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ssel Belgium
호텔에 초콜릿을 두고 왔다. 그냥 초콜릿이 아니었다. 벨기에 안트워프(Antwerpen)에 있는 초콜릿 네이션 (Chocolate Nation)을 방문한 기념으로 거금을 들여 산 초콜릿이었다. 초콜릿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는 아직 맛도 보지 않았다. 남편과 아이만 아끼느라 두세 개씩 맛본 뒤 녹지 않게 호텔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또 너무 잘 둔 탓에 그걸 놓고 왔다.
"가서 가져올까?"
공항 철도 안, 창가 한적한 자리에 앉은 남편이 말했다.
보통은 여행의 일분일초가 아까워 여유 있게 공항에 가지 않는다. 비행기 시간이 빠듯하게 체크아웃을 하거나, 짐을 맡기고 천천히 시내를 구경하다 공항 열차를 탄다. 하지만 그날은 일정이 유별났다. 비행시간이 오후 다섯 시경이었기에 레이트 체크아웃을 신청해 마지막까지 호텔에 머물렀다.
오후 2시. 짐을 맡기고 관광할까 하다가 후드득 떨어지는 빗방울에 그나마의 의욕도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일찌감치 공항에 가 라운지나 즐기자며 나온 길이었다.
호텔로 다시 돌아가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에이, 초콜릿 가지러 왔던 길을 돌아간다고? 말이 돼?"
난 내키지 않았지만, 남편은 아직 몇 개 까먹지도 못한 초콜릿이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나만 얼른 쓱 가서 가져오면 되잖아."
"아니, 그럼 나 혼자서 케리어 두 개에 아이를 보고 있으라고? 공항에서?"
라운지 카드도 남편이름으로 발급했다. 가 있을만한 곳이 없다.
아무래도 막막한 기분이 들어 결국 호텔로 가고 싶어 들썩들썩하는 남편을 막아냈다.
여행 중 무언가 두고 왔을 때, 다시 돌아가서 가져올 만큼 간절한 건 어떤 게 있을까?
언젠가 호텔 방 밖에 말려둔 빨래들을 몽땅 두고 온 적이 있었다. 다시 한번 확인한다고 방과 화장실을 다 둘러봤는데, 방 밖 베란다까지는 생각을 못했다. 남편과 빨랫대에 뭐가 남아있었나 하나하나 곱씹었다. 실내에서 입던 목이 늘어난 티셔츠, 수영복 하나, 아이 바지 두어 벌. 다 합하면 가격으로 얼마나 될까를 계산했다. 그러다 그냥 가던 길을 계속 가기로 했다.
'이번에도 그런 추억을 하나 추가했군' 싶었다.
공항으로 가는 창밖을 내다보며, '과연 되돌아가게 만들 만큼' 가치 있는 게 뭐일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이어갔다. 귀금속이라면? 아니지, 여행에 그런 비싼 걸 들고 갈 이유가 없다. 휴대폰? 요즘은 대부분의 결제조차도 핸드폰으로 한다. 아마 공항 열차를 타기 위해 티켓을 구매하다가 발견했을 것이다. 멀리 가기 전에 돌아가 가져오게 되지 않을까 싶다.
아! 아무래도 없구나.
물건을 가지러 돌아갈 만한 것은.
가치와 거리의 상관관계를 곱씹는다. 여행에서 시간과 체력은 평소보다 몇 배나 중요하다. 그만큼 그 기준이 훨씬 까다로워진다. 그걸 허비하게 만들 만큼 귀한 물건은 아마 없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생각이 결론에 다다를 즈음 막 기차가 공항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주섬 주섬 짐을 챙기려는데, 바로 그때.
늘 여권을 담아두던 가방의 주머니가 텅 빈 걸 발견했다. 어머! 여권이 없다.
도둑맞았나?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렴풋이 호텔에 체크인하던 밤이 기억났다. 여행을 다니다 보면, 굳이 나눠 적지 않아도 남편과 나의 역할이 어느 정도 분담된다. 그중에서 여권은 내 담당이었다. 늘 내가 챙긴다. 그런데 하필 그날따라 남편이 내 가방에서 여권을 꺼내 금고에 넣었고, 난 그걸 지켜만 봤었다.
그리고는 체크아웃하는 당일, 남편도 나도 보통 하던 일이 아니라 까맣게 잊어버렸다.
세상에. 여권을 두고 오다니!
결국 공항에 짐 두 개와 아이, 그리고 나만 덩그러니 남았다.
둘이 서 기차를 향해 서둘러 뛰어가는 남편의 뒷모습을 멍 하게 봤다.
호텔에 전화해서 방을 청소했는지 확인하며 바쁘게 뛰어가는 중이다. 그런데, 그런 녀석의 뒷모습이 아주 조금은 신나 보였다.
'설마.... 설마 초콜릿 챙겨 올 생각에 그런 건 아니겠지?'
다행히 공항 구석에 놀이터를 찾았다. 놀이터라고 해봐야 알록달록하게 만든 러버덕 (Rubber duck) 모형 두 개였지만, 아이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오리를 타고 내리며 놀았다.
그리고 30분쯤 지나 남편에게 문자가 왔다.
"호텔 도착해서 여권 찾았어! 금방 갈게."
곧바로 뒤이어 문자 하나가 더 왔다.
"근데 초콜릿은 벌써 청소하면서 버렸데"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문자였다.
아무래도 녀석에게 초콜릿은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금 더 많이 가치 있는 물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결혼 후 8년, 남편을 꽤나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타인의 의미나 가치를 내 기준으로 판단하는 건 가당치도 않구나.
https://maps.app.goo.gl/XneTc1ecZKz4cJgB8
초콜릿을 만드는 과정을 2D, 3D를 이용해 참여형으로 설명해 두었다. 과학자가 꿈이라는 우리 딸은 그 과정이 재밌어서 '유럽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정 중 하나'로 이곳을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