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산어보 보고온 썰
자산어보 본 얘기를 써야지, 써야지 하다가 바빠서 계속 못 썼다. 안 바쁠 때는 처 자느라 못 썼고, 글 쓰느라 못 썼고, 술 먹느라 못 썼다. 근데 이대로 계속 방치하다간 영영 안 쓸 것 같아서 오늘은 꼭 쓰기로 함.
솔직히 영화를 보기 전부터 기대가 넘쳤다.
이준익…… 모든 커리어를 다 바쳐 증명해 온 진심의 역사 BL러…… 왕의 남자, 황산벌, 사도, 동주…… 역사 영화를 만들면 쉬이 알탕이 되고, 알탕을 로맨스 더쿠가 만들면 그렇게 아름답게 BL이 된다는 사실을 갓벽하게 만들어 온 역사 BL의 신……
친구, 군신, 부자까지 취향대로 고르세요 조선 BL의 단맛짠맛쓴맛신맛을 다 보여준 분이 이번에는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사제]에 도전하겠다는데 어떻게 안 볼 수가 있어요? 나는 설국열차에서도 길리엄X커티스 좋아했단 말이야, 사제관계 최고!
거기다가 캐스팅부터 좀 보소. <불한당>으로 애절 BL공 역할을 이미 증명한 설경구 선생님과, <미스터 선샤인>으로 헤테로 로맨스 상황에서조차 BL력을 저렇게 뽐낼 수 있다는 걸 알려주신 변요한 선생님이라고요? 이건 작정했지 작정했어. 그래서 저는 설레는 가슴 안고 영화관으로 간 것이었습니다.
* 이 아래부터 저는 스포 따위 신경 안 쓰고 씹덕질 할 것이니 스포 신경 쓰이면 보지 마셈
초반에 정약전이 자신을 서학쟁이로 몰아붙이는 창대를 보고 한숨을 쉬며 "주자는 힘이 세구나" 라고 했을 때 나는 좀 빡칠 뻔 했다. 아니, 설마 서학과 주자학을 대척점에 놓고 영화를 그린다고? 다행히 대동세상 잊지 않은 조선 BL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주자는 당연히 힘이 세다. 주자학이란 문자언어의 극단에 있다. 흑산도 구석에 처박혀서 물고기만 잡던 청년의 마음 속에서도 글자와 배움을 통해 덕의 빛이 자리해서 군자가 될 수 있다고, 그런 배움의 되먹임이 문을 닫을 필요가 없는 세상, 대동세상을 만들어 낸다.
약전, 약종, 약용은 당연히 성리학의 언어에 기초해서 서학을 받아들인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명심보감을 마르고 닳도록 읽은 시골 성리학 오타쿠 창대한테도 쉽게 받아들여진다. 모두가 군자가 되어 문을 닫을 필요가 없는 대동세상을 만들자는 성리학의 이념과,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사자가 어린 양과 뛰노는 세상을 만들자는 기독교의 이념은 연결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이 이데올로기의 핵심은 “후대로 이어짐”에 있다. 정약종은 하늘을 우러러 죽겠다고 목침에 똑바로 누워서 망나니의 칼을 받는다. (너무나 베드로 같은 장면쓰) 담담하게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이데올로그의 모습은 솔직히 사대부(라고 쓰고 성리학 오타쿠라고 읽음)들한테는 너무도 익숙한 모습 아닌지. 왜냐면 성리학도 현 세상에 무언가를 거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이데올로기를 실천해서 그 다음 세대를 완성해가는 이데올로기기 때문이다.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이 성리학과 기독교의 기초를 구성하고 있다.
얼마 전에 읽은 후지타 소죠에 따르면 이것이 바로 “이단”의 핵심이고요. 세상을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데올로기는 바로 이단이 될 수 있는 핵심적 역량을 가지고 있음. 그 건설이 나의 세대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미래로 이어질 수 있다는 교리조차도 갓-벽하게 이단임. 그런 이데올로기는 끊임없는 저항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이데올로기로서 널리 알려진 것은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가 있겠으나, 저는 주자학도 그 자리에 놓이기에 전혀 부끄럼이 없는 명백한 이단이라고 보고요. 그 속성은 사육신과 임진왜란의 수많은 의병들과 서학쟁이들과 동학농민운동과 안동 공산주의자들을 한 줄기에 놓게 해왔던 것임.
