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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네림 Jun 05. 2023

정겨운데 날카롭고, 뒤집으면 부드러운 이야기

참 괜찮은 눈이 온다, 한지혜

어떤 책에 빠져드는 데는 보통 순서가 있다. 난 보통 첫 장을 읽고 괜찮네-싶으면 넌지시 쭉 읽기 시작한다. 재미있을 만한 책은 보통 20페이지 정도 읽었을 무렵 느낌이 오고, 그 느낌을 따라 읽다 보면 어느 순간 페이지 숫자를 보지 않게 된다. 그때쯤이면 얼마나 읽었는지보다는 얼마나 남았는지가 더 중요하다. 다음 내용이 궁금해 얼른 읽어버리고 싶으면서도 오른손 끝에서 느껴지는 남은 페이지가 아까워 천천히 읽고 싶기도 한, 그런 마음이다. 좋다고 느꼈던 책의 대부분은 저 순서를 벗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책은 앞선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첫 두 장을 읽는 순간 느낌이 왔다. 사야겠다-하고. 누군가 나에게 이 책은 어땠어, 하고 물으면 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갖고 싶었다고 말할 거다.     


최근 에세이를 정말 많이 읽었다. 숨쉬기가 퍽퍽하기도 했고, 에세이를 쓰고 싶은 욕심도 생겨서 도서관에 갈 때마다 산문집을 하나씩 빌려왔다. 따뜻하고 몽실몽실한 이야기를 읽을 거면 이도우의 밤은 이야기하기 좋은 시간이니까요가 제격이다. 일기 같으면서도 어딘가 씁쓸한 이야기를 찾으면 에쿠니 가오리의 울지 않는 아이를, 문체가 노래하는 것처럼 예쁘고 단단한 이야기를 찾으라면 김병심의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 오면을 가지고 올 거다. 그리고 이제 얘기할 참 괜찮은 눈이 온다는 그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앞선 책들처럼 한 줄로 정의하기 조금 어렵다.


어떤 때는 정겹고 그립다가, 다시 보면 날카롭고, 뒤집으면 부드럽다. 비 온 뒤 땅이 굳는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책인데 읽다 보면 그 비가 차가운 겨울비인지 후텁지근한 여름 소나기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내린 일련의 비를 맞으며 크듯 작가도 그 비들을 맞고 단단한 땅이 됐고 그 이야기를 글로 적어 책으로 냈다. 내용만 보면, 여느 에세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그 흔한 에세이에 반한 이유는 여느 책들처럼 비가 오고 눈이 내리는 과정을 그저 아름답게만 묘사하지 않았단 점이었다. 이 책은 비부터 시작해서 작가 본인이 단단해지는 과정이 있는 그대로 묘사되어 있다. 좋은 건 좋게, 싫은 건 싫게. 어설펐던 시절을 딛고 자란 과정이 내가 본 어떤 책보다도 진솔하게 쓰여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작가가 느낀 감정엔 왜곡된 것도, 숨겨진 것도 없는 듯했다. 그래서 특별히 멋들어진 문장을 쓰지 않아도 글 전체가 멋있게 느껴졌다. 이런 글을 보고 어떻게 반하지 않을 수 있겠어. 그건 불법인걸.   


책을 다 읽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딱 이틀. 토요일 밤에 시작해서 일요일 저녁에 덮었다. 아마 밥 먹고 책만 읽었다면 반나절? 도입부터 책에 단단히 코가 꿰인 탓에 천천히 아껴 읽고 싶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열 장 정도 남아있었다. 얼마 안 읽었던 것 같은데.



한지혜 작가는 세상을 투명하게 보는 사람이다. 세상의 모든 일엔 양면성이 있고, 작가의 세상에서 그 양면성은 어느 한 부분이 미화되지도 않고 과장되지도 않는다. 좋은 건 좋은 것, 나쁜 건 나쁜 거다. 나쁜 게 있기에 좋은 게 빛이 난다는 고리타분한 위로도 하지 않는다. 모든 게 있는 그대로, 보이는 그대로다. 그래서 나는 작가가 책의 첫 부분에 적은 말이 참 좋았다. 


