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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 곳에서 May 30. 2024

[뉴욕] 맨해튼 한복판에서 뉴욕 대정전 사태를 겪다

미국 뉴욕에서

해외여행이나 출장을 다녀보면 생각보다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나도 해외주재원으로 근무하면서, 운 좋게도 여러 국가와 도시를 다녔다. 그 와중에 잊을 수 없는 사람을 만나고, 남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사건을 경험한 적이 종종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뉴욕 타임스퀘어의 화려한 조명과 전광판이 꺼졌던 2019년 뉴욕 대정전 이야기이다.


뉴욕은 아직까지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도시 중 하나이다. 그곳에 오래 살아본 적도 없고, 4번에 걸쳐 여행한 게 전부이지만, 뉴욕 특유의 자유로우면서도 거친 분위기가 나의 취향에 딱 맞았다. 그리고, 혈기왕성한 30대 초반에는 산과 바다와 같은 대자연 여행보다 시끌벅적하고 세계 경제와 트렌드를 선도해 가는 뉴욕에 있다는 것 자체가 즐거웠다. 

DUMBO 인근 Main Street Park에서 본 파이낸셜 디스트릭트 야경

뉴욕에 가면 늘 타임스퀘어 인근에 숙소를 잡곤 했다. 맨해튼은 호텔 숙박료가 비싸서 가성비 숙소를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지만, 맨해튼 한복판에 위치하여 '잠들지 않는 도시' 뉴욕의 밤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미 한차례 뉴욕 겨울 여행을 했던 나와 아내는 '뉴욕뽕'에 가득 차 있었다. 사실 뉴욕에 방문해서 특별한 것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루종일 하는 것이라고는 도심 내 평화로운 공원 산책, 맛있는 식당을 찾아가는 것,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는 것 등 한국이나 다른 국가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일상적인 것들이었다.

별다를 게 없는 뉴욕 여행이 왜 그렇게 좋았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뉴욕의 로맨틱한 크리스마스 분위기와 멋진 야경 속에서 아내(당시 여자친구)와 같이 하루종일 있는 것이 좋아서 뉴욕이 그토록 아름다운 도시로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록펠러센터 전망대인 "Top of the Rock"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뉴욕 야경

뉴욕의 겨울은 생각보다 아주 아주 추웠다. 아이폰 날씨 앱 상 온도가 한국보다 높았기 때문에, '추워봤자 한국 보다는 따뜻하겠지'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비행기에 탑승했다. 그러나, 허드슨 강에서부터 불어오는 겨울 칼바람이 콘크리트 정글과 마천루를 지나면서 얼굴과 몸을 세차게 때렸다. 결국 여행 마지막쯤에는 온갖 방한 용품으로 몸을 꽁꽁 싸도 너무 추워서 호텔 방에서 몸을 녹이면서 시간을 보냈다. 큰맘 먹고 뉴욕까지 와서 좁은 호텔방에 갇혀 있는 게 아쉬웠지만, 딱히 다른 대안도 없었다. 그래서 꼭 날씨가 좋은 여름에 뉴욕에 다시 오자고 약속했다. 마침 당시 아내가 근무했던 외국계 회사에서 휴가를 장기로 쓸 수 있는 상황이 되어서 우리는 곧바로 뉴욕행 티켓을 끊었다. 


2019년 7월 여름의 뉴욕은 싱그러웠다. 우리는 브라이언트 공원 인근의 블루보틀에서 아이스 라떼를 주문하여 공원에 앉아 수다도 떨고, 사람 구경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아내와 저녁을 먹기 위해 미리 예약해 둔 식당으로 이동할 무렵, 뭔가 도시가 어수선하다는 것을 느꼈다. 수많은 소방차와 경찰차들이 사이렌을 울리며 도심 속을 빠르게 질주하고,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2019년 뉴욕 대정전 초반 상황. 이때만 해도 예비전력이 많이 가동되고 있었으나, 광고판이 꺼졌다.

식당으로 이동하는 길에 타임스퀘어를 지나가는데, 그토록 화려한 광고판이 모두 꺼져있었다. 지구에서 가장 화려한 곳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한 모습을 보니, 영화에서만 보던 세계종말이 찾아왔거나,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했나 싶었다. 예비전력 시스템을 구축해 둔 일부 빌딩은 자체 전력을 통해 전기를 조달하고 있었지만, 대부분의 건물에 전기 공급이 끊겼고, 가로등, 고층 빌딩의 엘리베이터, 식당 및 공연장의 조명 등 전기가 꼭 필요한 곳이 정전되어 도시가 마비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지하철 운행이 중단되어 우리는 걸어서 식당으로 이동했다. 우리가 갔던 식당도 전기 공급이 끊겨, 주방 작업이 어렵다고 종업원이 얘기해 주었다. 촛불에 의지하면서 샐러드, 빵과 같은 단품 메뉴로 간신히 배만 채웠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궁금해져 주위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맨해튼 서쪽 웨스트 49번가 인근의 변전소에서 변압기 화재가 발생해 미드타운과 어퍼 웨스트사이드 일대 전기가 끊겼다고 한다.

왼쪽 사진은 2018년 1월에 찍은 정상적인 타임스퀘어 / 오른쪽 사진은 2019년 7월 뉴욕 대정전 당시 타임스퀘어
암흑이 된 뉴욕 타임스퀘어

무엇보다 나는 치안이 걱정되어 아내와 바로 호텔로 이동하자고 했다. 호텔로 가는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 플래시로 길을 비추며 걷고 있었다. 뉴욕 지리가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이곳저곳을 헤매면서 정신없이 다니다가 발을 헛디뎌 크게 다칠 뻔했다. 우여곡절 끝에 호텔에 도착하니, 정전으로 엘리베이터가 작동하지 않으니 걸어 올라가라고 한다. 비싼 호텔 값을 지불했는데, 에어컨도 작동하지 않는 상황에서 10층 이상을 걸어가려니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살면서 맨해튼의 대정전을 겪는 특별한 경험을 언제 해보겠냐며 호텔로 후다닥 올라갔다. 이후 전력은 자정 무렵 복구 작업이 완료되면서 5시간 만에 사태가 종료됐다.

가로등이 꺼진 뉴욕 맨해튼

다음 날, 뉴스와 신문을 통해 정전 사건에 대해서 검색해 보았다. 이번 정전은 1977년 뉴욕 대정전 사태 이후 42년 만에 일어난 대규모 정전으로, 공교롭게도 2019년 대규모 정전과 같은 날인 7월 13일 발생했다고 한다. 42년 후인 2061년 7월 13일에도 뉴욕 타임스퀘어에 불이 꺼질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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