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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낯선 곳에서 Jul 21. 2024

이래서 순례길 순례길 하는구나.

스페인 팔라스 데 레이에서 아르수아로

어제 저녁 스테파노와 맥주를 많이 마신 탓인지 순례길 3일 차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는 것이 힘들었다. 그래서 9시까지 늦잠을 잤다. 이렇게 여유를 부렸던 건 스테파노가 말한 순례길 철학이 나에게도 조금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보통 9시~10시쯤에 느지막이 일어나서 여유롭게 아침 식사를 하고 다음 목적지로 출발한다고 했다. 대부분의 순례객들은 새벽에 기상하여 8시 전에 출발하곤 한다. 올빼미형 여행자에게는 기존의 '나'를 버리고, 새로운 순례객의 '나'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페이스를 버리면서까지 말이다.


이런 대세와는 반대로 스테파노의 순례길 철학은 그냥 정해진 규칙(기상 시간) 없이, 자유롭게 순례길 여행을 즐기는 것이었다. 따지고 보면 2시간 정도 늦게 일어나서 다음 목적지로 출발한다고 해도 충분히 해가 떠있는 시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만큼은 나도 알베르게에서 같이 묵는 순례객들이 새벽부터 방에 불을 켜고, 분주하게 짐을 싸고 잡음을 내어도 무시하고 좀 더 눈을 붙이기로 했다.


9시쯤 배가 고파서 기상하지 않았으면, 더 늦게까지 잘 뻔했다. 서둘러 씻고 짐을 싸서 알베르게에서 나왔다. 아무리 스테파노의 순례길 철학에 영향을 받았다지만, 무언가 지각을 한 것 같은 찜찜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듀 평소보다 2시간 늦게 일어나 출발했기 때문에 시골 마을의 고요함을 느끼며 기분 좋게 출발을 할 수 있었다. 이 작은 마을에 있던 순례객들 대부분이 떠난 상황이라, 여유롭게 크루아상 샌드위치와 초코우유를 즐겼다.

순례길 3일 차 아침에 방문한 카페에서 먹은 아침. 따뜻한 초코우유가 허기를 달래주었다.

아침을 먹고 다시 힘차게 걷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날씨가 흐려서 오늘의 순례길도 만만치 않겠다고 생각했다. 밤에 비도 왔었고, 바람도 많이 불어서 쌀쌀했다. 3일 차까지 우의를 사지 않은 나는, 이제 그냥 비가 와도 기분 좋게 맞을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오히려 비를 맞은 후에 느끼는 찝찝함 보다, 시원하게 비를 쫄딱 맞아도 아무 걱정할 것이 없고, 주위 사람들도 나를 신경 쓰지 않는 자유로움이 좋았다. 도시에서 비가 많이 내릴 때 우산 없이 다니면 정장과 구두, 서류가방이 다 젖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곤 했다. 그리고 비에 젖은 생쥐 꼴이 된 채로 도시를 돌아다니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기 십상인데, 순례길에서는 이 모든 것에서 해방될 수 있다.


팔라스 델 레이에서 아르수아까지 가는 길은 약 29km 정도로, 다른 구간과 비교했을 때 긴 거리이다. 그만큼 여러 마을을 지나게 되고, 다양한 풍경도 볼 수 있었다. 스페인에 살면서 다양한 곳을 여행해 봤지만, 갈리시아는 다른 스페인 지역과 많이 달라 보였다.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이라서 그런지 배수가 잘되는 돌을 활용해 건물을 쌓아 올린 것이 특이했다. 그리고 이곳은 아랍의 지배에서 비교적 자유로웠던 탓인지, 조금 더 유럽 소도시 느낌이 들었다. 프랑스 사람들이 스페인을 놀릴 때 '피레네 산맥 이남은 아프리카'라는 말을 자주 쓴다. 피레네 산맥은 스페인과 프랑스의 국경을 나누는 거대한 산맥이다. 나폴레옹이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이 표현의 기원은 아직 불확실하다. 어쨌든 스페인은 다른 유럽 국가들과 기후, 문화가 매우 다르고, 유럽에서 유일하게 사막을 2개나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스페인 갈리시아 지역은 흔한 유럽 소도시 풍경과 매우 유사했다.

