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영국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NOLA Aug 15. 2022

코로나와 똑단발

출국 전날 코로나 양성이라니…

 그리스 여행에서 돌아와 좋았던 기억들을 정리하면서도 두근두근한 설렘이 있었다. 코로나라는 역병으로 인해 2년 전 한국 방문 비행기 티켓이 나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비행사에 의해 취소되었었다. 코로나가 엄청 창궐할 때라 온 세상이 멈춰있었기 때문에 불만을 말하기도 어려웠다. 그렇게 다음 기회를 기다릴 수 없었다. 드디어 올여름 7월 표를 미리 예매했었다. 그리스를 가기도 전부터 예매되었던 한국행 비행기 티켓 덕분에 꽤 오랫동안 설레고 즐거웠다. 그리스를 여행하면서도 다른 일들을 하면서도 한국행을 생각하면 살짝 미소가 지어졌다. 물론 다른 유럽을 여행하는 것에 비해 한국행은 너무 챙길 것도 많고 번거로워 불만 아닌 불만도 있었지만 한국 음식 먹을 기대에 마냥 좋았다.


 그리스에서 돌아와 가족 모두 건강하게 한동안 지낸 후 드디어 한국 갈 날이 코앞으로 다가왔고 출국 24시간 전에 코로나 검사를 받아 내야 했다. 거의 2주 가까이 컨디션이 좋았기 때문에 검사 전날 약간 열이 오르면서 싸한 느낌이 없진 않았지만 코로나 양성이 나올지는 정말 몰랐다. 1시간 이내에 나온다던 결과는 예상보다 일찍 15분 만에 나왔다. 나의 양성 반응에 슬프지도 않았고 어이없이 놀랍지도 않았고 속상하지도 않았다. ㅠㅠ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영국이 코로나가 더 심각했을 때도 코로나에 걸리지 않고 너무 잘 버텨왔는데 하필이면 왜 이 순간이어야 했을까? 어이가 없었다. ㅠㅠ


 우리 가족들은 어이없음에서 비롯된 웃음을 피식 웃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아들은 워낙 여행 이후에 쉬고 싶다고 했던 터라 은근히 즐거워했고 한국 못 간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던 딸도 큭큭 웃었다. 남편은 돌아오자마자 항공사와 통화를 했으나 우리 뜻대로 8월 이내로는 표를 구할 수 없었고 결국 12월로 날짜를 옮겼다. 그 외 건강검진과 숙소 등 모든 것을 차근차근 취소하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나의 뜻대로, 내 맘대로 무언가를 계획하고 그 계획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는데도 한국 방문이 이렇게 연기된다는 사실이 전에 없던 무기력감을 가져다주었다. 그냥 우리의 한국 방문은 그대로 12월로 연기된 거고 어찌 보면 별 다를 바 없이 그냥 날짜만 변경된 거라고 볼 수 있다. 근데 왠지 그냥 모든 것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지금 못 가니 의미 없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남편은 다행히 많이 아프지 않고 괜찮은 상태이니 빨리 회복하고 한국 방문 예정이었던 기간 동안 다른 곳으로 바람 쏘이러 가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분위기를 빠르게 바꿔주려고 노력하는 남편의 노력이 고마웠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한국 가서 방문하려고 했던 미용실도 못 가게 돼서 부랴부랴 다니던 미용실에 예약을 했다. 너무 많이 길어진 아들 머리를 이제는 컷을 해줘얄것 같았다. 덕분에 나도 컷을 예약했다. 머리카락이라도 잘라버리고 싶었다. 덜컥 찾아온 무기력감에 머리카락 무게도 너무 무거운 느낌이었다.

 여전히 영국의 여름은 정말 찬란할 만큼 너무 아름답다. 좋은 날씨에 기분이 좋아 머리 손질이 필요 없던 딸까지 데리고 미용실로 향했다. 미용실까지 가는 세 가지 길중에 고속도로를 빼고 예쁜 골목을 지나가는 길을 택해 창문도 열고 바람과 풍경을 즐기며 미용실에 도착했다. 사춘기를 벗어난 딸은 이제 나의 이야기를 받아주려 노력하고 있다. 엄마의 이야기가 얼마나 재미가 있겠나…? 엄마의 얘기에 반응해 주려고 하고 함께 풍경을 즐기는 딸아이의 모습에 갑자기 고마운 마음도 들었다.


 머리를 기르고 싶다는 말에 기르기 쉬우라고 펌까지 해줬는데 결국엔 맘에 들지 않다는 아들의 반응에 기운이 좀 빠지지만 고등학교 때처럼 귀밑 3cm 정도의 길이로 똑단발을 오랜만에 시도한 덕분에 기분이 상쾌했다. 뭐 미용사 언니의 칭찬은 그저 영업 기술이겠지만 그것도 기분이 좋았고 워낙 객관적인 딸도 잘 어울린다 하니 더더욱… 결국 내 맘에도 들었다. 가볍고 상쾌한 느낌이다.


 코로나 때문에 한국 방문이 연기되고 덕분에 맘이 가라앉아 아무것도 하기 싫어졌다. 그냥 무기력증에 빠져버린 느낌이다. 날씨가 너무 좋아 조깅을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백만 개인데 밤에 아무리 다짐을 하고 잠이 들어도 아침에 집 밖으로 나가지를 못한다. 글도 쓰기 싫었다. 그래서 그리스 여행기도 그저 멈춘 거고… 근데 브런치에서 자꾸 글을 쓰란다. 내가 설정해 놓은 알림이 나를 볶아댄다. 그래서 그냥 움직여본다. 이제 움직이기 시작해야 하는데… 코로나로 멈춰진 나의 마음을 혹시나 오랜만에 시도한 똑단발이 움직이게 도와줄는지 약간의 기대를 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DIPPY RETURNS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