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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soo Jung Nov 27. 2020

마음에 드는 것 하나 없는 더니든이 마음에 들었던 이유

뉴질랜드 더니든

이곳에서 지낸 지도 벌써 10개월하고 26일째다. 어제 아침에는 심지어 카페로 향하던 중에 이곳에 처음 왔었던 시기에 그 향을 느꼈다. 같은 시즌이 돌아오고 있다. 일전에 날씨 앱을 확인했을 땐 분명 20도였는데, 오늘 새벽, 요가를 하며 BGM 겸 켜놓았던 아침 뉴스에서 전하길 오늘 최고기온은 7도란다. 이곳 날씨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참 예측할 수 없다. 창을 통해 보이는 건너편 집 오래된 나뭇가지들이 고무줄로 동여매고 싶어질 정도로 정신 사납게 휘날린다. 저런 식이라면 빌딩 숲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바람 뺨칠 정도로 추우므로 패딩을 집었지만, 어차피 카페까지의 거리는 5분, 실내에만 있을 거기에 다시 내려놓는다. 한겨울 실외에서라면 참 고마운 존재지만 실내에서는 여간 귀찮은 존재가 아니다. 잘 접는다고 접어도 멋대로 부풀어 올라 미끄러져 바닥에 드러눕는 패딩보다는 잘 접어 등받이에 걸어두면 잘 각 잡혀있는 코트나 재킷이 마음에 든다. 오늘은 내 삶에 귀찮은 것들을 최소화하고 싶다. 그렇기에 학교 로고가 박힌 후디에 약간 도톰한 회색 카디건을 걸쳐 입고 현관 옆에 걸어둔 열쇠를 챙겨 집을 나선다. 일전에 열쇠를 집에 두고 나가 보안업체를 불러 문을 딴 적이 있는데 그 경험이 매우 무의미하고 귀찮았기 때문에 집을 나서기 전 열쇠를 챙겼나 두세 번 확인 하는 것은 이젠 웬만하면 빼먹지 않는 일이 되었다. 이제 곧 한국으로 돌아가면 열쇠를 챙겨 다닐 일도 없으리라.


학기는 다 끝이 났다. 이제 남은 것은 성적을 기다리며 이후의 것을 준비하는 것. 전공을 범죄심리에서 철학으로 바꾼 후 알게 된 건데 나는 이것을 본격적으로 공부하기 전에도 즐겨왔다. 그냥 그게 철학이라는 것을 몰랐을 뿐이다. 나의 기억이 시작된 순간부터 나는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걸 좋아해왔다. 세상적 기준에서의 중요한 것들, 내 개인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 그리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흥미롭고 자극적으로 느껴지는 것에 대한 생각이 흐를 때면 그 생각을 붙잡고 살펴보고 잘라보고 다져보고 조각조각 분해하여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즐거워했다. 나는 그렇게 가만히 앉아서 고찰하는 것이 무엇보다 흥미로웠고 자극적이었으며 결론에 닿았을 때면 희열을 느꼈다.


생각을 잡을 여유가 없을 때 난 인생의 낙이 없어진다. 이것저것 경험하고 사람들을 만나면서도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았던 이유는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런 사람이다. 외부에 의해 생겨나 자연스레 흐르는 감정과 기분은 나를 자극하지 못한다. 그것이 생각의 주제가 된 이후에나 내 삶의 일부분이 된다. 더니든에서 나의 취향에 맞는 것을 꼽자면 열 손가락, 아니 그냥 한 손만 가지고도 할 수 있을 정도지만, 그런데도 이 환경에 만족했던 이유는 더욱더 많은 것들을 사유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줬기 때문에 분명하다.


동네에 하나뿐인 스타벅스에 갈까 코코 라운지를 갈까 하다가 진한 초록색 로고가 그려진 유리창 앞에 멈추어 선다. 들어선 후 아침에 네스프레소로 에스프레소를 한잔 마셨지만, 아직 정신이 몽롱한 것 같아 콜드브루를 주문하기로 한다. 곧 떠날 것이 분명하고 그렇기에 이 스타벅스에 오는 것도 몇 번 남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아닐 수도 있다. 나의 기분은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가장 예측 불가능한 것이 있다면 나의 기분이다. 내가 사이코패스이고, 기분이 제멋대로 뛰쳐나가지 않음에 감사하다. 만약 내가 사이코패스가 아니었다면 기분에 휩쓸려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을 괴롭게 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기분과 감정이 생겨나더라도 원하는 만큼만 머금을 수 있는 것, 그것은 어찌 보면 나에겐 꼭 필요한 것이었음에 내가 사이코패스로 태어난 것이 아닐까.


기분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면 오늘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 괜시리 텀블러 진열장을 들여다 보았고, 뉴질랜드 스타벅스에서만 살 수 있을 법한 것들이 있었지만, 마음에 드는 것은 없다. 이런건 한국이 참 깔끔하게 잘 만들더라. 짐가방도 무거운데 차라리 잘 됐다 생각하고 자리로 돌아간다. 테이블 위에 아이패드와 일기장을 올려놓으니 내 이름을 부른다. 고맙다고 말하고 잔을 건네받으니 본인도 고맙다고 말한다. 뭐가 고마워서 고맙다고 말하는지 궁금하다. 보편적으로,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사람들이 표현하는 것과 그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 때로 그 표현들은 비어있다. 비어있음에도 유의미하다. 생각보다 많은 경우에 표현과 생각이 서로 반대되는 때도 있다. 사람들의 표현과 그들의 실제 마음 사이의 모순이 생길 때 그 이유를 생각해보는 것은 모순을 보는 것으로 인해 생겨나는 스트레스를 온전히 사라지게 만든다. 나는 철학이 정말 좋다.


자리에 앉아 일기장을 펼친다. 일전에 적어놓은 것들을 대충 살펴본다. 이곳에서는 특이한 일도 많았고 그에 따른 생각도 많이 했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도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나쁜 편이기에 기회다 될때마다 그런 것들을 적어 놓는데, 많이도 적어놨음을 새삼 깨닫는다. 나는 곧 이 도시를 떠난다. 신경 쓸 것이 많다. 핸드폰, 은행, 집, 학교 등 당연히 정리해야할 것들 뿐만아니라, 코로나 때문에 국경을 닫은 뉴질랜드이기에 이곳에서 만난 이들은 시간이 좀 흐른 후에나 다시 만날 수 있을 것이기에 만남에 조금 더 마음을 쓰고 싶다. 그러니까 하나 쯤은 더 추가되어도 상관없다. 이곳에서의 것들이 훗날에도 흐려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모든 기록들을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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