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를 기다린다
우리는 헤어졌다. 너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여전히 너를 사랑하고 있다.
우리의 첫 만남은 별로 특별할 게 없었다. 놀이공원 아르바이트에서 만난 우리는 어떻게 친해졌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친해지게 되었고, 그 누구보다도 유독 친하게 지냈던 것 같다. 나에게 너의 첫인상은 그저 키가 많이 작고, 통통하고, 중국어를 잘 하는 그런 아이. 딱 그렇게 느껴졌다. 따로 연락을 하는 일도 따로 만나는 일도 없었다. 그 당시에는 나에게 다른 여자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었겠지. 그 당시에 우리가 일을 했던 업장에는 직원이 따로 배정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에 11개월 차였던 나는 가장 선임 중 하나였다. 그래서 출근 스케줄, 전달사항 같은 다른 일들도 맡아서 하고 있었다. 나는 유럽여행을 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게 되었고, 내가 하던 일을 너에게 맡기기 위해 인수인계를 하며 우리는 더 많이 붙어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도 너에게는 따른 감정은 없었다. 아마도 이 시기에 우린 더 많은 장난을 치면서 더 친해지게 되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사직 날이 점점 다가왔고, 어쩌다 너도 나와 같은 날 그만두게 되었다.
우리 업장은 다른 업장에 비해 유독 사이가 좋은 업장이었다고 생각한다. 직원들도 우리 업장을 칭찬했을 정도였으니까. 우리는 꽤 자주 일을 마치고, 파티룸을 잡고 다 같이 노는 걸 좋아했었다. 그래서 우리가 사직하는 날에도 파티룸을 잡고 놀기로 하면서 원래는 파티룸을 예약하고, 예산을 짜는 일을 내가 해야 하는 게 맞지만 귀차니즘이 심했던 나는 너에게 맡겼고, 너는 꼼꼼히 잘 했던 걸로 기억한다.
견과류와 과일 알레르기가 있던 너는 안주로 딱히 먹을게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파티룸에서 너와 나는 안주를 같이 준비하고 있었고, 나는 파인애플을 자르다가 무심코 너의 입에 파인애플을 넣어주었고, 너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먹었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너의 과일 알레르기를 기억했고, 그때 너의 반응이 참 귀여웠다. 아마 내가 처음으로 네가 귀엽다고 느낀 날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그 전에도 몇 번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너는 유독 애교가 많은 아이였으니까.
다음 날이 되고 다른 아이들은 모두 다시 출근을 하기 위해 지하철을 탔고, 너와 나를 포함한 다른 사직자 한 명과 휴무자 한 명, 이렇게 우린 넷은 영화나 보자면서 영화관으로 갔었다. 그때 우리가 봤던 영화가 아마 '위자'였던 걸로 기억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우리는 점심을 먹었고, 그 후에 다들 집으로 돌아갔다.
그 후로는 딱히 연락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너와 동갑이라서 친했던 아이 한 명과 우리 셋은 '주인님'과 '꼬봉' 관계라면서 따로 단톡 방을 만들어 가끔 연락을 하면서 만나자고 했지만 단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다. 3개월이 지났을 때였을까, 오랜만에 다 같이 놀러 가자며 우리는 속초여행을 계획했고, 거기에서 너와 오랜만에 만나게 되었었다. 우리는 그저 딱 그 정도의 사이였다. 간간히 다 같이 만날 때나 보는 그런 사이였다.
내가 여자 친구와 헤어진 후, 몇 개월 뒤에 너와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저 안부인사였었다. 집이 가까웠던 우리는 영화를 보거나, 밥을 먹거나, 그저 심심하고, 지루 할 때 가끔 만나기 시작했다. 점점 만나는 날이 많아지면서 네가 점점 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거 같았다. 너는 나를 좋아하기 시작했던 날이 우리 둘이서 뼈해장국을 먹었던 날, 그 날부터 갑자기 나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 같다고 했다. 사실 나는 너에게 말하지 않았었지만, 그전부터 네가 마음에 있었다. 너와 '제 5 침공'을 볼 때, 옆에 앉아있는 너를 보니까 느낌이 참 이상하더라. '내가 지금 얘를 좋아하나?' 이런 생각을 혼자 속으로만 했었다.