무엇을 쓸 것인가. 빛과 어둠, 무엇을 증명해야 할까. 어찌할 도리가 없는 삶들에 대해 쓸 때 어떻게 말해야 할까. 희망을 노래해야 하나. 희망을 조롱해야 하나. 인생은 비극이고, 인간은 그 비극을 통해 성장한다는 서사는 궁극의 비극일까, 아니면 희망일까. 나는 지금도 그 답을 잘 알지 못하겠다.

비극은 비극이 맞고, 사람은 그 비극을 통해서 성장하는 것도 맞다. 그럼 그 비극은 빛인가? 하지만 비극은 어둠인데. 내가 항상 일장일단이라 말하며 생각해 오던 것들을 적어내는 작가가 있다는 게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책을 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뒤에 올 내용이 좋을지 나쁠지에 대한 고민은 해보지도 않고 직감적으로 그렇게 느꼈다. 그리곤 뒤에 나오는 길에서 길이 그립다는 말을 읽고선 진짜 사야겠다 싶어서 인터넷을 열었다.     


칸칸이 늘어선 방들이 모두 층층이 올라가 아파트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미로 같은 골목에서 길 한 번 잃지 않고 살았던 나는 눈 한 번 휘두르면 끝이 보이는 넓은 길에서 오히려 막막하다. 꿈마다 내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너무 좁아 담벼락이 어깨를 스치는 바로 그 길이다. 걸을 때마다 길 위에서 길이 그리워 나는 더러 눈물이 나기도 한다. 


최근에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 앞 인도가 싹 바뀌었다. 원래는 봄이면 벚꽃보다 먼저 이름 모를 분홍색 꽃이 피는 나무가 줄지어 심어진 길이었는데, 언젠가 그 나무를 싹 뽑아버리더니 아스팔트로 메워버렸다. 매해 여름에 가지를 치는 게 귀찮기도 했겠지만, 사람 두 명 지나가기도 비좁은 길이었으니 지금이 더 괜찮은 게 맞을 테다. 하지만 나는 해마다 피는 그 꽃을 꽤 좋아했던지라 그 지저분한 가로수길이 종종 생각나곤 한다.


나는 저 문장이 적힌 이야기를 읽는 내내 그 길목을 떠올랐다. 나는 고작 길 하나지만, 작가는 동네가 전부 메워진 거네, 그건 이것과 비슷한 느낌일까 하면서. 그러다 길에서 길이 그립다는 말을 읽자마자 한 대 얻어맞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첫 문장에서 칸칸이와 층층이라는 말이 운율 좋게 입에 붙는 게 마음에 들었다. 그런 데다 길에서 길이 그립다니. 추억이 그립다는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할 수 있다니. 이걸 보고 어떻게 안 반해. 



책은 분명 작가의 이야기인데도 너무 낯설지 않은 감정들이 적혀있는 탓에 자꾸만 마음이 갔다. 평범한 일상 이야기, 사람 간의 이야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등 다른 산문집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친근함이 있었다. 특히 사람 간의 이야기가 그랬다. 우린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고, 나이가 들면 누군가의 부모가 될 테고, 또 누군가의 친구다. 그리고 작가도 그런 수많은 사람 중 하나라는 게 느껴졌다. 나와 다른 게 있다면 작가는 그 관계를  날카롭고 섬세하게 관찰한 후 멋있게 쓸 수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어렵지 않게 읽혔고, 여느 에세이들처럼 특별한 게 없어도 특별해 보였다. 


게다가 본인 삶을 고찰할 땐 또 왜 그렇게 단단한지. 어릴 적부터 항상 단단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지라 책을 읽으며 과하게 맞장구친 부분도 많았고, 그렇구나 싶으며 위로가 된 부분도 많았다. 특히나 삶에 대한 말을 읽을 땐 괜히 먹먹한 기분이 들며 위로가 됐다.     


