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eesoo Jung Jun 09. 2021

[제2장] 지극히 인간적인 사이코패스를 위하여

제2장 의식의 흐름

이 글을 비롯한 본 매거진에 담긴 글은

[소설]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입니다. 



[제2장] 의식의 흐름


    프로젝터를 통해 거실 한쪽 면에 비친 요가 유튜브를 따라 하던 중엔, 스턴 박사가 연예인급은 아니지만, 이 요가 강사만큼은 유명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이유는 오늘 오후에 있었던 일 때문일 것이다.

    박사의 메일에 답장한 후엔 같은 장소에서 사회적 부도덕 관련 작업을 마무리했다. 사회적으로 지켜야 하는 것들을 지키지 않는 상황 안에서의 행위자들을 유형화하는 일인데, 요즘 가장 집중하고 있는 일이다. 단지 재밌기 때문이다. 

    그 후엔 플러싱 한인타운에 있는 한의원엘 다녀왔다. 육체란 것도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는 증거이지 않을까. 많이 썼으니 흠집이나 고장이 나는 것은 내가 어찌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보통은 병원에 가지 않지만, 지속적인 통증으로 인해 다른 일에 지장을 준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밀어 올랐기에 병원에 다녀보기로 한 것이다.

    한의원은 다른 병원에 비해 치료 시간이 길다. 그렇기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는 것이 보통의 것이된다. 개인적으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고, 그래서 귀찮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게 아니라면 난 타인에 대한 친절과 예의에 의를 두고 대화에 기꺼이 참여한다. 저번 주에는 선생님의 고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는가 하면, 오늘은 나의 대학 생활이 주제가 되었다. 선생님의 고향을 아는 것과, 선생님이 나의 전공을 아는 것은 서로에겐 단순한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선생님도 나와 같은 생각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렇다면 선생님도 나를 보통의 사람이라 간주하기에, 이런 의미 없는 대화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런 것이라면 상당히 웃긴 상황이다.

    결과적으로 오늘 선생님은 내가 범죄심리학 전공자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걸 알게 된 사람들은 마치 그러기로 정해놓은 것처럼, 범죄 관련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자주 나오는 그 교수를 아느냐고 나에게 묻는다. 한의사 선생님도 다르지 않았다. 

    사람들이 미디어를 통해 심심찮게 볼 수 있는 교수는 대머와 스턴박사인데, 설명하시는 인상착의로 봤을 때 이번엔 스턴 박사였다. 나는 모른다고 대답했다. ‘알다’라는 것은 다의적이었기에 구체적인 대답이 필요했고, 그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그렇게 대답했다. 자세한 설명 없이 안다고 대답한다면, 내가 그 분야에 있었기에 오해의 소지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내뱉는 어떤 말에는 어떤 파장이 존재한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잘못된 정보가 형성되는 것에 무책임하게 굴고 싶진 않다.

    아무튼 이것이 내가 뜬금없이 요가를 하다 스턴 박사의 명성에 대해 생각해 본 이유이다. 마무리로 사바 아사나를 하면서, 의식을 흘러가는대로 놔두니 몇 년 전 스턴 박사의 강연에 참석한 날이 떠올랐다. 

    대중매체를 통한 것은 그 사람의 온전한 입장이나 의견이 아닐 수 있다. 날이 갈수록 그 가능성은 커져만 가는 것 같다. 그래서 스턴의 주장을 궤변이라 결론짓기 전에 그 사람이 내뱉는 말을 직접 듣고 싶었다 (학회에서 듣지 못했던 이유는 박사는 이제 자신의 연구를 나서서 발표할 급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입에서 나오는 주장이 모순덩어리라면 그 사람의 목소리가 정말로 아름답지 않은 이상 소음에 불과하다. 약간의 가능성과 기대를 품고 참석했던 강연은 소음 그 자체였고, 그의 왜인지 모를 화 난 목소리는 소음을 소음답게 만들었다.

