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함'의 압박에서 벗어나는 행복에 관한 책
단어 ‘충분하다’의 어감은 다양하다. “그걸로 충분해”라는 한 문장이, 맥락에 따라 ‘모자라는 것 없이 만족해’와 ‘모자라는 구석이 많지만 이 정도에서 그쳐야겠어’라는 완전히 다른 의미로 쓰일 수 있어서다. 이 두 의미 사이에 무수히 많은 ‘충분함’이 있다는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충분하다’는 말이 지닌 이런 의미의 범위 때문에, 어쩌면 이 말은 우리 삶 전체를 꿰뚫어 규정하는 단어가 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충분하다’는 말이 실제로 그런 역할을 맡기에 적합한지 검토하는 것은 아마도 철학적 과제가 될 텐데, 이 책이 바로 그 작업의 밑그림을 그리고 있다. 글쓴이인 아브람 알퍼트는 이 책 전체에 걸쳐 ‘충분함’의 의미를 밝혀낸다. 그러면서 그 의미를 삶의 태도로 받아들일 때 나와 타인, 내가 속한 사회와 인류 전체가 지금보다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말한다. 그 말을 적용하는 대상이 바뀌면서 의미가 약간씩 달라지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알퍼트가 말하는 ‘충분함’이란 인간의 삶 속에 있는 불완전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그에 따라 발생하는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태도를 뜻한다.
이 충분함의 반대편에는 ‘위대함’, 즉 불완전함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상태를 어떻게든 결점이 없는 상태로 바꾸기 위해 더 나은 무언가를 추구하는 태도가 있다. 알퍼트는 ‘위대함’이 사람들의 개인적 사회적 불행, 사회 문제, 나아가 전지구적 과제의 원인이라고 말한다. ‘위대함’을 추구하는 개인과 사회가, 무의식적이든 의도적이든 극복해야 할 불완전함과 결점을 끊임없이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알퍼트는 이런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담론을 분석한다. 개인의 ‘위대함’을 떠받드는 윤리학적 논의, ‘위대한’ 사람이 되라고 부추기는 사회 정치 사상, 우리가 ‘위대하다’고 믿는 사람들이 벌인 일들의 결과로 만들어진 지금 우리 세상의 모습이 이 담론에 포함된다. 조금 더 학술적이고 딱딱하지만 구체적인 단어로 바꿔 말하자면 정치적 자유주의와 그 반대자들이 능력주의를 두고 논의하는 내용, 경제적 자유주의 또는 자본주의, 기업가정신을 퍼뜨리며 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만드는 유명한 경영자(콕 집어 말하자면 빌 게이츠)와 투자가들이 ‘위대함’을 뒷받침하는 요소다.
우리 시대 ‘위대함’ 태도의 개인적 기반은 단언컨대 능력주의다. 하지만 많은 비판가들이 지적하듯 능력주의는 실제로 능력 있는 사람을 대우하기 위해 쓰이지 않는다. 그보다는 현재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능력이 있(었)으니 그 지위를 차지하는 게 당연하다고 강변하는 사후정당화의 논리로 동원되는 경향이 더 강하다. 이 책에도 자주 인용되고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유명한 마이클 샌델을 비롯해 능력주의를 비판하는 학자들이 가장 많이 지적하는 점이다.
하지만 알퍼트는 이런 비판적인 사람들조차 그 이론적 근본에서까지 ‘위대함’을 떨쳐내지는 못했다고 생각한다. 현대의 능력주의는 개인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자유주의에 기반을 두는 경향이 강하다. 그에 따라 비판자들은 능력주의 비판에서 자유주의 비판으로 옮겨 가며 반자유주의적 성향을 띠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 반자유주의는 대체로 고전적인 귀족주의나 엘리트주의로 이행하기가 매우 쉽다.
바꿔 말하면, 자유주의가 주장하는 시장 속 무한 경쟁은 영역과 규모를 가리지 않는 승자 독식을 허용한다. 일테면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미래에도 돈을 더 많이 벌고(금융 상품 투자에서 발생하는 격차) 잘생겨지고(성형수술) 인기도 많으며(플렉스로 인플루언서 되기) 착한 데다가(쪼들릴 일이 없음) 건강하게 오래 살기까지(각종 건강관리 서비스 구매) 한다. 그래서 반자유주의자들은 이런 영역을 명확하게 구별해, 각 분야에서 노력하는 것은 존중해 주되 한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쉽게 넘어갈 수 없도록 사회 분위기를 조성하거나 제도를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알퍼트가 보기에 이런 발상은 각 영역에서의 ‘위대함’을 여전히 부추기고 그 영역 안에서 격차를 인정한다는 점에서 능력주의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한다.