사실 삶을 두고 완성이라는 표현을 쓰는 건 좀 이상하다. 삶에는 시작과 끝 그리고 그 사이의 과정이 있을 뿐이다. 그중 어디에서 어디까지의 무엇을 두고 그 삶의 완성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전체를 다 살아야 비로소 완성이라면 죽을 때까지 우리는 미생인 것이고, 만족할 만한 일부의 시간만을 완성이라 부른다면 나머지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삶은 그저 삶이다. 덜 이룬 것도 다 이룰 것도 없지 싶다.


난 언젠가부터 사는 게 지겨웠다. 대학을 다니다 지쳤을 때부터인지, 그보다 훨씬 전에 열심히 살아봐야 뜻대로 되는 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부터인지는 모르겠으나 사는 게 참 재미가 없었다. 죽을 수 없으니 산다는 말이 내게 딱 맞았다. 되고 싶은 건 있었지만 그게 살아갈 이유가 되어주진 못했다. 그래서 내 삶은 항상 눈앞에 있는 걸 잘하는 게 목표였다. 당장 내가 해야 할 일을 해치우기만 하는 것도 어려운데, 더 먼 미래까지 생각하면 그냥 빨리 죽고 싶어 지니 어쩔 수 없었다.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죽을 용기는 없으니 그렇게라도 살아야지. 


별로 좋은 삶의 태도는 아니었지만, 이게 그리 나쁘진 않았던 것 같다. 덕분에 하는 일이 잘 안 되더라도 크게 가라앉은 적 없고, 성공해도 크게 기쁜 적도 없었기에 다음에 할 일을 찾는 게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렇게 살다 엎어지니 꽤 아팠다. 여태 아프지 않았던 것들이 모조리 업보로 쌓여 괴로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힘들었다. 그래서 아무리 생각해도 더 살고 싶지가 않던 차에 저 문장을 읽어버렸고, 나는 한참이나 다음 내용을 읽을 수가 없었다. 덜 이룰 것도, 더 이룰 것도 없이 삶은 그저 삶일 뿐이라는 말이 왜 그렇게 위로가 되는지. 저 말 하나로 다 글러 먹었다고 생각한 것들이 모두 그저 한순간일 뿐인 게 됐다. 끝이 안 나 완성이 안 됐는데 글러 먹었을 게 뭐가 있나. 결말은 알 수가 없는데. 여전히 그 끝이 지독하게 멀리 있다는 건 생각만 해도 피곤하지만, 저 말을 듣고 보니 다시 전처럼 그저 살아가면 되는 게 아닌가 싶어졌다. 어차피 내 모든 것들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 될 테니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유독 눈을 뗄 수 없었던 문장이 있었다. 


바닥을 치고 딛는 힘이 강할수록 꽃도 열매도 실하다. 사는 게 어려울 때, 마음이 정체될 때, 옴짝달싹할 수 없게 이것이 내 삶의 바닥이다 싶을 때, 섣불리 솟구치지 않고 그 바닥까지도 기어이 내 것으로 움켜쥐는 힘, 낮고 낮은 삶 사는 우리에게 부디 그런 힘이 있었으면 좋겠다.


