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마음
혼자만 읽었던 안전한 일기장에서 불특정 다수가 읽는 세상, 브런치로 나와버렸다.
뭘 써도 따뜻하게 품어주던 일기장을 벗어나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낯선 세계에 발을 디딘 느낌은 설레면서도 두려운 감정이 동시에 든다.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온 새처럼 연약한 내 글은 부들부들 떨면서 한걸음 디뎌보겠다고 세상에 나왔다. 내 이야기가 누군가의 마음에 닿을지 혹은 무관심에 묻힐지 알 수 없는 세상에 떨리는 마음으로 발을 내밀어 본다. 왠지 자신은 없지만 이왕 내민 김에 뒷걸음은 치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말해본다. 부담 없이 가능하면 오랫동안 글을 써보자고, 그 과정에서 실망과 좌절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순수한 글쓰기의 즐거움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말해본다.
조금만 찾아보면 글을 쓰기 위한 조언은 차고 넘친다. 독자가 읽기 쉬운 글을 쓸 것, 서론, 본론, 결론으로 짜임새 있게 쓰기. 핵심 메시지는 간결하지만 명확하게, 무엇보다 많이 쓰고 자주 쓰기 등 이런 조언은 분명 글쓰기에 매우 도움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하지만 나의 경우, 이 모든 걸 생각하면 단 한자도 쓰기가 어려워진다. 머릿속 많은 생각들은 서로가 더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다고 아우성 치면 칠수록 나의 뇌는 혼란스럽기만 하다.
그래서 무언가를 더하는 조언보다는 생각을 덜어줄 조언이 필요했다.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다 생각하기보다 반대로 무엇을 뺄 수 있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그러면 글 쓰는 부담이 줄어들 것 같았다. 그것은 곧 내가 원하는 '가능한 오랫동안 즐거움 마음으로 쓰기'의 지향점으로 이어질 것 같았다.
예전 이슬아 작가의 <무엇을 버려야 글쓰기가 되는가> 강의를 들었던 게 불현듯 생각났다. 무언가를 더한다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는데 던다는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래, 내게는 오히려 버릴 것을 생각하는 게 낫겠구나. 이제 과감히 버려보자.
이슬아 작가의 결혼식날, 친구 양다솔의 축사 일부다.
"제가 아는 이슬아는 최고의 효율맨입니다. 취할 건 취하고 나머지는 가차 없이 버려요. 다만 이슬아 작가가 버리지 않는 3가지가 있습니다. 책, 독자, 이훤. 그 외 쓸모없는 건 계절마다 버립니다. 저도 여러 번 쓰레기장에서 돌아왔어요." 관객들은 박장대소했다. 이슬아는 이를 두고 이렇게 표현한다. 내 친구 양다솔은 능동적이며 자부심 가진 쓰레기인데, 이런 쓰레기 보셨습니까. 자신을 쓰레기(?)로 낮춤으로써 그 글은 강렬하게 살아남았다고 했다. 스스로를 버림 당할 수 있는 쓰레기라고 표현하는 힘은 대체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나는 우스워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강했다.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부끄러워지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글에 힘이 들어가고, 자기 검열에 검열을 거쳐 재밌지도 감흥도 없는 이도 저도 아닌 글이 탄생하게 된다. 나는 글쓰기 초보다. 그러니 맥락이 맞지 않을 수 있고 맞춤법에 실수가 있을 수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핵심 메시지 파악이 어려울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민낯이 드러나 그걸 극도로 꺼린다. 이 모든 건 잘하고자 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지만 이면에서는 우스워지고 싶지 않다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양다솔 작가는 분명 자신을 믿는 힘을 지녔다는 생각이 든다. 단순한 자기애가 아니라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모두 인식하고 받아들이는 자기 신뢰 말이다. 자신을 받아들이고 스스로가 존중하게 되면 타인의 의견이나 비판에 흔들리지 않는 감정적인 안정감이 생긴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설령 실수나 나의 글쓰기 밑천이 다 드러나 우스운 일이 생긴다 해도 나를 믿어주기로 했다. 나는 나를 우습게 여기는 걸 참을 수 없는 마음을 버리기로 했다. 나는 놀려질 만큼 강하다.
타인의 시선에 노출된다는 두려움이 생각보다 강하다는 걸 알았다. 잘 쓴 글로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알겠으나 종종 그 마음이 나를 주저하게 만든다. '진짜 잘 썼을 때만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이 강할수록 글을 쓰는 즐거움은 사라지고, 창작 과정은 부담으로 변해버린다. 생각해 보면 좋은 글이라는 게 단일 기준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좋아하는 작가나 다른 이의 뛰어난 글을 읽을 때면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하곤 한다. (그들이 쏟은 시간과 노력은 생각하지도 않은 채....)
때로는 불완전한 글이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때가 있다. 마치 티끌하나 없이 깨끗한 주방에서 정확한 간격으로 재료를 다듬어서 완벽한 요리를 선보이는 것보다 우리 동네에서 왠지 봤을법한 푸근한 인상을 가진 이가 우당탕탕 요리를 해내는 것에 더 마음이 가는 것과 같을 것이다. 사람들은 우당탕탕 속에서 인간적인 면모를 발견하고 더 공감을 한다.
글쓰기도 마찬가지라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진다. 불완전함 속에서 진솔함이 드러나고 그로 인해 읽는 이와 더 깊은 연결감을 느끼게 된다. 그러니 공유의 용기를 가져보자. 부족한 글이지만 어쩌면 나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나누는 순간 새로운 연결이 생길 수 있다. 연결 속에서 얻은 다른 사람의 피드백은 더 나은 글을 쓰고자 하는 자양분이 될 거다. 그러니 완벽주의를 버리고, 나만의 목소리로 자유롭게 글을 써보자. 어쩌면 그 속에서 진정한 창작의 즐거움을 찾게 될지도.
쓰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종종, 아니 많이.
귀찮음, 게으름, 우선순위에서 밀림 등 이유야 있겠지만, 글을 잘 쓰고 싶으면서도 과정은 생략하고 싶은 마음은 (내가 적으면서도) 참 모순적이다. 운동선수가 연습은 하지 않은 채 국가대표만 바라는 상황과 같달까. 완벽한 첫 문장을 꿈꾸며 즉각적인 결과를 바라다니.
이번 기회에 글쓰기는 이러한 기대를 넘어서는 여정이라는 걸 깨닫겠다! (당연한 얘기지만) 좋은 글은 대개 반복적인 수정과 축적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초기의 글은 완벽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는 생각을 정리하고, 아이디어를 발전시키며, 나만의 목소리를 발견하게 된다. 반복은 창작의 핵심이다. 지루한 반복이란 생각보다 단순 노동이 아닌 생각과 감정을 발전시키는 과정임을 잊지 않아야겠다. 그 길이 더디고 어려울 수 있지만 완벽한 결과물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고 서툴지만 한걸음 한 걸음씩 나의 이야기를 계속 써내려 가다 보면 미래의 내가 지금의 나를 얼마나 대견해할까. 그런 상상을 하니 미소가 지어진다.
그러니 그때를 위해 지금은 더도 말고 딱 이 세 가지만 과감히 버려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