하지만 나는 두려워서 너를 밀어내려고 했었다. 더 마음이 커지기 전에, 괜히 툭툭 못된 말들을 했었다. 내가 너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을지가 두려웠다. 전 여자 친구를 아직 잊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을 너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너와 이대로 지내는 것도 좋았기 때문에, 하지만 시간이 지나 너는 먼저 나에게 너의 마음을 이야기했고, 나는 고민을 하며 하루가 지났다. 너와 멀어지기 싫었고, 너를 놓치면 후회하게 될 거란 생각이 커지게 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연애는 시작되었다. 나의 직업 때문에 우리는 자주 만날 수도 없었고, 쉬는 날이 딱히 정해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약속을 정해놓을 수도 없었다. 항상 일이 새벽에 끝나던 나는 일찍 끝난 하루 너의 아르바이트 장소에 찾아가서 너에게 사탕과 젤리를 주러 갔었다. 나는 이런 깜짝 방문을 항상 해보고 싶어 했다. 그때가 아마 우리가 사귀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만난 날이었다. 너는 나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의 감정을 잊을 수가 없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저 나에게 있어 너는 좋은 동생이었는데, 지금은 연인이라니... 신기하면서도 좋았었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이었다.
너는 나에게 참 특별한 사람이었다. 사실 너의 전 연애사를 들었을 때는 솔직히 좀 많이 걱정이 되었었다. 너와 나는 서로에게 3번째 연애 상대였었고 나는 한번 연애를 하면 1년은 넘게 가는 사람이었고 너는 100일도 못 가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걱정이 되었다. 우리가 과연 오래 만날 수 있을지.
걱정과는 다르게 우리는 생각보다 잘 맞는 성격이었나 보다. 너로 인해서 나는 정말 많이 웃었던 것 같다. 원래 웃음이 많던 '나'로 다시 돌아갔었다. 너의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귀여웠다. 애교를 부릴 때, 투정을 부릴 때, 밥을 먹을 때,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 잠들어 있을 때, 평상시에도 항상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후회하는 게 몇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후회되는 일은 네가 나를 보고 싶어서 내 자취방으로 버스를 타고 찾아왔고, 밤에 집에 돌아갈 때, 내가 차로 집까지 태워줄 수 있었는데도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로 너를 다시 버스를 태워서 집으로 보냈던 일. 너는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기 위해서는 한 시간도 넘게 걸리고, 버스도 갈아타야 했는데 나는 너를 집까지 바래다주지 않았다. 네가 내심 실망하는 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래도 너는 내가 피곤하다고 하니까 조르지도 않고, 버스를 타고 돌아갔다. 너는 그렇게 나를 배려해주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사소한 다툼도 없이 잘 지냈다. 아마 지금도 잘 지낼 수 있었겠지. 내가 외국으로 나오지 않았다면... 처음 외국으로 나오라는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을 때 상당히 많은 고민이 되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너였었다. 하지만 나는 많은 경험을 해보고 싶었고 나는 더 생각을 한 뒤 결국 가기로 마음을 먹고 너에게 이야기했다. 그 날부터 너는 참 많이 울었다. 그날 밤 너를 만났을 때 마음이 너무 아팠다. 너를 두고 갈 자신이 없었다. 너에게 기다려달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또 고민을 했다. 내가 계속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너는 자기 때문에 나에게 온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는 일을 날려버리지 않길 바란다며, 나를 우선으로 생각하라고 했다. 나를 제일 보내기 싫었던 사람은 너였을텐데, 그래도 너는 나를 배려해주었다. 기다릴 자신은 없지만 노력해보겠다며, 그렇게 나를 우선으로 생각하라던 너는 나를 먼저 생각해주었던 거 같다.
그렇게 장거리에 자신이 없다는 너와 너에게 기다려 달라고 말 못 하는 나의 장거리 연애가 시작이 되었다. 일 년만 있다가 돌아가기로 했기에 일 년만 버텨보자는 의지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내가 떠난 날부터 너는 참 많이 힘들어했다. 유독 외로움을 많이 느끼던 너는 병원을 다녀야 하는 정도로 힘들어했었다. 나는 너에게 많이 미안했고,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또 미안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 더 오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에 너는 더 힘들어했을 텐데, 그 당시의 나는 그저 일이 편하고, 돈을 많이 벌고, 너는 기다려주겠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보다. 솔직히 일 년으로는 자신이 없었다. 과연 내가 이곳에서 일 년만 있는다고 해서 한국에 돌아갔을 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딱히 없었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있는 것을 더 고민했을지도 모른다.