순례길 구간 중간중간에 멈춰서 셔터를 누르게한 작은 마을들

그렇게 걷고 걷다 보니, 어느덧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58km 남았다는 이정표를 발견했다. 113km 지점에서부터 시작했으니, 절반 조금 안되게 걸어온 것이었다. 이렇게나 많이 걸었는데 아직도 절반 밖에 안 왔다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부터 시작한 순례자들은 정말 진정한 순례자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작은 마을을 지나면서 베트남 순례자 2명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었다. 20대 중반인 이들은 프랑스 생장부터 시작해서 하루에 40km씩 걷고 있으며, 20일 만에 프랑스길을 완주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하루에 20km 걷는 것도 쉽지 않은데, 하루도 쉬지 않고 서울-파주 거리를 걷는 것이 대단했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자신들은 한국의 문화를 좋아한다고 하며 여러 가수의 이름을 댔다. 그리고 한국말을 떠듬떠듬하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나는 최신 가수들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대화가 이어지진 않았지만, 최근 한국 문화와 한국어가 핫한 콘텐츠임은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무사히 절반 정도 걸어온 나의 산티아고 순례길

걷다 보니 날씨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은 푸르고 공기가 너무 좋아서 이 공기를 한국에 가져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드리드도 공기가 좋긴 하지만, 이 정도로 맑진 않아서 최대한 공기를 마시면서 천천히 걸었다. 어제와 같이 막판에 비가 올까 두려워 날씨앱을 체크해 봤는데, 모처럼 비 소식이 없었다. 공기도 맑고 바람도 선선하게 불고, 머릿속에 아무 생각도 들지 않으니 이보다 더 자유롭고 행복할 순 없었다. 이래서 전 세계 사람들이 순례길 걷기를 하기 위해 유럽 서쪽 끝 시골까지 와서 사서 고생을 하나 싶었다.

맑은 하늘과 신선한 공기, 목가적인 풍경은 어떠한 고민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다.

어느덧 나의 3번째 목적지인 아르수아(Arzua)에 도착했다. 이 마을도 여느 순례길 마을과 다를 바 없이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초입에 각 나라가 이곳에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 표시하는 이정표가 있었는데, 한국은 1만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었다. 스페인에 산지 어느덧 1년 반이 다 되어 가는데도, 1만 킬로의 거리가 아주 멀게 느껴졌다. 바쁜 일상 속에서는 자주 떠올릴 수 없었던 가족, 친구, 집 등이 떠올라서 잠깐 아련해졌다. 한국에서 1만 킬로나 떨어진 이곳까지 와서 뭐 하고 있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다 문득 다시 보니, 이정표에 있는 국가들 중에서 브라질 상파울루만 빼고 모두 가본 곳들이어서 어린 나이에 참 많이도 돌아다녔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정신을 차리고 얼른 알베르게에 가서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침낭 속에 들어가 잠시 낮잠을 잤다.

3번째 목적지인 Arzua에 입성! 한국과는 1만킬로미터나 떨어져있다.

낮잠을 자고 일어나 보니, 어느덧 나의 디너메이트가 된 스테파노에게 메시지가 와있었다. 이 녀석도 마침 Arzua에 도착해서 같이 저녁을 먹자고 했다. 순례길에 와서 이탈리아 친구를 만나고, 매일 저녁을 같이 먹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도 이 친구와 대화도 잘 통하고 즐거워서, 흔쾌히 응하고 같이 저녁을 먹었다. 우린 여느 때와 같이 2인 3 메뉴를 시켰다. 둘 다 순례길 최장 거리를 걸어와서 그런지 몹시 허기져있었다. 스페인의 대표 타파스 중 하나인 피미엔토 데 빠드론(Pimiento de Padron)과 맥주를 먼저 먹고, 스테파노는 문어 요리, 나는 치킨까스를 먹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으면서 그날 각자의 순례길 후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날씨가 오늘만 같으면 하루에 50km도 거뜬히 걸을 수 있겠다고 허세도 부리고, 날씨 좋은 순례길은 정말 힐링된다고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둘 다 기분이 들떠서 맥주도 많이 마시고 순례길 명물인 ‘산티아고 케이크’도 각자 1조각씩 배불리 먹었다.

오늘도 포식했다.. Pimiento de padron(짧은 고추튀김), Escalope de pollo(치킨까스), Tarta de Santiago(산티아고 케이크)

2시간 동안 떠들면서 저녁을 먹었는데도 아직 날이 밝았다. 그래서 스테파노와 소화도 시킬 겸 마을 한 바퀴를 둘러보고 각자 알베르게로 돌아갔다. 다음날인 4일 차 목적지는 뻬드로우소(Pedrouzo)라는 곳으로, 19km만 가면 되는 코스였다. 오늘 29km를 걸어서 그런지 내일은 아주 쉽게 걸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간단하게 짐을 정비하고, 귀마개를 낀 채로 가벼운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아르수아(Arzua)의 저녁. 이 마을에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순례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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