그런 이단에 기초해서도 500년을 간 왕조를 건설한 정도전X이방원이 머-단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정도전은 그야말로 장각(넹 황건적 얘기임)된 부분이 적지 않았지만은 이방원은 정치 이데올로기로서의 이단을 통치이념으로써 구조화하는 데에 대성공했다고 여겨지고…… 그것이 자산어보에서 창대라는 인물을 통해 선연하게 드러나는 것.
창대는 정말 훌륭하다. 정도전의 희망이고, 조선조의 이데올로기가 낳아야 했던 이데아 그 자체다. 안예은 노래가사에 나오는 “멀기만 한 이야기가 잡힐 듯이 가까워져 그대를 만난” 조선후기의 꿈이다. 창대가 실제로 어떤 인물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인물을 만들어 낸 것만으로 이 영화는 할 일을 이미 다 했다.
성리학의 세계에서 정치인과 문학가는 구분되지 않으며, 예술가와 모범시민은 구분되지 않는다. 오상을 내재하여 그것을 갈고 닦은 덕성이 있는 인간은 인간으로서 훌륭한 인간이며, 인간으로서 훌륭한 이는 어떤 영역에서건 인간으로서 제대로 존재한다. 인간은 도구가 되지 않으며 인간 그 자체로서 ‘전인적’이다. 분류하는 대신 그 안에서 통하는 길을 찾아내는 정치 이념이다.
그러므로 조선과 같은 미친 이데올로기 오타쿠 국가에서는 평생을 산림처사로 산 남명 조식 같은 사람도 정치의 거두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평생을 물고기만 잡고 산 창대가 왜 그런 인간이 될 수 없겠는가. 재야에 묻힌 존재라고 하더라도 조선조의 이데올로기 속에서는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사실 정말로 “힘이 센 주자”를 다루는 이야기다. 오래도록 주자를 탐구해서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까지 가 닿는 바람에, 주자학의 오타쿠 국가에게서 버림받은 인텔리겐챠가 주자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실현해서 세상을 주자의 덕으로 가득 채우고 싶은 “이데올로기적 인민”을 마주해서 그 관계 속에서 “밝은 덕성을 밝히고”, “인민을 새롭게 하고”, “선을 행하는” 길을 찾는 이야기다. (왜 대학 1회가 나오겠냐구요!)
그리고 결국은 흑산도와, 물고기와, 인민과, 사랑으로 가 닿으니, 이게 어떻게 힘이 센 주자의 이야기라고 하지 않겠어요. 이게 바로 주자학 속 우주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이일분수(理一分殊)]: 대상은 달라도 이치는 하나이니, 만물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를 ― 즉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을 말하는 것 아니겠어요.
사실 그래서 창대와 정약전이 서로 갈라지는 장면은 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뭐 등장인물 내부의 이야기로는 설득력이 있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이야기들이 그 너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아서. ‘백성과 왕의 구분이 사라진 세상’을 말하는 게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느냐고 창대는 분개하지만, 주자학이 신분제를 공고히 한 것조차 결론적으로는 ‘충’이라는 하나의 상태를 통해 ‘군자’를 만드는 것이므로 주자학의 끝에 가닿는다면 결국 그 논리 그대로 넘어서게 되는데. 그걸 정약전이 주자학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말하게 되는 게 좀 그랬어.
“왕이 없이 백성만으로 어떻게 국가가 있습니까!” 라던가, 그 말을 기초해서 성리학을 부정하는 건 너무 이상한 게, 성리학은 그 자체로 이미 백성이기 때문에. 백성이라는 존재가 이미 성리학을 기초로 한 ‘우주론’의 근원 아니겠음?
최근 SNS를 중심으로 ‘여성 서사’가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가 많이 있었는데, 나는 우리가 ‘남성 서사’가 뭔지는 알고 있는지 싶은 부분이 있다. 남성 서사라 하면 남성들의 ‘남성으로서의 특징’이 선연하게 드러나서, ‘남성으로서’ 실패하거나 성공하는 것들을 다루어야 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게 사회의 디폴트 값인 것처럼 여겨진 나머지 그 내용을 찬찬히 뜯어보는 경우는 오히려 많지 않은 거 아닌지.