난 내가 힘들 때도 그랬고 다른 누군가 힘들다고 할 때도 굳이 괜찮아지라고 하지 않는다. 감정은 그게 무엇이든 시간에 무뎌지기 마련이고, 특히나 어떤 것도 못 할 정도로 힘이 들 땐 괜찮아지려 노력할수록 괜히 반감만 살뿐이다. 숨만 쉬어도 지치는데 뭘 더 하라니. 그럴 땐 그저 안 죽고 살아만 있어도 다행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힘들고 지칠 때는 그 감정을 충분히 이해해야 괜찮아질 힘도 생긴다. 대부분이 그렇지 않은가. 일 할 때는 그 일을 왜 하는지 알아야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고, 갈등이 발생했을 때도 다툼이 왜 발생했는지를 알아야 관계를 풀 수 있다. 세상에 왜와 이해를 빼곤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러니 힘이 든 것도 왜 그런지 이유를 찾고서, 그 감정이 모조리 소모될 때까지 충분히 힘든 상태에 빠져줘야 맞는 것일 테다. 그러고 나면 작가가 말한 것처럼 바닥까지도 기어이 움켜쥘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움켜쥐면 끝난다. 어딘지 알 수 없게 캄캄하기만 했던 바닥이 점점 눈에 익고, 지독한 바닥 세상이 그제야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작가도 나와 같은 생각으로 저 말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저 섣불리 솟구치지 말라는 말만으로도 천방지축으로 굴러가고 있는 내 머릿속이 공감받는 느낌이었다. 이것 외에도 작가의 세상은 내 생각과 닮은 점이 너무 많았다. 분명 작가의 글과 내 생각은 말의 깊이가 다르긴 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반 오십도 못 산 내가 내 두 배는 살았을 것 같은 작가와 같은 깊이로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지만 비슷한 방향으로 세상을 보고 있단 게 그저 놀라워 정이 갔다. 그리고 조금 개인적인 감상이지만, 엄마로서의 한지혜 작가는 신기하게도 우리 엄마의 시선과도 닮은 점이 많았다.      


하고 또 한다고 해서, 언젠가는, 결국, 모든 것을 성취할 수는 없는 법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그 과정 아닌가. 1등 안 해도 돼! 나는 화면에 대고 소리를 쳤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바로 옆 레인에서 물살을 가르고 있는 내 아이에게도 해줄 수 있을까. 너에게는 너만의 속도가 있으니, 그 속도에 맞춰 살라고, 조금 져도, 늘 져도 괜찮다고, 과연 말해줄 수 있을까.


내 동생은 속도가 느렸다. 말을 배우는 것도 늦었고, 사람을 사귀는 것도, 문장을 이해하는 것도 느렸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어릴 적부터 넌지시 그런 말을 하곤 했다. 세상은 다 자기만의 속도가 있긴 한데, 세상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이 느리길 바라겠느냐고. 그래서 내 새끼한테 져도 괜찮다는 말을 하는 게 참 힘들었다고 그러셨다. 동생은 어쩔 수 없이 느린 아이니까, 속이 상해도 당신은 받아들이기로 했다고. 그래서 난 저 문장을 읽자마자 엄마가 생각났다. 입바른 소리도 그게 내 세상으로 들어오면 마냥 바르게 말하는 건 힘들다던 엄마의 넋두리를 산문집에서 읽을 줄은 몰랐다. 저 말은 아직 엄마한테서 말고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인데.


이후에도 한지혜 작가의 글에는 엄마가 했던 말이 참 많이 보였다. 가족 중에 병상에 누운 환자가 있어도 결국 우리는 우리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말이나, 아이들에게 무언갈 설명할 때는 은유나 비유를 섞지 않아도 괜찮다며, 설명하고 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아이에겐 놀랍도록 새로운 세상이라는 말 등 엄마와 한 번쯤 했었던 대화가 책에 참 많이 적혀있었다.     


참 괜찮은 눈이 온다는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나와 닮고, 우리 엄마와 닮은 시선을 가진 작가가 쓴 책.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이 책은 긍정적이고 단단한 마음을 잔뜩 적었는데, 그러면서도 사람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을 질투와 욕심도 숨기지 않았다. 너무나도 인간적인 책이다. 세상을 통달한 어느 현자가 책을 읽으며 그러면 안 돼-라고 말할 순 있어도 난 한낱 사람이라 그렇지, 그렇지 하고 맞장구치게 되는 책.


난 아마 평생 이 책을 잊기 어려울 듯하니, 언젠가 삶이 다시 지겨워지려 할 때면 몇 번이고 읽게 되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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