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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림 Dec 29. 2023

그까짓 피아노가 뭐라고.

다 지난 일인데 그게 뭐라고.

임윤찬이라는 소년이 반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세계에 나왔을 때, 임윤찬은 그날로 내 최애가 됐다. 몇 년간 마음속 1위였던 발렌티나 리시차가 두 번째로 밀린 순간이었다. 앞은 보일는지 의심스러운 더벅머리 소년의 피아노는 힘이 넘쳤고, 모든 연주 영상에선 맑고 또랑또랑한 음으로 가득 짜인 소리가 울렸다. 그래서 난 식구들과 함께하는 저녁 자리 뉴스에서 임윤찬의 소식이 나오자마자 잔뜩 설렌 마음으로 저 친구 정말 굉장하다고, 듣는 순간 엇-하고 소리가 남다른 게 느껴질 거라고 떠들어 댔다.


내 말에 엄마는 조금 뉴스에 관심을 가지는 듯하더니 이내 너도 그랬다며 말을 이었다. 이제 열 살 조금 넘은 애가 잘 쳐봐야 얼마나 잘 치겠냐는 심산으로 내 피아노 연주를 처음 들었던 날, 엄마도 같은 걸 느꼈다고. 앞서 연주한 아이들과 같은 곡을 치는데 나만 소리가 달랐다며 십 년도 더 지난 일을 어제 본 무지개처럼 이야기했다. 나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어떻게 나와 같겠냐며 말을 받았지만, 엄마는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나도 계속 쳤으면 쟤만큼 유명해졌을지도 모른다며, 가끔은 내가 피아노를 관두고 공부를 하게 만든게 잘못이었지 싶다고. 엄마는 그렇게 십 년을 내리 아쉬워하며 살고 계신다.     

 


나는 열 살을 목전에 둔 겨울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피아노를 칠 수 있다던 초등학교 친구들보단 늦은 나이였고, 아예 배우지 않은 친구들보단 언제가 되었던 빨랐을 나이였다. 당시 나는 영어, 수학 따위의 보습학원도, 미술, 태권도 따위의 취미 학원도 다니지 않았었다. 하지만 나와 친했던 친구들 대부분은 초등학교에 입학한 날부터 한두 가지 학원에 다녔기에 나는 점심을 먹고 나면 쭉 혼자였다. 그래서 일주일에 한두 번 있던 방과 후 학습 날을 뺀 대부분 시간을 도서관에 틀어박혀 지냈다. 여름엔 흰 커튼에 주홍빛 어스름이 비칠 때, 겨울엔 바깥이 새카매져 커튼이 형광들불에 대낮보다 더 하얗게 질릴 때까지 도서관에서 살았다. 그때도 책은 지나치게 좋아했기에 시간은 언제나 빨리 흘렀지만, 가끔은 심심했고 더 가끔은 외로웠다.


학교엔 학교 친구가, 학원엔 학원 친구가 있다는 게 부러웠다. 학교에서 학원 이야기를 하며 저들끼리 무리를 짓는 것도 그랬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나는 다녀본 적도 없는 학원 이야기에 맞장구치며 이야기할 수도, 학교가 끝나고 학원 근처에서 친구와 함께 무언가를 사 먹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한 친구가 내게 피아노 학원을 같이 다니자 말했을 때 나는 그게 뭐라고 신이 나선 엄마한테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답잖은 이유로 악기를 시작한 것 치고 난 피아노를 꽤 잘 쳤던 것 같다. 아마 내게 적성이라는 게 있다면 그거였지 않나 싶다. 피아노 학원 원장님은 내가 학원에 다닌 지 한 달 만에 엄마한테 전화를 거셨다. 원장님이 아이들을 여럿 가르쳐봤는데 내가 당신이 본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재능이 있다고 그러셨단다. 가르치면 가르치는 대로 다 받아들여서 전공을 시켜도 될 거라며.


엄마는 처음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엄마가 나는 손재주는 지지리도 없던 아이였기에 손을 움직이는 일을 잘한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잘하는 정도겠거니 하고 마셨다고. 나였어도 안 믿을 것 같다. 난 지금도 피아노 치는 것 외에 다른 손재주는 부리지 못하니 엄마가 그렇게 생각했던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지 싶다. 제일 잘 그리는 그림은 새싹이고, 대학 시절 로봇의 외관을 내가 만들면 치수가 다 맞아도 어설펐으며, 엄마의 취미라 몇 번 잡은 뜨개바늘은 실을 거는 것보단 사람을 괴롭히는데 더 유용하게 쓴다. 심지어는 거의 매일 하는 화장도 몇 년째 늘질 않는다. 이런 손인데, 고작 한 달 배우고 그런 재능이 있다는 말을 어떻게 믿겠어.


