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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요일 오후 Mar 16. 2019

타이타닉 이후 다시 만난 그들-레볼루셔너리 로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다.


<레볼루셔너리 로드>



제목과 달리 보편적인 삶을 짓궂게 파헤치는 이 영화는 "타이타닉에서의 잭(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과 로즈(케이트 윈슬렛)의 결혼생활은 어땠을까?"란 애정 어린 호기심으로 찾아온 관객들에게 당황스러움을 안기는 작품이다. 주인공들의 주름살과 나잇살은 차지하더라도, 치열하게 주고받는 감정의 선혈과 묵직한 주제가 꽤 도발적이기 때문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사랑에 빠져 결혼한 프랭크 윌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에이프릴 윌러(케이트 윈슬렛)가 뉴욕 맨해튼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교외에서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는다. 둘의 불같은 사랑은 타이타닉이면 충분하다고 여겼던 건지, 아니면 남편으로서의 질투였는지 모르겠지만, 감독은 초반부 프랭크와 에이프릴의 만남을 생략하다시피 하고, 타다 남은 재에 뒤덮인 결혼생활을 조명하는 것에 집중한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아름다운 집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녀와 살아가는 윌러 부부는 꼭 부동산 중개인 헬렌 기빙스(케시 베이츠)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충분히 특별해 보인다. 하지만 반복되는 일상으로 인해 안정감이 지루함으로 바뀌고 미래에 대한 기대감은 완전히 연소해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이다. 그렇게 낙차 없는 시간에 불쾌감을 느낄 즈음 에이프릴의 '파리행' 제안은 다시 삶의 생기를 불어넣는다. 그렇게 일상에 비벼대는 '희망'이란 단어에 설렘을 느끼던 윌러 부부는 프랭크가 승진이란 달콤한 유혹에 흔들리던 차 에이프릴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서 균열이 생긴다. 결국, 프랭크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피력하며 에이프릴을 몰아붙이기에 이르고, 두 사람은 파국을 맞는다.




"당신은 내가 만나본 중 가장 흥미로운 사람이에요."


     

이후 에이프릴의 절망은 단순히 프랭크의 변심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가장 뜨거웠던 순간에 함께 꾸었던 꿈을 사회적 안정감으로 기꺼이 치환하는 프랭크로부터 혐오감을 느꼈을 것이고, 젊은 시절 오로지 뭔가 느끼고 싶다던 프랭크의 바람이 늙어빠진 허파처럼 쪼그라든 모습과 서로가 가진 꿈에 대한 열망의 차이를 목격하며 허망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절망은 프랭크가 더는 예전처럼 흥미롭지 않다는 데 있었을 것이다.


이 영화가 설파하는 핵심은 헬렌의 아들 존 기빙스(마이클 섀넌)와 윌러 부부의 만남에서 드러난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존은 '파리행' 결심을 '비현실적'이라며 떨떠름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주변 인물들과 달리 윌러 부부를 이해하는 유일한 인물로 등장하는데 모두가 애써 진실이라고 믿는 '현실'이란 명제를 기꺼이 '절망'과 '공허'로 정의하는 윌러 부부를 향해 미소 짓는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세상이 정신질환자로 규정한 존이 가장 정상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감독은 역설적인 이 장면을 통해 우리 안에 굳어버린 사고의 회로를 다음과 같이 재구성하고 싶어 하는 듯 보인다.



"어쩌면 비현실적이라며 애써 서랍 속에 감춰둔 삶이 진실이고, 지독한 현실을 견뎌내기 위해서라는 핑계로 누룽지처럼 바닥에 쩍 눌어붙은 지금의 삶이 가짜일지도 몰라."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상=소수의 것' 또는 '이상=비현실'로 규정하는 것에 스스럼이 없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의 의무적으로 갖게 되는 탐욕을 보장받기 위해, 일그러진 자화상쯤은 감수하고 살아가는 사회적 관습도 한몫할 것이다. 그래서 프랭크가 '파리행'을 결심한 후 자신감 넘치게 내뱉는 "이것이 진실이야."란 대사는 탐욕의 부스러기에 매몰된 개인의 용기를 넘어 사회적 통념에 대항하는 반기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의 과정에서 변심한 프랭크를 향한 존의 일갈은 그 실망감을 고려하더라도 너무 직설적이라 위화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자신이 비정상이 아니라 세상이 미쳐 있다는 사실을 윌러 부부를 통해 확인받고 싶어 했던 존이 최면에서 깨어난 듯 다시 자신을 '미친 사람' 취급하는 프랭크 때문에 느꼈을 적막감을 생각해본다면 존이 내뱉는 끔찍한 독설이 합당해 보이기도 한다.