정약전과 창대의 티키타카 러브신들은 온통 ‘남성적’인 이야기로 가득차 있다.
일단 혼자서 아무도 안 시켰는데 명심보감 읽어가며 성리학 오타쿠로 자란 창대 선생님은 남자 + 오타쿠의 나쁜 특성이라곤 하나 빼놓을 것 없이 다 가지고 있다. 어떻게든 인정받고 싶고, 자족이 불가능하며, 무언가를 공격해야 하는데, 내가 존나 판 게 하필이면 [성, 리, 학]이야! 그래서 그는 마치 씨름판에 가서도 “저런 건 힘이 센 것도 아니야, 페이트 스테이 나이트에 세이버라는 캐릭터가 있는데 걔가 얼터로 변하면 어쩌구” 하는 바람에 친구 따위 없게 되어버린 달빠처럼(문재인 지지자 아닙니다), 친구 없는 삶을 살아간다…….
어딜 되지도 않게 엄마한테 삼종지도 어쩌구 해 가며 “아부지도 없으니 내가 엄마 지아비나 마찬가진데” 같은 쌉소리를 해 제끼고, 죽마고우에겐 “붕우로 삼기엔 너무 무식하다”며 개지랄을 떨고, 세금을 빡시게 매기는 까막눈 목사한테 가서는(아무리 흑산도라고 해도 조선 같은 나라에 까막눈 목사 가능한가? 모르겠지만) “명심보감에 따르면~” 어쩌구 훈수질을 해서 비오는 날 개처맞고 깜빵도 간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드디어 이 깡촌 마을에! 라프텔 구독 같은 건 상상도 못 하고 텔레비전도 없어서 겁나 처 느린 랜선으로 하루 꼬박 걸려서 애니 1편씩 간신히 받아보고 받은 애니는 1쿨 10번씩 정주행 재탕하던 이 고통의 시절에! 덕친이 찾아온 것이야요!!! 근데 이 덕친이 사약 캐해 빨다가 오피셜 제재당했네? 오덕질 영구정지네? 아니 싯팔…… 간신히 만난 덕친이 이 판 공식 인정 영정러라뇨?!
한 번 오피셜 굿즈는 눈으로 본 적조차 없는, 거기다 운도 없는 창대 선생님은 오피셜 영정러에게 너 같은 놈이랑은 안 논다고 쌍욕을 박음. 그래요, 창대 분은 10대니까 그럴 수도 있지. 자, 그렇다면 나이 처먹을 대로 처먹어서 신념맨 짓 할 만큼 다 하고 귀양 온 오피셜 영정러는 여기에서 어떻게 너그러운…… 덕성을 보여주는가? 그럴 리가 있나요 (배우가 설경구란 점을 다시 한번 이 타이밍에서 기억해 본다)
그 다음 씬에서 달 보면서 선비처럼 술처먹던 정약전은 개빡침 + 자기연민으로 바다 가서 미친짓하다가 빠져 뒤질 뻔하고 창대 선생님이 멋진 피지컬로 덕친 부정기의 친구를 구해 내 옴. 이 둘의 관계는 앞으로도 계속 이런 느낌인데, 연대는 오로지 티키타카와 경쟁으로 기능하며, 경쟁 속에서 정말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확인하고 찾아감. 내려놓고 이해하는 게 아니라, 싸우는 과정 속에서만 이해가 깊어짐. 분명한 목표가 없이 대화를 진행하지 못하고, 목표를 함께 달성해나가면서 서로를 신뢰하게 됨.