그래서 엄마는 내가 첫 피아노 급수 시험을 치르던 날, 순번을 기다릴 때까지만 해도 그저 맹해 보였던 당신 딸의 피아노 소릴 듣고선 원장님의 말이 진짜였단 걸 알았다. 피아노 급수 시험은 정해진 곡을 심사위원 앞에서 연주하다가, 심사위원이 악보 한 장의 절반쯤을 듣고 나면 그만 연주하라는 표시로 종을 울린다. 그리고 같은 급수의 다음 아이가 나와서 같은 곡을 또다시 1분 좀 안 되게 연주하곤 사라진다. 그래서 그 대회를 지켜보는 사람은 1분 미리 듣기를 최저음질로 수십 번 반복해 듣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런 지루한 시험장에서 내가 잘한단 걸 알았다니. 그래서 나는 엄마의 말을 안 믿었다.


그날 엄마는 내 연주 순서가 거의 끝번이었던 탓에 내가 칠 곡의 첫 30초를 몇십 번은 들었을 거다. 그런데도 엄마와 그 자리에 왜 있었는지 기억나질 않는 친척 오빠는 내가 연주를 시작하자마자 놀랐다고 한다. 분명 같은 곡인데 소리가 달랐다고. 곡을 끊는 신호마저 내가 칠 때는 남들보다 길게 듣고서야 울렸다며, 길어야 5분도 안 됐을 연주가 뭐가 그렇게 대단했다고 엄마는 종종 그때 얘길 하신다.


난 여전히 그때의 내가 뭐가 달랐다는 건지는 모르겠다. 녹음파일도 없고, 기억도 안 나니 그럴 수밖에. 내 기억엔 다 똑같은 피아노였다. 그래도 확실한 건 그날 두 사람이 놀라 호들갑을 떨었을 만큼 내 점수가 높긴 했다. 그때 내가 본 6급이던가 7급의 급수는 80점 이상을 받으면 급수 통과였다. 그래서인지 대부분 81-2점 사이의 점수를 받았고, 나는 88점을 받아 같은 급수의 맨 윗줄에 적혔다. 나는 소심하게 맨 아래서부터 내 응시번호를 찾았는데 가장 마지막에서야 내 번호를 찾은 탓에 꽤 당황했었다. 떨어질 줄 알았는데.


그날 이후로 두 관계자, 엄마와 원장님은 조금 각별해졌다. 원장님은 한 달에 10만 원이 조금 안 되는 돈을 내지 못해 학원비가 밀리기 일쑤인 나를 업어 키우셨고, 엄마는 원장님과 전화할 때마다 내 진도가 아주 빠르다거나 피아노를 전공하는 것은 어떻겠냐는 말을 매번 진지하게 들으셨고, 아무것도 모르는 나는 55 건반 정도의 작은 전자피아노가 생겨서 그저 기뻐했다.


  


사실, 피아노는 사치였다.  무렵 우리 집은 지독하게 가난했다. 자영업을 하는 탓에 고정적인 수입은 없었고, 일한 만큼 버는 시장에서 아빠는 이제 겨우 자리를 잡을락 말락 하는 신생업자였다. 옷 한 벌, 외식 한 번 하기도 버거운 삶에 피아노는 사실상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저 내가 무언갈 하고 싶다고 말한 게 그게 처음이라 몇 달, 내지는 몇 년 정도 다니면 그만두지 않을까 하며 무리해 보내셨다고. 내가 그렇게 잘 배울 줄은 꿈에도 모르고.


그날 본 급수는 본디 8급부터 시작하는 게 관례인데 원장님이 그 업계에 오래 있었던 덕분에 한 개였나 두 개 급수를 건너뛰고 본 시험이었다. 8급을 연습하기 시작한 지 3일 정도 지났던가, 원장님이 이건 안 봐도 될 것 같다며 악보를 갈아치웠던 기억이 난다. 그 이전엔 4권짜리 바이엘의 중간 한 권을 통째로 건너뛰기도 했고, 남들이 치던 두꺼운 체르니 100시리즈를 혼자 간추린 시리즈로 치고 넘어가 버리기도 했다. 나보다 피아노를 3년 먼저 배운 친구의 진도를 따라가는 것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언젠가부터 그 모든 걸 알면서 모른 척했다.


처음엔 정말로 몰랐다. 초등학생이 뭘 안다고. 그냥 나 잘하나 봐! 하고 좋아하면 그만인 데다, 피아노 좀 친다면 다들 한 번씩 나간다는 콩쿠르 한 번 나가지 않았던 탓에 내가 잘 친다는 건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소리인 줄 알았다. 그 콩쿠르에 한 달 학원비보다 많은 돈이 들었기에 나갈 수 없었다는 건 최근에야 알았다.