12월에 휴가가 꽤나 길게 있다는 말을 듣고 전 세계 디즈니를 간다는 목표가 있던 나는 미국으로 휴가를 가기로 생각했다. 그래서 너에게도 미국으로 올 수 있냐는 말을 했고 함께 가기로 약속을 하였다. 우리는 일주일 동안 무엇을 할지 어디를 갈지 이야기하며 같이 계획을 짜고 그때 만나게 될 날을 상상하면 행복했다. 나는 중남미에서 미국으로 너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우리는 그렇게 미국에서 만나게 될 날을 기다리며 잘 견디고 있었다. 아니 견디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 달을 채 남겨두지 않은 상황에서 우리는 이별을 맞게 되었다. 미국에서 나를 만나면 너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거 같다고 너무 힘들다며 나에게 미안해하며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했다. 미국에서 모든 일정을 예약해 둔 나는 너를 붙잡았다. 그래도 환불이 안되는데 막상 보면 달라질 거라며 괜찮아질 거라고 미국 갈 때까지만 버텨보자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이기적이었다. 힘들어하는 너를 생각하기보다는 힘들어하게 될 나를 먼저 생각했었던 거 같다.
너는 많이 고민을 하고 미국을 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다음날이 되어 너는 도저히 안 되겠다며 비행기표를 취소했다고 나에게 말을 했다. 한국에서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는 말과 잠시 쉬는 거라 생각하자는 말을 하며, 하지만 나는 이기적이게 너를 또 붙잡았고, 너는 이번에는 잡혀주지 않았다.
미국에 혼자서라도 갈려고 생각을 했다가 혼자 가면 네 생각에 더 힘들어하게 될 거 같아 환불도 되지 않는 티켓들을 모두 버리고 이번 휴가를 한국으로 일정을 변경했다. 혹시라도 하루쯤 한 번쯤 너를 볼 수 있지 않을까란 생각에 내린 결정이었다.
2주 정도의 시간이 흘러 너에게 연락을 했다. 이번에 한국에 들어가는데 볼 수 있는 거냐며, 하지만 너는 나의 이기적임에 나에게 너무 실망하였고, 지금은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시간이 지나 서로 괜찮아지면 그때 밥이나 한번 먹자는 말과 함께.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너에게 참 둔했었다. 가끔씩 너와 주고받았던 카톡들을 다시 보게 되면 이때 너는 이런 감정으로 보냈었을 텐데 나는 어뚱 한 대답을 했던 게 보인다. 이건 참 고쳐지기 쉽지 않은 것 같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나는 너를 생각하고 네가 우선이라고, 여겼지만 막상 되돌아보면 나는 항상 내가 먼저였고, 내가 우선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더 후회하고, 나를 더 자책하는가 보다. 너에게 오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던 말을 하지 말걸 이란, 후회가 들기도 한다. 아마 내가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면, 너는 일 년만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하며, 우린 아직도 잘 버티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마 내가 이곳으로 오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우리의 관계는 이미 도화선에 불이 붙은 다이너마이트 같은 상황이었을지 모른다. 단지 그 도화선의 길이와 불꽃에 의해 타들어가는 속도를 몰랐을 뿐. 아니 어쩌면 도화선의 길이와 타들어가는 속도는 나에게 달려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길이가 길어질 수도 짧아질 수도 있고 빨리 타들어갈 수도 느리게 타들어갈 수도 있었던 게 아닐까? 결국 나는 그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는 걸 막지 못했다. 내 부족함때문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너를 기다려보려고 한다. 앞으로 얼마의 시간이 지나 우리가 얼굴을 보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한번 기다려보고 싶다. 아마 일 년은 더 여기에 있어야 할거 같으니, 일 년 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너를 다시 만나고 싶다. 너에게 3개월의 힘든 시간을 안겨주었으니, 이제 내가 그 벌을 받는 시기라고 생각이 든다. 잠시 쉬는 거라고 생각하고 싶다.
새로운 다이너마이트를 가지고, 타들어 가지 않는 도화선을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하려 한다.
너는 봄에 따뜻하게 나에게 왔고, 겨울에 차갑게 떠나갔다.
하지만 다시 봄은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