일을 거치며 지금에 이르렀다. 오늘은 가장 최근에 많은 영감을 준 브랜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lemaire-paris-new-store-05-b85604e4-a9c1-472d-bd34-0fac63a50fb7.jpg 파리 마레지구에 위치한 르메르 매장


르메르는 1992년에 설립되었고 창립자인 크리스토프 르메르와 디자이너 파트너인 사라-린-트란이 이끄는 파리 패션 브랜드다. 그들은 각각 남성복과 여성복을 작업하며 그 과정에서 서로의 가치관과 의견을 공유해 조화로운 하나의 컬렉션을 만든다. 2020년 즈음, 온라인 편집샵을 둘러보다가 발견한 것이 르메르와의 첫 만남이었다. 하지만 나는 화려하고 톡톡 튀는 의류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스쳐 지나가듯 이전 페이지 목록으로 사라졌다.

다시 마주친 것은 2024년 말이었다. 웨스턴 스타일과 락시크가 섞인, 남성미를 과시하는 옷을 주로 입었던 때였다. 라이더 재킷이나 스웨이드 재킷에 리바이스 진, 가죽 부츠는 거칠고 단단했고, 피부와 딱 붙어서 팔이나 다리를 구부릴 때마다 뽀드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때의 나는 시크하고 날카로워 보이고 싶었고 남들이 다가가기 어려운 분위기를 가지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동시에 상당한 피로감도 느끼고 있었다. 생각한 모습대로 보여야 한다는 강박과 하루 종일 거칠고 좁은 옷을 입으면서 받는 스트레스, 집으로 돌아왔을 때 밀려드는 피로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컨디션이 안 좋으면 옷을 입기가 꺼려졌고, 심한 날에는 현관에서 신발을 신다가도 내팽개치기도 했다. 그리고 옷 소비 자체에도 무력감을 느끼고 있었다. 택배가 도착했다는 문자 메시지가 더 이상 기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회사 점심시간에 매거진 B의 유튜브 채널을 듣고 있던 때였다. 매거진 B에서는 종종 패션 브랜드를 심도 있게 다루기 때문에 이전부터 나는 라디오를 듣듯이 자주 틀곤 했다. 영상이 끝나자 알고리즘에 의해 우연히 르메르에 대한 브랜드 인터뷰 영상이 이어졌고, 묘한 피아노의 선율을 따라 나도 모르게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1. lemaire.jpg 크리스토프와 사라 린


저는 옷을 친구를 사귀는 것처럼 생각하는 걸 좋아합니다. 당신도 분명 옷장이나 클로젯에 정말 사랑하는 몇 벌의 옷이 있을 거예요. 진정한 우아함, 스타일이 무엇인지 아는 건 결국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가 제안하려는 옷은 아주 본질적이고, 시대를 초월하며, 물론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극도로 뛰어난 퀄리티를 지닌 그런 조각들이에요. 이런 옷들이야말로 시간이 지나도 변치 않는 워드로브를 만들어줄 수 있죠.


나는 업무 시간에도 몰래 블루투스 이어폰을 꽂고 그들의 인터뷰를 들었고, 퇴근하고 와서는 매거진 B를 비롯해 르메르를 다룬 여러 잡지와 기사를 찾아 읽었다. 크리스토프 르메르와 사라-린-트란이 르메르를 통해 가장 전하고 싶은 말은 ‘사람이 옷보다 먼저 보이길 원한다’는 것이다. 맨 처음에 말했던 옷으로 덮거나 치장하는 것이 아니라 입는다는 말과 비슷한 맥락이다. 르메르의 옷은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착용자의 움직임을 보장하고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도록 돕는 동시에 돋보이게도 해준다. 자연과 가까운 뉴트럴한 색감은 착용자의 인상을 존중하고, 그가 움직이는 방식에서 드러나는 실루엣을 강조한다. 가브리엘 코코 샤넬의 말처럼 진정한 우아함은 자유롭고 편안한 움직임에서 비롯된다.