이렇게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회를 만들면,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어그러진다. 어쩌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할, 사회가 정한 암묵적 기준에 따르는 상대평가의 늪에 집단적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바라볼 때 ‘저 사람은 나보다 어떤 점에서 위대한가’ 또는 ‘어떤 점에서 위대하지 않은가’를 일단 평가한다. 이후 더 위대한 사람은 우러르거나 시기 질투하고, 덜 위대한 사람은 불쌍하게 여기거나 깔본다. 어느 쪽도 우리를 흡족하게 할 만한 진실된 인간관계는 아니다.
이런 종류의 관계는 동시에 자신을 끊임없이 돌아보게 만드는데, 보통은 ‘나는 왜 위대하지 못할까’에 초점을 맞추게 될 것이다. 두 관계 중 어느 쪽이든 내 부족함이 드러나고, ‘위대함’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능력주의와 상대평가에 맞서는 ‘충분함’의 무기는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가치를 상대화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어떤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어떻게 발견되고 인정받게 됐는지, 능력을 발휘할 좋은 기회는 어떻게 얻었는지, 그 과정에서 누가 도움을 주었는지 등등을 면밀히 살펴야 한다. 그러면 그 능력을 지닌 사람의 노(오)력에만 공을 돌릴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어떤 사람을 ‘위대하다’고 믿게 만드는 이런저런 잣대들은 그다지 견고하지 않고, 아주 빠르게 바뀌기도 한다. 그런 덧없는 것들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데 시간을 낭비하기에,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너무도 짧다. (덧붙이자면, 알퍼트는 이 주장을 하기 위해 고사성어 새옹지마에 얽힌 이야기를 길게 풀어놓는데, 아마도 동아시아 문화에 익숙지 않은 영어권 독자들을 위해서 그런 것 같다.)
개인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이어서, 알퍼트는 정치 경제 사회 체제에 관한 논의로 넘어간다. ‘위대함’ 체제의 결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너무 적은 사람이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가져가는 현상이다. 여기에서 능력주의 문제가 다시 부각되고, 그에 더해 부의 재분배 문제가 다뤄진다. 한 사람(예를 들어 빌 게이츠)이 어지간한 국가의 국내총생산보다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는 현실은, 그 사람이 그럴 만한 능력과 그에 따른 자격을 갖췄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 사회가 능력이나 자격과 관계없이 부의 집중을 허용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이런 집중은 다른 사람이 ‘충분한’ 삶을 누리는 데, 즉 불완전함에서 파생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자원을 쓰는 것을 방해하고, 그 문제를 그 사람의 삶에 그대로 내버려두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이런 결과가 나오도록 방치할 것인가, 다른 사람의 삶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인가. ‘충분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되묻는 지점이다.
다른 한 가지 결과는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얻기 위해 모든 사람이 자신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고 달려 나가는 상황이다. 어떤 사회든 상대적으로 많은 자원을 얻는 방법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으며, ‘지나치게 많은’ 자원을 얻는 길은 훨씬 더 좁다. 이를테면, 이과 수능을 잘 봐서 의대에 간다든가, 멋진 외모와 춤솜씨로 톱티어 아이돌이 된다든가 하는 것. 자원을 위해 경쟁하는 사회에서는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지 못한 채 그 좁은 길로 사람들이 몰려가게 마련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실제 자기가 지닌 잠재적 능력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한 채 평생을 살게 될 수도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능력이 있어도 그에 걸맞은 적절한 기회를 얻지 못한다. 이 책에 나오는 표현을 빌리면, “능력은 언제나 기회보다 많다.” 알퍼트는 이런 비극이 각 개인들에게 손해일 뿐 아니라 사회 전체에도 손해라고 주장한다. 그 능력이 기회를 얻어 우리 삶을 개선하는 데 쓰일 수 있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충분한’ 상태를 누릴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위대함’을 추구하는 삶의 방식은 개인과 사회뿐 아니라 자연까지 망가뜨린다. ‘위대함’을 추구하며 자원을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은 자연을 이용하는 일을 수반하기에, ‘지나치게 많은’ 자원의 소유는 자연을 착취하면서 이뤄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라고 쓰고, 한국을 포함한 제1세계 자본주의 선진국 시민이라고 읽는다)가 누리는 삶을 지속하기에 지구는 ‘충분하지’ 않다. 그 증거는 차고 넘치며, 기후 위기라는 현실로 우리 눈앞에 와 있다.
