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회에서 우리는 이 자리의 이름을 정했습니다. <서연각>. 이번 회에서는 그 안에서 무슨 일이 어떤 순서로 일어나는지를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저희가 새 작품 한 권을 받으면 가장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질문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이걸 어디서부터 손에 잡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6단계가 있습니다. 단계마다 만들어지는 자료가 정해져 있고, 단계마다 그 자료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정해져 있습니다.
먼저 전체 그림부터 보겠습니다.
1단계 - 작품을 읽고, 작품의 성격을 적습니다.
2단계 - 작품을 18개 정도의 구간으로 나눠 키워드를 뽑습니다.
3단계 - 사건을 인과의 사슬로 묶습니다.
4단계 - 인물 한 사람씩 노트를 만듭니다.
5단계 - 작품 세계를 둘러싼 30여 종의 자료를 만듭니다.
6단계 - 모든 자료를 교차검증합니다.
이 6단계가 오만과 편견 한 권에 적용되었을 때 약 15시간이 걸렸습니다. 그중 가장 긴 시간은 5단계에 들어갔습니다. 짧게 한 단계씩 들여다보겠습니다.
처음 할 일은 책을 읽는 겁니다. 통독하고, 정독하고, 작품 전체의 호흡을 손에 잡습니다. 그러면서 한 장의 문서를 작성합니다. 이 문서는 두 페이지를 넘지 않습니다. 작품 프로파일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다섯 가지를 적습니다. 어느 시대를 다루는가. 어느 장르인가. 어느 문화권을 배경으로 하는가. 어떤 모티프가 두드러지는가. 번역에서 무엇이 가장 까다로워 보이는가.
오만과 편견의 프로파일은 이렇게 정리됐습니다. 리젠시 영국의 사회소설이자 결혼 플롯의 로맨스다. 자유간접화법이 강하다. 계급, 결혼, 가족, 서간, 하인, 식문화, 의상 등 12개의 모티프가 강하게 작동한다. 시대어가 다수 있어 어휘 난이도가 높고, 구문이 길어 문법적 난이도도 높다.
이 한 장의 문서가 이후 모든 결정의 기준이 됩니다. 어떤 자료를 만들지, 어디에 시간을 더 쓸지, 어떤 함정을 미리 표시해 둘지 - 모두 이 한 장으로부터 도출됩니다.
다음으로 작품 전체를 챕터 묶음 단위로 나눕니다. 너무 잘게 나누면 표가 너무 많아지고, 너무 크게 나누면 한 표 안에 의미 변화가 너무 많이 들어갑니다. 보통은 한 작품을 15~20개 구간으로 나누는 게 적당합니다.
오만과 편견은 61개 챕터를 18개 구간으로 나눴습니다. 1구간이 1~6장, 2구간이 7~9장 - 이런 식으로 작품 전체가 18개의 묶음이 됩니다. 묶음의 분기점은 서사적 단절 - 장소가 바뀌거나, 시간이 점프하거나, 한 사건이 마무리되는 자리에서 끊습니다.
각 구간마다 표 하나를 만듭니다. 그 구간에서 새로 등장하는 모든 인물, 장소, 사물, 개념, 제도가 한 행씩 들어갑니다. 오만과 편견의 1구간 표에는 빙리, 다아시, 베넷가, 네더필드 같은 이름들이 처음 들어가고, 9구간 표에는 헌스포드, 로징스, 피츠윌리엄 대령이 들어갑니다.
표의 한 행은 단순한 단어가 아닙니다. 그 시점에서 그 키워드가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적습니다. 1구간 표의 다아시는 "도도하고 무뚝뚝한 부유한 신사"입니다. 같은 다아시가 12구간 표에 다시 등장할 때는 "엘리자베스에게 부드럽게 변모한, 자신의 영지를 보여주는 주인"으로 적힙니다. 같은 인물의 같은 이름이지만, 그 시점의 의미는 다릅니다. 그래서 한 표가 18개 만들어집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엄격한 규칙이 있습니다. 스포일러를 적지 않습니다. 1구간 표의 다아시 항목에 "사실은 좋은 사람이고 결국 결혼한다"고 적으면 안 됩니다. 1구간 시점에는 그런 정보가 없습니다. 자료의 시간이 작품의 시간과 일치해야 - 번역가가 1구간을 번역할 때는 1구간 시점의 의미만 펼쳐 볼 수 있어야 - 비로소 자료가 정직해집니다.
작품 안에서 의미가 바뀌는 모든 순간에 일련번호를 붙입니다. 오만과 편견에서는 본편 사건이 49개 잡혔습니다. 첫 번째 사건은 빙리가 네더필드에 들어온다는 소식이 베넷가에 전해지는 것이고, 마지막 사건은 두 자매(엘리자베스와 제인)의 결혼식과 그 이후의 관계 정리입니다.
각 사건에는 선행사건이 표시됩니다. 어떤 사건이 어떤 사건의 결과인가. 28번 사건(다아시의 첫 번째 청혼)은 27번 사건(피츠윌리엄 대령이 무심코 던진 폭로)의 결과이고, 27번은 다시 19번(빙리의 갑작스러운 런던 철수)의 결과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건들이 인과의 사슬로 엮입니다.
작품 시작 전에 일어난 사건도 별도로 인덱스에 넣습니다. 예를 들어 다아시의 출생, 펨벌리 저택의 건립, 위컴의 아버지가 다아시의 아버지 영지에서 일했던 시기, 콜린스의 서품 - 이런 것들은 본편에는 직접 나오지 않지만, 인물의 나이와 관계와 갈등의 뿌리를 결정합니다. 오만과 편견에서는 이런 배경 사건이 41개 잡혔습니다.
