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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A Mar 14. 2024

[그림/작업 에세이]  1. 어떤 목소리


요즘 겪는 변화는 내 안에 글과 그림, 영상, 사진, 이야기, 장면 이 모든 것들이 경계 없는 이미지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친구의 말을 빌리면 “내 안의 모든 장르가 무너졌다.” 그렇게 되어버렸다.


발길을 옮기는 모든 장소는 텍스트로 존재한다. 길가에 떨어진 낙엽, 하늘의 구름만 보아도 만족스러우며 나는 그것을 읽을 수 있다. 작업의 재료로 삼을 수 있다는 뜻이다. 아니, 삼지 않아도 된다. 깊이 들어가기도 전에 자체로 느껴지니까. 이미지가 내게 먼저 다가오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어렵지 않게 순간에 사로잡힌다.


작년에 첫 그림책을 출간하고 오랫동안 쌓여 있던 이야기를 원하는 형태에 담아낸 이후 마음이 조금 비어버린 탓일까, 올해 초 유럽에 다녀와 한국의 미술관에서는 일깨우기 불가능했던 감정들이 마치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살아나는 맛을 보았기 때문일까. 무엇 때문이든 이런 변화를 겪는 계기가 하나는 아닐 것이라 짐작하고 있다.


작가의 창조성을 일깨우는 실습으로 구성된 책 ‘아티스트 웨이’(줄리아 카메론 저) 2주차에는 ‘내가 즐기는 일의 20가지'를 작성할 수 있는 목록이 있다(116쪽).


1. 시 읽기

2. 맛있는 카페 찾아가기 (맛있는 크림라떼 찾아다니기)

3. 에무시네마 가기

4. 아주 좋은 영화 보면서 울기

5. 땀이 많이 나는 운동하기

6. 새벽, 고요한 시간 (6시보다 더 어두운 시간)

7. 밤의 시원한 공기

8. 사랑하는 사람 얼굴 보기 (엄마)

9. 고요한 공간에 조용히 혼자 앉아있기

10. 눈앞의 문제를 차근차근 해결하기

11. 글쓰기 (마음속 단어 건져 올리기)

12. 밤에 문득 영화관 가서 아무거나 보기

13. 산책하기

14. 차분히 말하기

15. 감정을 덜기

16. 달콤한 케이크 먹기

17. 시간 낭비하지 않기

18. 일기 쓰기

19. 머리가 각성되는 어려운 책 읽기

20. 귀여운 것 보기


꽤 빠르게 써 내려갔기에, 그래서 ‘그림'과 관련된 이야기는 하나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나중에 다시 펼쳐 읽어볼 때야 알았다. 이상하게 여길 필요는 없지만 생각은 하게 되었다. 그동안 그림에 너무 많은 품을 내주어 이제 떠나고 싶은 마음도 드는지.


어쩌면 원래 그런 면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고 짐작해 본다. 나는 자주 뛰어들고 싶었다. 또한 바랐다, 아름다운 말이나 작품 혹은 지식-예술이라 부르는 것들-이 나의 뇌 기관 일부만 차지하고만 있는 게 아니라 삶을 움직여주기를, 아니면 내가 그것이 되기를. 이 갈망은 애초에 특정한 장르가 잡아둘 수 없었던 성질이었기에 할 수 있었던 건 우선 미술이라는 문으로 들어가 보는 것이었으며 이후에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는 진단을 내려보기도 했다.


다시 한 번 곱씹는다, ‘모든 장르가 무너졌다’는 의미. 원하던 무엇에 더 다다른 기분이 들기도 하는 지금의 나는 그러나 어디로든 이동해야 한다는 뜻일 테다.



미술에 관한 모든 것’(킷 화이트 지음 김노암 옮김)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무심코 펼친 책 ‘미술에 관한 모든 것’(킷 화이트 지음 김노암 옮김)에서 읽게 된 페이지. 첫사랑을 되새겨보고자 노력한 결과마저 결국 그런 생각은 예술가적 정체성의 명맥을 이어가려는 성실한 의도가 아니냐고 묻고 있었다. 그것 외에 무엇이 있는지, 없다면 과감히 움직이라고.


익숙함에 잊게 된 소중함을 찾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려는 목적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오늘을 나의 언어로 다시 남겨 보고 싶다. 그림에 대해 품었던 처음의 갈망을 잊은 것이 아니다. 소중함을 알고 있다. 단지 변했으며 흘러가야 할 뿐. 내 안의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


‘한국의 미술관에서 느꼈던 어딘가 텅 빈 느낌을 프랑스의 미술관들을 몇 군데 돌아다니며 바로 깨달았다. 내가 한국에서 그리는 그림이 얼마나 진실하고 자유로울 수 있을까 / 최근에 관람한 몇 편의 영화들은 거꾸로 내가 보고 싶은 분명한 영화의 형태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 작가들과 작업에 대해 좀 더 솔직하게 말하거나 차라리 신랄한 비판을 주고받고 싶다고 생각했다. / 어떤 나라나 장소적 특성이 사람에게 당연히 부여하는 규칙 같은 게 있다. 네모난 창으로 된 두툼한 건물로만 둘러싸인 풍경은 볼수록 익숙해지고 무뎌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은 더 평평해지고 딱딱해진다. 물리적인 이동 없이 거기 사는 사람은 의지로써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마음에 사라지지 않는 이야기가 있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려 책을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 목소리들은 날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 걸까? 이 생각들 또한 스쳐 지나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반복되고 강해진다면, 내 발길이 닿을 다음 장소를 만들어낼 것이다. 어디일까?


출처 : 문화매거진(https://www.munwhamagazin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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