이 문제를 단박에 해결해 줄 혁신적인 기술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없다. 연구 중이라는 몇몇 프로젝트도 나름의 한계를 갖고 있다. 게다가 역사적으로, 과학 기술의 발전이 자연을 덜 착취하도록 이끌었다는 증거도 없다. 이에 관한 알퍼트의 논의를 단순하게 요약하자면 이렇다. 과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특정 상품 단위를 생산하는 데 들어가는 천연 자원 사용량은 줄어들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상품 사용량의 증가가 그 감소분을 언제나 상쇄해 왔다. 그뿐 아니라 그 상품을 만들기 위한 여건이 되는 다른 설비나 기술은 상품 사용량의 증가에 따라 훨씬 더 많은 천연자원을 사용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기후 위기 해결을 과학 기술 발전에 기대는 것은 적어도 지금까지 인류의 역사적 경험에 비춰봤을 때, 아주 좋게 표현해도 지나치게 낙관적인 관점이라는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충분한’ 수준으로 우리 삶의 질을 약간 떨어뜨리면서 자연을 덜 착취해야 한다. 동시에 자연을 덜 착취하는 방식으로 ‘충분한’ 수준의 삶의 질을 다른 나라의 시민들에게 보장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어쩌면 인류는 머지않은 미래에 더는 지구에서 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알퍼트의 결론이다.
이렇듯 ‘충분함’은 개인적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지구적 맥락에서 약간씩 모습을 달리하며 우리 삶 전체를 규정하는 단어로 기능할 수 있다고 알퍼트는 주장한다. 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래서 어떤 가치가 얼마만큼, 어느 정도면 충분하다는 것인가. 독자로서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원했지만, 그 답은 명확하지 않다. 어쩌면 이 책이 철학책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는 철학이 아닌 다른 학문, 일테면 경제학이나 공학의 영역일 테니까.
다만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충분함’을 더 분석해 본다면, 두 가지 의미를 건질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철학적인 의미까지 포함한) ‘충분한’ 다원주의다. 인간에게 소중한 것은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다. 내가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그걸 해결하는 데 필요한 가치를 앞세우고, 그 가치에 따라 내 행동을 결정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긴다. 문제는 해결될 수도 있고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 해결이 되든 안 되든, 그게 내 행동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이 인간의 삶이 지니고 있는 근본적인 불확실성이다. 이 불확실성 앞에서는, 한 가지 가치에만 따르며 내 행동을 결정하면 해결이나 성공보다는 실패 가능성이 더욱더 커진다. 그러니 ‘충분한’ 삶을 살고자 결심한 사람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삶을 위해 “달걀을 여러 바구니에 담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실천의 감각이다. 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인 것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도덕적 선택 상황에 대답은 법전이나 제품 사용 설명서에 써 있는 것처럼 단일하지 않다. 하지만 비슷한 유형의 상황을 여러 번 접해 보면 그리고 여러 번 접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들어보면, 멀쩡한 인간으로서 적절한 선택은 대개 몇 가지(때로는 한 가지)로 수렴한다. 알퍼트에게는 비판의 대상이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그 수렴하는 선택지는 ‘적절하다(중용).’ ‘적절함’이라는 말은 ‘충분함’만큼이나 모호하지만, 핵심은 나를 포함해 사회 전체가 그 적절함에 대한 감각을 갖고 있으며, 또 그 적절함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적어도 이 책에서 설명하는 것과 같은 ‘충분한’ 삶을 향한 열망이 사람들에게 있다면 말이다.
그리고 그런 ‘충분한’ 삶을 ‘충분히’ 많은 사람이 누리기 위해서 이 책에서 제안하는 여러 제도가(당장 기억나는 것으로는 대학 입학자나 국회의원 선거에 추첨제 적용이라든가, 우리나라에서도 이제 널리 알려진 보편적 기본소득 같은 것들), 최소한 학술적인 영역에서는 이런 책에서 인용될 만큼 한번쯤 진지하게 다룬 적이 있다는 것도 덧붙이면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