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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회자정리 Mar 15. 2024

조심스럽게 드립니다.

누군가로부터 편지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꽤 오래된 책이다. 90년대 아주 유명했던 류시화의 시집이었다. 14년 동안 청주에 있는 장모님 댁을 들락거리며 방 끝 책장에 꽂혀 있던 책인데 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도 대학생이었던 당시.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을 읽으며 꽤나 감성에 젖어들었던 터였다. '처형 중에 한 사람? 혹은 아내가 사서 읽었나?'라며 책을 꺼내 들었다. 익숙한 책 표지가 눈에 들어왔고, 표지를 하나 넘겼다. 메모가 있었다.


To. 숙


일천 구백 구십 칠 년 유월 이십일. 조심스럽게 드립니다.


from. 민


푸하하하하!!

까마득한, 옛날. '민'이라는 청년이 아내에게 책을 선물로 줬던 모양이다.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해 쓴 느낌이 역력하다. 기대와 불안이 녹아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자기야! 자기야!!


재미있는 이야깃거리를 찾았기에, 바로 부엌에 있던 아내를 불렀다.


"응?"

"자기야~ 민이 누구야?"

"민? 무슨 소리야?"


"아니, 이 책 자기한테 선물해 준 사람이 민이라는데?"

책을 가리키며 말하자, 그제야 아내가 다가와 책을 살펴봤다.



"뭐지? 누군지 기억이 안 나는데..."

"자기 이름이 있는데, 모르는 척하지 말고~"

"아냐, 진짜 잘 모르겠는데..."

"선물 받았는데 기억이 안나는 거야?


그랬다. 아내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했다. 아내가 딱히 속일 이유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정말 임팩트가 없었나 보다며,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 해도 기억을 못 하는 민이라는 청년이 불쌍하네라며 농을 쳤다.


기억을 못 한다고 하니, 책에 심혈을 기울여 정성 들여 눌러쓴 글자체와 문구만 봐도 너무 조심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의 바르지만 그래서 밋밋하다.


"어떻게 쓸까 참 고민한 모양인데... 소심했네..."


"정말 그 책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뭔가 더 기억에 남을 만한 선물이었어야 각인이 되었을 텐데! 그런데, 세상에 공짜가 어딨어? 난 부담되는 선물은 받은 적이 없는 걸..."


"비싼 선물을 준 사람이 없는 거 아냐?" 라며 농을 친다.


"혹시, 모르지 비싼 선물이었다면 아직까지도 이름 석자 기억 할지!'라며 던진 농을 가볍게 되받아 친다.




아내의 농담에 생뚱맞게 자본주의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현대 사회를 규정함에 있어 여러 가지 분류가 가능하겠지만, 어떤 기준이라도 자본주의가 가장 대표적 키워드가 될 것 같다.


자본주의에서는 상품이 가지고 있는 이익으로 가치가 결정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니까 객관적으로 가격이 비싼 물건이 효용가치가 높을 확률이 큰 것이다. 가치가 크다는 것은 바로 각인이라는 효과를 훨씬 쉽게 얻을 확률이 크다.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자본주의의 본질이다 보니, 그것이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간혹 그런 행위에 암묵적으로 따라오는 비사회적이거나 비윤리적인 요소들로 치부되기도 한다. 예컨대, 과도하게 이익 만을 쫓는 행위는 순수하지 않다는 오해를 받기도 한다.


자본주의에 사는데 필요한 것은 돈이고, 돈은 결국 힘으로 귀결된다.

힘이 있는 것은 어느 순간 정의가 되기도 한다. 보편적이기는 하나 절대적이지 않다는 함정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To. 20대의 민군에게


아뿔싸. '민'군 아쉽네, 우리 아내는 자네를 기억조차 못한다네.

민망해서 기억 안 나는 척 연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네. 내가 대신 사과함세.


내가 볼 때는 너무 조심성이 많았던 것 같네.

조심스럽게 주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실패로 귀결되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구먼... '더 확실하게' 표현했어야 기억을 했을 텐데 말이네.  


'더 확실하게'라는 의미는 조금 더 분명하고 직접적으로 감정 표현을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드는구먼... 괜스레, 누군지 기억이 안 난다 하니 괜히 더 궁금해져. 오지랖을 떨었구먼...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네, 건강하게...


from. 지금 그녀의 짝이




이 글을 써 놓은지 거의 2년이다. 브런치가 좀 뜸해지기도 했고, 단락 연결도 마음에 들지 않아 발행하지 않았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얼마 전에 아내와 청주를 다녀오는 길에 다시 우연찮게 이 책 이야기가 나왔었다. 자연스럽게 정말 기억이 나지 않는지 되물었다. 아내는 그때는 기억이 나지 않았는데, 조금 지나니 누구였는지는 알 것 같다 말했다.

'시간이 지나 그저 기억이 조금 흐려졌을 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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