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경의 <뉴턴의 무정한 세계> 리뷰
일제강점기에 나온 한국 소설을 보면 가끔 이상한 구석이 있습니다. 사랑 이야기든 항거 이야기든 방황 이야기든, 소설의 줄거리와 연관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뜬금없이 과학과 기술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장면이나 과학과 기술과 관련해 지나치리만치 상세하게 늘어놓아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 장면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입장에서 보면 맥락도 없어 보이고 근본도 없는 것 같은 이런 장면.
하지만 학생 청취자 여러분이든 학부모 청취자 여러분이든 과학과 기술이라는 단어 앞에선 주눅이 들고 잘해야 할 것만 같고 못하면 시대에 뒤처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지 않으시나요? 이런 것을 보면, 100년 전에도 그럴듯한 소설을 쓸 정도의 지식인들도 우리처럼 과학 앞에서 작아지는 느낌을 극복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과학은 대체 우리에게 무엇일까요? 어떻게 우리 사회로 흘러들어 왔길래 이토록 우리를 괴롭히는 것일까요? 이광수, 염상섭, 이상, 박태원의 소설에서 이상하리만치 튀는 장면을 뽑아 읽으며, 그 안에서 뉴턴과 다윈과 아인슈타인과 에디슨을 끄집어내는 독특한 책, 정인경의 뉴턴의 무정한 세계를 읽어보겠습니다.
제가 이 책을 읽으면서 꼽은 키워드는 한국의 근대과학기술입니다.
이 책에서 주목해 볼 만한 부분은 두 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과학기술, 과학기술적 지식의 상대화입니다. 100년 전 일제강점기 때도, 학부모 청취자들께서 어린 시절을 보낸 개발도상국 시절에도, 또 이미 세계적인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지금도 과학과 기술은 언제나 우리가 선망해야 할 대상, 성취해야 할 목표로 간주됐습니다. 이런 태도는 과학기술적 지식과 그 축적 과정은 객관적이며 절대적이고 항상 옳다는 사고방식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이 책은 과학기술적 지식 또한 그 지식을 둘러싼 문화와 사회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특정한 맥락 속에서 만들어진 지식이라는 점을 설명하려 애씁니다. 그래서 앞에서 말씀드린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에디슨의 생애를 매우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특히 이들이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고, 누구와 경쟁했으며, 극복하고자 하는 장벽은 무엇이었는지에 관한 정보가 주를 이룹니다. 이걸 설명하는 부분에선, 다른 과학사 책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내용보다 조금 더 깊게 이 네 사람의 생애를 접해보실 수 있습니다.
주목해 볼 부분 나머지 하나는, 이 과학기술적 지식이 한국에 어떤 과정을 거쳐 자리 잡았는지 알려주는 부분입니다. 이 책은 총 네 장으로 구성돼 있는데, 각 장이 앞에서 말씀드린 네 작가의 소설로 시작합니다. 이광수의 무정,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 이상의 날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입니다. 교육 방송을 들으시는 청취자 여러분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한국 근대 문학의 고전들이죠. 대체 왜 이 고전들에서, 소설 한 중간에, 뜬금없이 과학 장광설을 읊어대는가? 이게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이자 동시에 해명해주는 부분입니다.
이런 면은 3장과 4장에서 두드러집니다. 서양의 과학기술계가 전기의 원리와 발전 송배전 활용 등 연구 끝에 축적한 방대한 과학기술적 지식은, 경성의 불야성을 만들어내며 박태원이라는 식민지 지식인에게 경이라는 감정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결코 공평하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권력이 세운 최초이자 최대 규모 수력발전소의 전기는 오로지 일본계 비료공장만 사용할 수 있었다는 게 가장 좋은 증거입니다.
서양에서 현대 물리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닐스 보어의 양자역학이라는 눈부신 성과를 거두는 동안, 일본은 주요 연구소에 국비 유학생을 보내 이들을 빠르게 따라잡고 1949년에는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까지 배출해냅니다. 반면 식민지 조선에서는 과학기술 관련 고등교육기관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고, 조선이라는 문화공동체 안에서 최고 수준의 천재였던 이상 같은 인물도 건축 실무기술자 양성을 목표로 하는 경성고등공업학교에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한 환경이었죠. 1945년 해방 직전까지 그럴듯한 학술지에 논문을 내고 활동하던 물리학자가 딱 네 명이었다고 하니, 내선일체를 내세운 겉모습과는 너무나도 다른 실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이란 한국 문화에, 1800년대 후반 이후 가해진 여러 폭력의 양상 가운데 하나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객관적이고 절대적이며 항상 옳다고 하기엔, 수용과 확산이 너무나도 부자연스럽게 이뤄진 측면이 있으니까요. 우리가 여전히 과학에 대해 갖고 있는 두려움도 그 과정의 결과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책입니다.
제가 이 책과 함께 하면 좋을 것으로 꼽은 책은 박태호의 <오답이라는 해답>입니다. 지난해 출간된 아주 따끈따끈한 책인데요, 오늘 우리가 다룬 책과 비슷한 ‘한국의 과학기술’이라는 영역과 주제를 조금 가볍고 넓게 다루는 책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특히 과학기술이 한국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수없이 많은 웃픈 일들을 모아놓아서, 상식을 쌓는다는 측면에서도 대단히 도움이 되는 책이 될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