정보를 찾아보면서 옷을 대하는 자세에 대해 여러 가지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의복에 대해서 놓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무한에 가까운 풍족함이 도리어 결핍과 권태라는 결과로 이어진 것은 어째서인지. 결국 철학이 빈곤했던 것이다.

옷은 생존을 위한 도구로 출발했지만 현대에 들어와서는 기능보다는 사회적 맥락과 맞물려 그 자체로 감각할 수 있는 요소에 대한 비중이 더 커졌다. 예컨대 촉각이나 시각적 뉘앙스다. 그러나 감각적인 면만을 좇다 보면 점점 더 화려해지고 과도한 장식적 요소가 들어가는 등 자극적인 방식을 추구하게 된다. 매몰된 흐름 속에서 감각은 쉽게 피로해질 수밖에 없고, 이전보다 더 자극적인 방향을 찾지 못하면 금세 지루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 악순환의 끝은 파멸적이거나 허무함만이 남아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그들의 말속에 있다. 옷을 친구처럼 생각하는 것. 친구를 아무나 사귀지 않듯, 옷도 마찬가지다. 나와 잘 맞고 오랫동안 함께할 수 있는 옷은 전 세계 매장에 얼마 되지 않으며, 우리의 옷장에는 더더욱 적게 걸려 있다. 또한 친구는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기도 하다. 우리가 그 옷을 자주 입고 애정을 가지고 관리할 때 사람들은 우리에 대해 새로운 사실을 알아차릴 것이다.



3. lemaire.jpg 르메르 한남 플래그십 스토어



주말이 되자마자 한남동에 있는 플래그십 매장을 찾아갔다. 르메르는 한남동에서도 꼼데가르송부터 시작되는 메인 거리가 아니라 외곽의 주택가 사이에 위치해 있다. 명패가 걸린 대문 사이로 보이는 매장은 내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옷에 대한 인식을 깨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다. 현재는 정복을 제외하고는 크기의 표준에 가까워진 ‘와이드’라는 개념은 다수의 일반 브랜드와 방향은 비슷할지언정 표현하는 방식은 천차만별이었다. 1층의 남성복 라인을 둘러보며 품이 큰 셔츠와 바지가 그토록 우아하면서도 세련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나는 옷장에 걸린 옷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원단을 만져 보고 거울 앞에 서서 대보았다.

하지만 평범한 직장인이 덥석 사기에는 너무 비싼 가격이었고, 대신 집으로 가는 길에 중고 거래 앱과 편집샵 앱을 뒤지기 시작했다. 매장에 갔을 때 가장 마음에 들었던 다크 에스프레소 색 셔츠와 트위스티드 벨티드 팬츠를 찾아다녔다. 이내 여기서 하나, 저기서 하나씩 산 옷들이 조각이 모이듯 옷장에 쌓이기 시작했다. 택배로 받으면 혹시 오는 중에 문제가 생길까 봐 직접 판매자가 있는 곳까지 찾아갔다. 셔츠를 받아서 햇빛 아래 펼쳐보았을 때의 순간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드라이 실크 소재는 부드러우면서도 짜임새가 견고하다는 것을 곧바로 느꼈고, 입고 나서 거울을 보았을 때 주름지는 방식이 정말 매력적이었다. 특히 셔츠는 가운데 달린 단추를 일자로 끼워 단정하게 입을 수도 있고, 옆구리에 달린 단추를 활용하면 조금 더 드레시하게 표현할 수도 있었다. 처음 한 벌이 완성되었을 때는 어찌나 마음에 들었는지 주말 내내 그 한 벌만 입고 다닐 정도였다.

그 뒤로 몇 달이 지난 지금, 옷장 앞켠에는 셔츠와 바지 셋업이 두 벌, 그리고 최근 우연히 편집샵에서 건진 재킷이 걸려 있다. 나는 이제 약속이 있으면 장소가 어디든 항상 르메르를 입고 나간다. 두 벌밖에 되지 않아 같은 것을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입을 때도 있지만 오히려 든든하고 자신감이 생긴다. 절친한 친구의 힘찬 응원을 들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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