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서 May 12. 2017

난쏘공-우리는 모두 난쟁이였다

1.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하 난쏘공)을 처음 읽은 건 중학교 2학년 하순의 초여름이었다.

책의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완주한 후, '이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구나'했다.

상징과 도식을 이해하기엔 15살 무렵의 나는 너무 어렸다. 



2.성인이 된 이후, 나는 비정규직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되었다.

내가 살고 있는 나라는 어느새 '헬조선'이라는 멸칭으로 불리기 시작했고, 그 말을 쓰는 건
다름아닌 20대, 내 또래 청년들이었다.

나도 열정페이를 받고 근무해본 경험이 있다. 단기간이었지만, 같은 공간에 있어도 엄연히

정직원인 그들과 학생 신분인 나는 신분이 달랐다. 그들만의 리그가 있었고, 공통된 대화나

동료라는 유대가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그 반열에 합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곳의 원장이 내세우는 논리도 비슷했다, '경험 쌓는 셈 치고, 무상으로 봉사해달라'


그들은 나에게 무임금으로 자원봉사할 것을 요구할 권리가 없다. 나 또한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사리분별에 능하지 못했고, 나는 약 두 달 가량 그곳에서 일했다. 노동연대의 표현을 빌리자면

'착취당했다'가 보다 적합한 표현일 것이다. 노동에 따른 그 어떠한 보상도 없었으니까.


3.그곳에서의 경험이 나를 노동문제에 귀 기울이게 만들었다. 그 일이 있은 직후, 나는 고공단식농성이라던가.

복직시위등에 관심을 갖고 찾아봤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근로자의 역사는 슬픔과 그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을.

기흥에 위치한 삼성반도체 공장에서 1년 8개월 간 일한 황유미 외 그녀의 직장동료 이숙영 씨가 백혈병 진단을 받고 숨졌고, 실제로 작업환경에서 백혈병 유발 물질인 벤젠, 포름알데히드, 전리방사선이 검출되었으며,

폐암유발물질인 비소도 다량 발생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반도체 산업 외에 전자산업 분야(tv, 스마트폰, LCD)도 마찬가지였고, LG전자, 하이닉스 등

비삼성 계열사의 공장에서도 다량의 산재피해자가 속출했다.


우리의 일상에서 필수품이 된 스마트폰과 전자기기가 누군가의 목숨을 담보로 만들어진 거라는 사실이

꺼림칙하고 안타깝다. 이런 불편한 진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소비자들은 제품의 소비를 멈추지 않는다.


4. 다시, 난쟁이라는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보자. 난쟁이 김불이 씨는 선천적으로 신장이 작고 왜소해

제대로된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또한 그의 친부와 고조부, 증조부 모두 노비 출신이었다.

그들은 자본을 손에 쥐어본 적도 없었고, 설령 수중에 들어온다 해도 자본을 사용할 방법을 몰랐을 것이다.

시대가 변해도 가난은 그렇게 대물림된다. 김불이 씨의 아들 영수는 그럼 자신들의 선조도 대대로 왜소한

체구를 물려받은 것이냐고 묻는다. 영수는 답한다. 우리들의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도 모두 난쟁이였다고.

선천적인 신체의 기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에도 우리는 영수의 대답을 이해한다.

영수의 대답은 결국 자신의 가족이 시대가 흘러도 변치 않는 최하위계층임을 자조하는 것임을.


5.우리들의 난쟁이 김불이 씨는 저기 머나먼 이상향(달)로 홀로 외로이 떠나버렸다. 

이승에서의 삶이 너무 고되고 견디기 힘들었던 그는 자신처럼 신체적, 사회적 약자도 행복할 수 있고

보통의 사람들처럼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꾸었다. 그는 처음부터 이상주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현실주의자에 가까웠으나 세상이 그런 그를 변화시켰다. 세상이 그를 이상주의자로 만들었다.


6.난쟁이의 이야기가 비단 소설 속 김불이 가족의 이야기일까. 중산계층을 상징하는 순애는 그에게

연민과 동질감을 느낀다. 먹고사는 데에 지장은 없지만 틈만나면 수도가 터지고, 뇌물수수 밖에는 큰 소득이 없는 남편의 아내로 사는 순애는 자신도 난쟁이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약자라는 교집합을 찾은 것이다. 따라서 철저히 타인인 김불이 씨를 위해 그를 위협하고 해코지하는 수도기사에게 칼을 휘둘러 김불이 씨를 구해낸 순애의 행동은 충분히 납득가능하다.


7.마지막, 가장 간단하고도 복잡한 주제로 넘어가보자. '뫼비우스의 띠' ,

난쏘공 서사의 극초반에 등장한 수학교사는 학생들에게 말한다. 똑같은 굴뚝에 들어간 두 사람 중

얼룩 없이 깨끗한 상태로 돌아온 건 누구일까.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제가 틀렸기 때문이다.

수학교사는 합일을 말하고 싶었다. 그가 해임당하면서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자 했던 진리는 '우리는 

모두 다르지 않다'는 절대불변의 진리이다.


8.같은 이유로 꼽추와 앉은뱅이의 서사도 해석이 가능하다. 꼽추와 앉은뱅이는 자신들을 학대하고

착취하고 폭행하는 사장에게 보복하기 위해 그를 차량에 밧줄로 결박한 채, 차량에 불을 질러 그를 살해한다.

'살인은 나쁘다'는 윤리의식을 말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여기선 그보다 더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사항이 있다. '죽음'이라는 극단적인 삶의 속성을 통해 자본가인 사장과 노동자인 꼽추, 앉은뱅이는 동일선상에 선다.

영원히 통일될 수 없을 것 같던 두 양극단의 삶이 죽음이라는 끝에서야 비로소 합일을 이룬 것이다.


내가 아는 사람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인간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건 죽음 뿐'이라고 말이다.

죽는 순간엔 그 사람이 그동안 어떤 삶을 살아왔건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 그 자체로 존재의 일생을 

소멸시키는 죽음의 특성 상, 우리는 양질의, 부귀와 호사를 누려왔던 사장이 비참하고 짓밟히는 삶을 

살아 온 꼽추들과 다를 바가 없음을 깨닫는 것이다. 한 줌의 재도 안 될 만큼 화멸한 그 현장 앞에서,

꼽추와 앉은뱅이는 그제야 자유와 해방의 공기를 마신다.

그 마저도 현실의 벽 앞에 오래 가지는 못하지만 말이다.


9. 그렇다면 우리에게 긍정적인 합일점은 없는 것일까. 우리에게 남겨진 과제는 양립하기만 할 뿐,

결코 통일될 수 없는 자본가와 노동자의 권력구조를, 그 구조적 문제를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해결할 방법을 찾는 것이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어렵기에 지금도 노동권과 생존권은 식지 않을 화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