    사실 근거가 없기에 주장이라 할 것도 없었다. 사이코패스는 악하기에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고, 그렇기에 우리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이코패스들도 미리 거르는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의견을 그럴싸하게 만들기 위해 사이코패스가 저지른 흉악한 범죄에 대한 파트는 빼놓지 않고 강조하였다. 아, 사실 이 부분이 90%를 차지했다. 박사는 '이 사람들이 흉악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기질을 판별하여 고립시키는 제도적 장치를 준비 중이니 여러분은 걱정할 것 없고 지지만 해달라'는 말도 덧붙였다.

    이 강연을 들으며 아무도 왜 사이코패스적 기질을 악하다 하는지,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사이코패스도 언젠간 범죄를 저지른다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 부분을 질문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박사가 성경과 코란에 쓰여있는 ‘악인'이 사이코패스다 라고 말했기에 이유를 물었다. 박사는 시편 1편을 찾아보면 저절로 이해가 될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래서 난 찾아봤다. 그런 일은 나에겐 발생하지 않았다. 복 있는 자가 어떤 자인지는 알겠는데, 악인을 설명하는 부분은 ‘바람에 나는 겨와 같고,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그의 길이 망한다’가 전부였다. 이게 도대체 사이코패스랑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혹시나 하여 다양한 언어, 그리고 번역본들을 찾아봤지만 저절로 이해가 가는 일은 끝까지 발생하지 않았다.

    근거 없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명해 진 것은, 이야기할 때 어떤 것이 유별나게 자극적이라면 비교적 덜 자극적인 부분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한다는 것을 까먹기 때문일까? 악을 타고 난 사람. 범죄자가 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래서 그 나쁜놈들을 미리 걸러야한다. 이 자체는 충분히 흥미롭고 자극적이다. 아니면 범죄심리학 박사인 그가 범죄와 기질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기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신뢰를 하는 것일까? 어떤 사람이 내뱉는 어떤 말에는 어떤 파장이 존재한다. 그렇게 사람들은 막연하게 첫 단추가 첫 구멍에 잘 들어가 있겠지 믿게 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면 나머지 단추를 잠그는 행위는 에너지 낭비이다. 사이코패스적 기질이 애초에 악이 아니라면, 피하려고 노력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대머박사가 진행하는 연구는 어느 시점 이후엔 모순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파스타와 피클을 곁들여 먹는 사람들의 90%가 소심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모든 소심한 사람은 파스타와 피클을 곁들여 먹을 것이며, 지금까지는 한 번도 파스타와 피클을 먹지 않은 소심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언젠간 파스타와 피클을 함께 먹게 될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인게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사이코패스적 기질을 흉악범을 연구하다 발견했고, 그래서 기질과 반사회적 행위를 엮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같은 기질을 가지고 친사회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발견되었다면, 이젠 행위와 기질을 분리하는 게 합리적 판단의 결과이지, 그 사람들까지 싸잡아서 잠재적 범죄자나 들키지 않는 범죄자로 묶어 버리는 것은 멍청한, 혹은 악의적인 선택이다.

    그자들이 멍청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사람들이 사이코패스적 기질을 모를 때 그 기질을 발견하여, 특성을 분석하고, 진단기준을 만들어 냈을 만큼 유능하다. 물론 그 요소 하나하나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사이코패스가 아닌 관찰자의 입장에서 타고난 정서적 측면을 분석하고자 했을 때 그것이 최선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그들이 악의적일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그들은 학회에 속했기에 새로운 사실이 발견된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은 과거 자신들이 간과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이익과 욕심을 위해 연구자로서의 윤리와 도덕을 저버린 것이라는 것 외엔 딱히 다르게 받아들일 수 없다.

    말의 파장 말인데, 사람들은 전문가의 의견이라면 신뢰한다. 그래서 전문가가 자신의 전문분야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는 윤리와 도덕의 잣대를 들이댈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이 무분별하게 불어대는 부부젤라로 인해, 사람들은 그릇된 정보로 채워지고, 어떤 이는 편견으로 고통받는다.

