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컴컴한 길을 걸어가며 좋아하는 음악을 듣다가 문득 어릴 때 피아노를 치던 나의 모습이 머릿속에 영사되었다. 20여 년 만에 선명하게 떠오른 장면.
건반을 누르는 대로 나는 소리에 집중하면 새로운 세계가 태어났다. 나와 음악밖에 존재하지 않는 세계, 연주를 시작하는 동시에 거기로 들어가는 경험이 늘 새로워서 똑같은 곡을 언제나 처음 치는 것처럼 상대하곤 했다. 하나의 곡을 여러 번 연주하기도 했는데, 손에 익은 곡이어야 그 세계는 더 깊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경험의 총체를 자주 간절히 원했다.
‘교복을 입은 내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피아노를 친다, 하나의 곡을, 만족할 때까지. 그리고 숨을 쉰다. 안도와 행복을 느낀 다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은 다 잊어버린다.’
그 장면을 묘사하고서 울게 되었다. 눈물이 나는 이유를 나는, 쉽게 알 수 없었다.
울었던 이유를 며칠 후에는 좀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내가 품고 있던 마음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보여줄 수 없는 종류였으며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이란 가진 것을 꽁꽁 안고 있다가 아주 조금씩, 하나씩 풀어가는 것뿐이라는 걸 지금은 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품었던 미래, 꿈, 두려움에 관한 감각의 색과 결이 지금도 그때와 똑같다는 사실로 인하여. 내가 삶을 향해 먼저 기대하였다고 생각했으나 삶이 먼저 내게 가질만한 마음을 준 건 아니었을까 하는 기시감으로 인하여.
피아노에 관한 경험이 이렇게 선명한데 나는 아무것도 제대로 설명할 수가 없다. 한 번도 구체적으로 누군가에게 말한 적도 없다. 아주 아주 가려져 있지만 이토록 분명하게 존재하는 타자로부터 완전히 독립된 이 세계를. 드러내 보여줄 수 없기에 더욱 진실이라 믿게 된 마음을, 처음부터 영원했던 세계를. 나는 때로 이렇듯 연약하지만, 고집스러운 영혼과 생명을 생각할 때 아픔 이외에 어떤 것도 느낄 수 없게 되어버린다.
설명되지 않는, 못하는 세계는 모두에게 주어진다. 얼마나 파괴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분명 내가 알 수 없는 채로 바라던, 미지의 성질을 지닌 미래의 여러 얼굴 중 현재는 일부에 다다르기도 했다. 그러나 미래는, 마치 하나씩 해치우고 해결하면 줄어드는 과제와는 달라서, 흐른 시간만큼 제 몸을 부풀려 규모를 키워가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내가 애써 예측하여 내린 선택과는 다른 가능성이 태연하게 웃으며 성큼 다가오는 일이 반복되는 지금처럼. 그때나 지금이나 미래는 여전히 똑같은 총량으로 존재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짐작을 한다. 살아가는 방식을 결정하는 마음의 원천은, 교복을 입고 피아노를 치던 과거에 형성되어 계속 나와 함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이렇게 짙은 농도로 떠올려진 이유가, 내가 삶을 더 믿어도 된다는 뜻이길 바라며. 정확히는 삶이 허락하는 자유를.
피아노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받은 사망 보험금으로 각 외가 식구 집에 마련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외가 식구들 집에는 모두 똑같은 피아노가 한 대씩 놓여 있다. 나의 두 번째 그림책 ‘The red: table’(2022)의 모든 왼쪽 페이지에 그려져 있고, 그림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건 교복을 입은 어린 내가 아닌 지금 나의 모습이다.
출처 : 문화매거진(https://www.munwhamagazi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