네 여러분 이걸 보세요
이게 남성서사다
어휴 쯧쯧
이들의 세계는 좁고, 시야는 넓지 않음. 많은 것을 굳이 눈에 담지 않기에 어떤 면에서는 필요한 것들을 정확하게 포착한다. 목표가 없으면 엉망진창이 되어버리고, 정약전은 창대와 흑산도에서 그 ‘목표’를 찾아냈기에 어떻게든 미치지 않고 살아남았음. 하지만 초반 오타쿠 새끼의 개뻘짓에서 볼 수 있듯이, 그 목표가 없으면 남자들은 쉬이 미친다. 자신이 믿어온 덕성의 세계가 통치이념으로서 어떻게 개발살이 나 있는지 확인한 창대는 미쳤다. 주체가 가능하지 않았음. (그리고 이건 <사도>라던가 <박열>에서도 비슷하게 되풀이된 주제라고 여겨지구요, 남자 찐사랑꾼 이준익 감독님)
주자학으로 ‘정치 이념’을 가져가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정약전은 그 지적 결론으로 ‘실학적’ 물고기 도감 만들기를 이행한다. 이건 박제가 적으로 말하자면 하나의 벽(癖)이다. 돌아버린 창대가 탐관오리의 목을 조르듯(심지어 자기보다 하급자라는 게 킬포), 이 역시 하나의 벽(癖)이다. 목표를 세우는 것도 무너뜨리는 것도 ‘미침’이다.
목표를 둘러싼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사랑이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창대와 정약전의 경우, 깊이 이해했기에 깊이 증오했다. 정약전은 ‘창대가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말했고, 목표로 함께 가는 과정에서 서로에게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어 갔음. 창대는 시를 쓰고, 글을 읽고, 자신이 원했던 어떤 ‘전인적 인간’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다. 사랑의 뒷면은 당연히 증오라서, 마찬가지로 그들은 동지였기 때문에 서로 다른 길을 선택한다고 ‘선언’할 수도 있었지. 남성 서사의 사랑이란 바로 이런 면에서 너무 사랑스럽고 킹받는단 말이예요.
영화엔 멋진 장면들이 정말 많다. 세계의 이치에 대해 정약전의 입에서 하나씩 배우면서 창대에게는 하늘에 흐르는 별이 다른 의미가 된다. 그 순간 이준익은 거대한 하늘을 스크린에 통째로 담는다. 지구본과 논어가 통합되는 이일분수의 순간이 눈부시게 펼쳐진다. 억울한 일이 있을 때 울린다는 고동은 막막하게 화면을 채우며 수많은 백성의 ‘원통함’을 설파하고, 백성이 근간이 되는 성리학이 시대의 통치이념으로서 어떻게 뒤틀렸는지를 역으로 드러낸다. 스스로 사대부라 믿어 의심치 않는 한국인 대부분(= 솔직히 너네 다 성리학 오타쿠잖어)들의 심금을 후벼파다 못해 찢어버리는 씬임. 우리는 누구의 입이 되고 누구의 눈이 되고 있는가.
마지막에 왜 흑산이 아니라 자산인가를 말하는 장면에서는 자꾸 눈물이 나서 보다가 그냥 눈을 감았다. 정약전의 호는 자산. 뭐 정사충들은 자산이 흑산도가 아니라는 해석도 있고 자산역간이 흑산도의 역간이란 뜻인데 가능하냐구 어쩌구 하는데 네네, 알겠구요~ 어쨌든, 영화 속에서 정약전은 ‘글’을 통해서 흑산이라는 말이 불길하게 들린다는 창대의 말을 받아 玆를 썼다고 말한다. 黑은 나쁘고, 악하고, 비밀스럽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玆는 지금, 이 순간, 이곳을 의미하는 한자가 아닌가. 과거가 아닌 현실의 인민.
죽은 성게의 껍질 속에서 자라는 파랑새(유일하게 영화에서 나오는 색채다)가 호르르 올라가는 장면이 나온다. 黑은 색채를 낳았다. 창대에게 먹물을 갈게 하던 정약전은 문어 먹물을 찍어서 윤기가 좋다며 글을 쓴다. 문어 먹물, 죽은 성게, 흑산도, 그리고 그곳에서 글이 솟아오른다. 주자학의 원리에 따르면 세상을 밝게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도구, 문자를 익히고 배움을 갈고 닦게 만드는 가장 큰 힘. 영화 속에서 정약전의 먹은 黑으로 玆를 낳았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파랑새 나오는데 증말 진짜 너무들 하지, 성리학 오타쿠 울리려구 작정한 영화지 이게…….
자산어보하면 물고기 도감 아니겠음? 심지어 거기 인어도 나온다구요, 여러분 알고 계셨어요?