본편 49개 + 배경 41개 + 사건 사이의 작은 연결고리들이 더해져, 우리는 한 작품의 모든 시간이 정리된 사건 마스터 인덱스를 갖게 됩니다.
다음으로 인물 노트를 만듭니다. 이름이 등장하는 모든 인물에 대해 별도의 문서를 하나씩 만듭니다. 오만과 편견에서는 34명의 노트가 작성됐습니다.
노트의 핵심은 사건순 변천입니다. 그 인물이 작품 전체를 통과하면서 어떻게 변하는가를, 3단계에서 부여한 사건 번호와 함께 추적합니다. 엘리자베스의 노트에는 "1막: 편견의 형성, 2막: 대결과 파열, 3막: 전환점, 4막: 재평가, 5막: 결실"이 사건 번호와 함께 적혀 있습니다.
주인공의 노트는 길고 상세합니다. 5막에 걸친 내면의 진화, 핵심 관계의 호, 번역에서 주의해야 할 어조의 그라데이션까지 들어갑니다. 조연의 노트는 더 간결합니다. 단역의 노트는 한두 단락으로 끝나기도 합니다.
다만 단역이라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펨벌리의 가정부 미세스 레이놀즈는 작품 전체에서 단 한 장면에만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 한 장면에서 그녀가 다아시에 대해 증언하는 5분이 작품의 인식을 통째로 뒤집습니다. 단역도 한 장면의 결정적 증인일 수 있고, 그래서 그녀의 노트도 작성됐습니다.
여기가 가장 손이 많이 가는 단계입니다. 작품 세계를 둘러싼 모든 컨텍스트들 시대, 계급, 관습, 언어를 30여 종의 문서로 분리해 작성합니다.
이 30여 종이 어떻게 분류되는지는 다음 회에서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짧게 말하면 네 계층이 있습니다. 어떤 작품이든 공통으로 만드는 것이 8종, 작품의 장르에 따라 추가되는 것이 몇 종, 작품의 시대에 따라 추가되는 것이 한두 종, 작품의 핵심 모티프에 따라 추가되는 것이 십여 종.
오만과 편견에서는 이 합산이 35종이 됐습니다. 다른 작품 - 예컨대 로미오와 줄리엣은 18종 정도, 모비 딕은 24종 정도가 됩니다. 같은 절차이지만 작품 성격에 따라 자료의 종류가 다릅니다.
5단계가 가장 깁니다. 오만과 편견에서 약 7시간이 걸렸습니다. 시트 한 종당 평균 12분이 들어간 셈입니다. 그중 가장 긴 시간이 "이 자료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데 들어갑니다. 자료를 채우는 것보다 자료의 구조를 짜는 게 더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자료를 서로 비춰 봅니다. 인물 노트와 사건 인덱스가 일치하는가. 같은 단어가 여러 문서에서 다른 한국어로 옮겨지지 않았는가. 인물 이름의 표기가 어디서나 같은가. 사건 번호의 선행 참조가 모두 실재 사건을 가리키는가.
발견된 오류는 등급별로 처리합니다. 번역 정확성에 직접 영향을 주는 오류는 즉시 수정합니다. 인물 이름이 한 군데서 다른 표기로 쓰여 있으면, 번역자가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옮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사건 번호가 잘못 가리키고 있다거나하는 자료 추적성에 영향을 주는 오류들도 릴리스 전에 수정합니다. 어떤 단역의 설명이 빠져 있다거나 하는 구조적 보강이 필요한 항목은 다음 작업 사이클에서 채워 넣습니다.
오만과 편견에서는 6단계 검증으로 약 90건의 점검 항목이 나왔고, 그중 5건이 즉시 수정 대상이었습니다. 나머지는 등급별로 정리되어 다음 작업으로 넘어갔습니다.
6단계가 끝나면 한 작품에 대해 표준화된 작업 폴더가 하나 만들어집니다. 폴더 이름은 작품 이름입니다. 그 안에 인물 노트 30~40개, 사건 마스터 한 권, 설정 자료 30여 권, 폴더 안내서 한 장, 검증 보고서 한 부가 들어 있습니다.
번역가는 이 폴더를 옆에 두고 본 작업을 시작합니다. 한 챕터를 번역하다가 어느 단어, 어느 인물, 어느 시대 관습이 막히면 폴더 안에서 답을 찾습니다. 30분 안에 답을 찾을 수 없는 자료는 자료가 아니라 그저 페이지일 뿐, 그래서 폴더 안내서는 "어디서 뭘 찾을 수 있는지"의 지도 역할을 합니다.
오만과 편견 한 권의 사전 작업에 약 15시간이 들었습니다. 6개월에서 13주로, 13주에서 2주로, 2주에서 약식 2시간으로 우리가 줄여 온 시간이 단축은 사람을 빼고 기계를 넣어서 가능해진 게 아닙니다. 사람의 판단이 닿아야 하는 자리를 정확히 6단계로 분리한 결과입니다.
다음 회에서는 가장 긴 5단계, 30여 종의 자료가 어떤 분류 논리로 나뉘는지, 오만과 편견에서 그 분류가 어떻게 35종이 되었는지를 차근차근 보여드리겠습니다.
20260425 하얀용WhtDrgon. (주)메제웍스의 세계관 제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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