다른 이성과의 감정 없는 잠자리를 갖는 윌러 부부나,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떠난 윌러 부부에 대해 떠들어대는 헬렌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 샘 멘데스 감독은 시종일관 냉소적인 태도를 유지한다. 게다가 샘 멘데스 감독의 특징 중 하나가 리얼함을 넘어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거나 짐작하는 것, 혹은 결코 드러내고 싶지 않은 것들을 불편할 정도로 힘껏 팽창시키는 일인데, 이런 기조는 관객들로 하여금 자신의 삶마저 조롱받는 기분이 들게 한다. 기본적으로 사람의 속성이 생존을 위한 공작새의 과잉된 날갯짓처럼, 결핍된 자아와 은밀한 욕망을 숨기기 위해 허울 좋게 포장하기 마련인 법. 샘 멘데스는 정확히 그 지점을 헤집는 것을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여유 있게.


이 영화에선 특히 캠벨 부부를 통해 이러한 장기를 드러낸다. 밀리 캠벨(캐서린 한)이 윌러 부부를 맞이하기 위해 입은 의상에서조차 남편 셰프 캠벨(데이비드 하버)의 눈치를 살피는 모습이라던지, 윌러 부부의 과시적인 '파리행' 선언에 축하를 건네면서도 왠지 모를 패배감에 뒤에서 눈물 흘리는 모습이 그렇다. 이 장면들에서 느껴지는 밀리의 열등감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감독이 우리가 평소에 느끼는 피로감을 정확하게 집어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셰프가 지닌 에이프릴을 향한 판타지까지 보태면서 남성의 관음적 시선까지 들춰내는데, 이런 세밀함은 그의 데뷔작 <아메리칸 뷰티>에서 멀쩡해 보이는 중산층의 비밀스러운 속살을 적나라하게 해부한 경험과 연관 있어 보인다.



잘 알려진 대로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의 연기 호흡은 '타이타닉' 이후 무려 11년 만이다. 11년 전 서로를 향한 애절함을 연기했던 두 배우는 그 영역을 서로에 대한 권태와 경멸로 옮겨왔다. 미혼자들이 결혼생활에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불꽃 튀는 부부싸움을 연기한 둘은 상대의 영혼을 붕괴시킬 만큼의 파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플롯에 따라 유려하게 변화하는 케이트 윈슬렛의 감정 묘사가 매우 뛰어난데 오랫동안 유예해 온 히스테리를 강렬하게 분출한 후 뿜어내는 냉기가 압권이다. 물론 뜨겁게 맞서다가도 에이프릴의 냉담함에 아이처럼 무너지는 디카프리오의 연기 또한 칭찬할만하지만, 여전히 앳된 외모가 주는 어색함은 어쩔 수 없다. 또 정말 미친 사람처럼 보일 만큼 디테일한 표정과 제스처의 마이클 섀넌, 그리고 얼굴 근육의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애잔한 마음이 들게 하는 데이비드 하버와 캐서린 한의 연기도 인상적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는 헐렁한 정장이 촌스럽지 않던 50년대 미국 사회를 그리지만, 물질적 풍요 가운데 찾아온 정신적 빈곤을 다룬다는 점에서 지금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지 않다. 그만큼 이 영화의 담론이 그리 새로운 건 아니다. 아마도 관객 모두가 끊임없이 던져왔지만 왠지 모를(특별하다고 믿었던 내 존재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아 느끼는) 불편함에 늘 묵인할 수밖에 없었던 질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현실이란 벽에 마모된 삶의 봉합을 피력하는 이 영화의 담론은 스스로 최면을 걸어 간신히 삶을 지탱해온 사람들에게는 무례하고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자신의 고유한 삶을 빼앗긴 채 낙오된 시간을 부유한다고 믿는 이들에게는 용기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어찌 됐든 자신의 삶을 봉합하는 데 실패한 에이프릴이 절뚝이는 음성으로 내뱉는 다음의 대사가 단순히 체념이 아닌 되물음으로 들리는 건 지리멸렬한 우리 삶과 무관치 않은듯하다.






  "결혼했고, 두 아이도 있고 그 정도면 충분하죠. 그에겐 말이에요.

   그가 옳았어요. 우린 전혀 특별한 존재가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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