하지만 영화에선 인어는 안 나오고 남도의 온갖 해산물 머잔치가 펼쳐짐. 보면서 내내 홍어에 막걸리 마시고 싶어서 병 걸리는 줄 알았는데 아 씨 영화 본 이후 아직도 홍어를 못 먹었네. 홍어 팟 모집합니다.
암튼 흑산도에 유배 가자마자 정약전 선생님은 저게 유배여 휴양이여 싶을 정도로 해산물 먹방을 거-하게 펼치시는데. 자리 잡고 누구네 집에 살게 되자마자 제일 처음 시작하는 일 → 홍어 잡음. 홍어 내리치는데 저의 동공이 부랑하고…… 아니 거기다가 삭힌 홍어가 아니라 지금 막 잡은 홍어 회라고요? 저는 평생 그런 음식을 먹어 본 적이 없는뎁쇼? 우리같은 갱상도 아들은 그냥 오는 길에 팍 삭은 거나 아님 소금에 쩔이구 또 쩔여갖구 내가 묵는 게 생스인지 소금인지 헷갈리는 것들만 무싸갖고 지금 막 잡은 홍어 회 무신 맛인지 알지도 몬한다 (통곡) 나도 흑산도 갈래 (통곡)
지금까지 못 먹는 건 줄 알았던 짱뚱어로 짱뚱어탕 얼릉 만들어 버리구요. 다산네 제자가 놀러왔을 땐 아구찜 푹 삶아줘 버리구요. 제 혼자 술처먹고 헛짓하다 바다에 빠졌을 땐 가거댁이 문어탕 하나 제대로 삶아줘 버리구요. 홍어가 안 잡힐 땐 가오리회 또 맛깔나게 먹어주고요. 그 와중에 무슨 물고기 도감을 쓰겠다고 갯벌 헤매고 있던 거 솔직히 지금 와선 의심됨. 그냥 美! 味! 해산물편 찍고 싶었던 거 아니냐고요. 어차피 귀양도 왔는데 생전 처음 보는 물고기 다 함 먹어보고 싶었던 거 아니냐고요…….
계속 상놈이라고 쌉무시하면서 자꾸 돗돔 잡아오라 돗돔 잡아오라 그러더니만 결국 창대분이 지 몸만한 김머균을 등에 이고 낑낑 산을 기어오르게 만드니까 받자마자 칼질부터 시작하고 말야. 뭐, 해부해서 내부를 알아본다 어쩐다 했지만 그러고나서 뭐했겠어. 먹었을 거 아니야~ 나도 김머균 한 점만 먹어보고 싶다고요 (식인 아님)
5월인데 멍게도 아직 못 먹음…… 홍어 팟에 멍게 팟도 모집합니다. 아니, 넷플릭스에 자산어보 풀리면 홍어에 막걸리에 멍게 먹으면서 한 번 더 보고 싶다 흑흑…… 자산어보 보고 나서 모여서 홍어에 막걸리에 멍게 먹을 팟 모집합니다…….
+) 덧1. 서얼은 과거시험 정조 1년부터 볼 수 있었거든요? 자꾸 과거 못 본다구 서얼로 받아주면 안 된다 어쩐다 해서 궁시렁 궁시렁
++) 덧2. 흑산도에서 홍어사려다 필리핀어 전문가 되신 문순득 선생님 반가웠습니다.
+++) 덧3. 정조 캐해 넘무 제 취향이었음. 니가 서학을 하든 뭘 하든 좆도 상관 없지만, 나는 널 좀 잘 써먹어야겠으니 알아서 정리 잘해라 <- 조선조 최고 퀸비의 위엄.
++++) 덧4. 약전 약용을 처단하는 데에 앞장서는 인물로 몹시 납작하게 심환지가 그려지는데, 심환지를 글케 납작하게 그리는데 잠깐 울컥했지만 뭐 분량상 어쩔 수 없었겠지 (재울컥)
+++++) 덧5. 이게 천주교 쪽 감수도 받은 거라서 아마 맞겠지 싶긴 한데, 세례를 글케 줬단 말임? 성경만 보고 배운 거라서 침례로 줬을 줄 알았는데 이마에 성수 찍드라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