하지만 중학생이 될 무렵 새하얀 표지의 베토벤과 쇼팽 책을 함께 받으면서부터는 모르지 않았다. 모르는 척했다. 학원에 그 많은 선생님을 두고 내 레슨은 매번 원장님이 직접 봐주셨던 일이나, 한 시간이면 끝나는 학원 시간을 한참 넘겨 두 시간 내내 피아노를 붙잡고 놀아도 누구도 집에 가라 말하지 않았던 일이나, 특정 곡을 가르쳐주며 어느 예고의 입시곡이라는 말을 한다던가. 집에서는 내게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은지 물어보는 일이 잦아졌다. 이러는데 모를 수가 없지. 그렇게 나는 원장님의 기대와 부모님의 걱정을 모두 외면하고 순전히 피아노가 좋았던 내 욕심으로 한참이나 그들의 기대를 망연히 곁에 두기만 한 채 피아노를 배웠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학원을 그만둘 마지막을 차곡차곡 미뤘다.      


그러던 어느 날 원장님이 느닷없이 악보 하나와 노란 연주회 책자를 주셨다. 군대라는 부제가 붙은 그 폴로네이즈는 에너지가 많고, 박자가 정확할 때 예쁜 곡이라 그동안 쳤던 다른 폴로네이즈보다 내게 가장 잘 어울릴 거라며 손수 악보를 프린트해 주셨다. 그리고 덧붙였다. 당신은 날 끝까지 가르쳐줄 수 없으니 그 곡으로 연주회에 나가서 당신보다 더 나은 선생을 찾아보자고. 그래서 난 학원을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다. 수학 학원을 가고 싶은데 두 개를 같이 다니기 어려울 것 같아서, 곧 그만두지 않을까 싶다고.


중학교 3학년 때까지 줄곧 다닌 피아노 학원은 그렇게 시작했던 것만큼이나 싱겁게 관뒀다. 그때까지도 내게 피아노를 전공하고 싶은지 몇 번이나 물어보던 엄마는 수학 학원을 가고 싶단 내 말에 안타까워했고, 안도했다. 우리 집 재정 상황에 학원 두 개는 갈 수 없다며 내 취미를 끊어내야 하는 것에, 그럼에도 전공을 하지 않아 큰돈을 마련하지 않아도 됐음에. 정말 좋아하는 건 돈과 결부시키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는 엄마의 말 하나로 생각보다 많은 걸 알아 버린 나는 차마 수학도 피아노도 하고 싶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뭐, 그래도 피아노 학원을 관두고 심하게 덜그럭거리지만 88개 건반이 가득 찬 전자피아노가 생겼으니 잘된 거 아니었을까. 으레 말하듯 어차피 예체능으로 돈 벌긴 힘드니까 말이다.     



엄마는 한참이 지난 지금도 내가 피아노만 치면 곧잘 내 재능이 아깝다는 말을 한다. 가난이 앞으로도 영영 가난하진 않았을 텐데, 그것도 언젠간 끝이 났을 텐데 그때 그냥 잘하는 걸 하게 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며. 그래도 그땐 돈이 너무 없어서 내게 좋은 선생을 붙여줄 수도, 비싼 입학금을 내고 예고에 날 보내는 것도, 전부 상상 못 할 일이었다고. 한 달 15만 원인 학원비를 10만 원으로 깎아내고서도 곧잘 밀리는 삶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 말을 스무 살 전에 들었다면 나도 조금은 나를 아쉬워했을 것 같다. 그리고 그것보다 조금 더 속상했을 것 같다. 내심 마음 한편으로는 예고를 가고 싶어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가난한 재능이 대개 그렇듯 그 모든 건 이제 내 프로그램 속 코드에나 있는 if일 뿐이다. 꽃이 핀다고 모두 열매가 맺지 않고, 그 꽃마저도 맺기 어려웠던 게 가난했던 엄마 딸의 재능이었지 싶다. 그저 누군가의 꿈속에서 그것도 좋았을 거라 상상되는 것 말곤 더는 그 재능이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 정도면 내 피아노는 충분히 역할을 다 했다.


그래서 난 엄마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모를 일이라며, 괜히 전공했다가 애매한 재능인 게 까발려져서 더 괴로웠을 수도 있지 하고 엄마와 반대되는 그림을 그린다. 솔직히 그렇잖아. 모를 일이지. 그건 이제 만약-일 뿐인걸.


하지만 내가 아무리 괜찮다고 말해도 엄마는 별로 들으실 생각이 없는 듯하다. 당장 어제만 해도 드뷔시를 치다 비슷한 말을 들은 걸 보면 아무래도 엄마는 내 재능을 평생토록 아쉬워하는 유일한 사람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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