    오 분간의 사바 아사나를 끝내고, 요가 매트를 돌돌 마는 중엔 스턴 박사가 나에게 연락을 한 시기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사이코패스를 피하는 노력은 사실 허상이라 전하고 다닌 것은 몇 년 전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딱히 파장이 컸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사람들이 사실은, 반사회성은 타고나는 것이다 라고 말해주는 것을 원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어쩌면 자신들이 가지고 태어나지 않은 무언가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을 무조건 악한 자라고 치부하며, 본인들은 그것을 가지지 않았기에 선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들에게 어떠한 안도감을 가져다 주는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을 인지하든, 인지하지 못하든.

    ‘사이코패스적 기질을 가지고도 친사회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으니, 사이코패스적 기질을 가진 사람들을 무조건 적으로 범죄자나 사회악과 결부시키기는 것은 모순이다’라는 나의 메시지는 이미 세상에 던져졌고, 그것을 받아들이는가 아닌가는 개인의 선택이라 생각하며, 정보가 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나에게 닿을 수 있는 세상에 우린 존재하고 있다. 이제는 무엇을 더 함으로 의미가 더하여지는 일은 아니다. 재미도 없어졌다.     게다가 사람들이 사이코패스 연구에 대한 실상을 아는 것은 나에게 개인적으로 가치있는 무언가를 가져오는 일 또한 아니다. 우리 주변의 사람들은 무분별하게 정보를 습득하며, 그것을 전하고 다닌다. 사이코패스적 기질에 대한 정보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이 제대로 알게 된다고 내 삶에 득이 되는 것도 아니며 여전히 편견을 지니고 살더라도 내 삶에 실이 될 것도 없다.

    굳이 의미를 따지자면, 내 부류의 사람들이 보낸 이메일로 인해 나는 이 활동이 충분히 의미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악한 기질을 타고났다’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나오는 자괴감이나, 애매모호한 ‘인간적’이란 표현에서 비롯된 고립감으로 인해 답답한 삶을 살아왔는데, 나의 글이나 팟캐스트로 인해 해소되었다고들 한다. 하지만 이 또한 나에게 득이 되거나 실이 되는 것은 없는 것이었다. 단지 마음에 흡족함이 밀려드는 상황들이었고, 여전히 내가 무엇을 더 한다고 해서 그 상황들이 더 많아지는 것은 아니니 내가 이 일을 지속할 이유를 만들어 주진 않는다.

    뭐, 사실 애초에 내가 활동을 시작한 이유가 대단히 이타적인 것이 아니기도 했다는 것이 한 몫할 것이다. 사회적 부도덕에 대한 작업과 마찬가지로 단지 윤리의식이나 도덕의식이 없는 것에서 파생된 것들은 항상 나의 정신을 긁어대기 때문에 시작한 일이다. 지켜야 할 윤리와 지켜야 할 사회적 도덕을 무시하는 행위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거슬리고, 거슬림이 사라지게 하는 활동을 함으로써 내 세상은 더 나아진다. 내가 왜 그런 것들을 거슬림의 요소로 받아들이는지는 알 수는 없다. 그 근원을 꽤 오랜 기간 고찰하고, 사유하며, 관조해봤지만 딱히 찾을 수 없었다. 그냥 내가 아는 것은 내 정신이 덜 긁히기 위해서 나는 앞으로도 그런 거슬림의 요소들을 없애는 활동들을 하며 살아갈 것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난 더는 사이코패스에 관련된 나의 입장을 들을 자들을 찾아다니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스턴 박사가 이제서야 나의 글이나 팟캐스트를 발견했다 할지라도 원한다면 얼마든지 무시하고 본인의 주장을 고수할 수 있는 상황이지 않은가.

    이점은 참 이상하고도 궁금한 일이며, 스턴 박사를 만나지 않으면 영원한 궁금증으로 남을 일이다. 박사와의 만남에 대한 나의 감상이 박스를 열기 전 설렘과 같은 느낌으로 바뀜이 인지되었다. 약간의 귀찮음과 책임 의식이 더해진.

매거진의 이전글 [제1장] 지극히 인간적인 사이코패스를 위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