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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eesoo Jung Jan 25. 2021

뉴질랜드 더니든으로

'막상 공항에 도착하고 나니 자고 싶은 마음 뿐이다.'

사람이 꽤 많다. 수 분 전 느껴진 감정을 잠시 넣어두고 생각도 마음도 텅 빈 채로 슬금슬금 앞 사람을 따라가는데 보안 검색대 담당자가 나에게 세 번째 라인으로 가서 서라고 손짓한다.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중 두 번째 라인에 배정받아 서 있던 분홍색 캐리어를 든 남자와 그 가족들이 내 앞으로 재빠르게 끼어든다. 빨리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거나 그래야 하는 이유가 있는 듯하다. 그런데 짧아 보이는 줄에 합류한다고 해서 꼭 빨리 들어갈 수 있을까? 긴 줄의 사람이 넓은 간격으로 서 있을 수도 있으며 신체적으로 차지하는 면적이 큰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짧아 보이는 줄로 옮기는 것은 빨리 들어가는 것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리고 짧아 보이는 줄에 사람이 적을지라도 어떤 사람이 가방을 더 많이 가졌거나, 의심스러운 물건을 가졌다면 줄을 옮기는 것은 빨리 들어가는 것에 도움을 주지 못한다. 시간과 에너지를 좀 더 투자한다면 현재의 것들인 실질적인 사람의 수, 가방의 수를 헤아릴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나 예측 불가능한 미래의 것들은? 나는 이런 상황에선 보통 공항 담당자가 배정해준 대로 가만히 있는다. 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존재하고 그것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자처럼 행동할 이유는 없다.


분홍색 캐리어를 뒤따라 내 가방이 들어간다. 가방들이 많아서 사람들이 분주하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사람이 많아서 가방이 많고 그래서 사람들이 분주하다. 머릿속으로 잠시 생각한 이 문장으로 인해 차가웠던 기분이 제 온도를 찾는다. 원인의 끝이라 생각되는 것들에도 대부분의 경우에는 원인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생각해보는 일은 지금까지는 언제나 즐거웠고 그것이 충분히 논리적이라면 기분이 좋아진다. 가방을 담은 플라스틱 바구니가 덜컹하는 소리를 내며 벨트 위에 실려진 것을 보고 나 또한 자연스레 검색대를 통과한다. 빈 바구니들이 줄줄이 나열되어 있고 더는 공간이 없어 밀리는 것이 무척 거슬려 차곡차곡 포개니 익숙함이 눈에 띈다. 먼저 나온 코트를 주섬주섬 챙겨 입던 중 내 가방 또한 챙겨가도 좋다는 눈짓에 짙은 하늘색으로도, 어떨 땐 회색으로도 보이는 배낭을 들고 유리문 하나로 분리된 그 장소를 벗어난다. 


분주함을 지나면 또 다른 분주함이 존재한다. 문을 지나 면세구역에 오면 영화 터미널이 항상 생각이 난다. 빠른 걸음으로 걷는 사람들을 에스컬레이터에 서서 바라본다. 피곤하다. 그렇기에 머리와 마음을 공허하게 유지한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내 라운지에 도착해 창가 소파에 자리를 잡고 목 쿠션을 쑤셔 넣어 빵빵해진 가방에서 노트를 꺼낸다.


'막상 공항에 도착하고 나니 자고 싶은 마음뿐이다. 아쉽고 그리운 마음을 차단한 게 분명하다. 원하는 감정을 원하는 때에 느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편한 기질인가? 그래도 감정을 들게 하는 요인들이 눈앞에 있고, 그것들이 끊임이 없을 때 피곤한 걸 보니 감정을 끄는 것에도 에너지가 드는 듯하다. 그러니까 느끼는 것뿐만 아니라, 느낄지 말지 선택하는 감정을 분류하는 절차에 에너지가 필요한 것일 수도 있겠다.'


아까는 감정을 온전히 느끼기엔 분주했다. 사람이 많고 그래서 가방이 많았고 그래서 사람들이 분주했다. 그리고 다음은 피곤했다. 아쉬움과 그리움은 요즘 내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보는 감정이지만, 그 감정이 든 후부터 조금 전까지는 그것을 온전히 느껴볼 겨를이 없었다. 감정이 들어온 것은, 대부분이 불투명한 출국장 유리문에는 투명한 부분이 아주 작게 있는데, 그곳을 통해 손을 흔들던 엄마가 더는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이다. 이제 한동안은 함께하지 못할 것이다. 카톡이나 비디오, 보이스 콜은 기술의 발전으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훌륭한 차선책이지만, 엄연히 함께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기에 엄마를 비롯한 내 소중한 이들과 당분간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나에게 아쉬움이란 감정으로 흘러들어왔다.


내 소중한 이들과 함께하지 못해서 아쉽다는 것은 내가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것과 같다. 나는 그들과 왜 함께하고 싶을까?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매번 재밌고 편안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그들과 함께하고 싶다.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좋다. 그렇기 때문에 그 시간이 내 삶의 한 부분이 되게 만든다. '소중한 이'라는 요인을 뺀 상황과 비교를 해본다면,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다는 마음은 때론 그 사람과 함께 해서 얻어지는 부수적인 것들에서인 경우도 있다. 그 사람이 가진 특정한 것과 그로 인해 사람이 만들 수 있는 특정 상황이 나에게 필요하거나 내 입맛에 맞기 때문인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요가 선생님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는 요가 선생님을 좋아하거나 소중하게 생각한다기보다는 (물론 그럴 수도 있다) 요가 선생님이 가진 능력과 그 능력으로 인해 제공되는 요가 수업 그 상황을 내가 필요로 하거나 좋아하기 때문이다. 공포 영화를 보며 가슴이 뛰는 것 때문에 옆자리 사람을 좋아한다고 착각하는 경우처럼, 비슷한 신체적 반응을 불러오는 감정들을 구분하는 것은 노력이 필요로 한 일이다. 그런데 심지어 같은 '좋음'이라는 감정이니 상황에서 오는 것인지 사람에게서 오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것은 어찌 보면 더 어려운 것이 당연할 수 있다. 내가 내 소중한 이들을 넣어 놓고 그 시간을 생각해보면, 나는 그들이 가진 무엇이 그 상황을 좋게 만드는지 알 수 없다. 나는 그냥 그들 존재 자체가 좋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들과 함께 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것을 한동안 못한다고 생각하니 무척이나 아쉽다. 이런 마음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감정의 베이스가 되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특정 상황이 그립고, 그것이 그 상황에서 특정 능력 등의 부수적인 것들에서 오는 무언가가 아닌 그 사람 존재 자체에서 오는 좋음 때문이라면, 내 삶에서 그 사람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아쉬움을 생각해보고, 거기서 발전한 그리움이란 감정을 느끼고 있으니 그것이 더욱더 커진다. 그리고 더 온전히 그 감정을 느껴본다. 그러다 문뜩 살아보지 못한 새로운 나라로 출국할 때면 들던 들뜬 기분이 이번 여행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매번 인지되던 그 기분이 마음과 생각을 헤집고 찾아봐도 존재하지 않는다. 원인이 무엇일까. 세상과 사람들은 어차피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일까. 아니면 그곳에서의 삶에 대해 딱히 생각해볼 시간을 갖지 않았기 때문일까. 새로운 나라에 대한 나의 입장은 평소답지 않게 무척이나 고요하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소중한 이들이 더 소중해졌고,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에 더 가치가 생겼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나의 삶에 있을 소중한 이들의 부재, 그로 인해 느껴지는 이 그리움 때문에 내 마음은 더욱더 고요해져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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