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유원의 시세계
우리는 사방에서 절대적인 것을 찾지만,
얻는 것은 항상 물건들뿐이다.
―노발리스
앙장브망
황유원의 시는 앙장브망의 언어 배음(倍音, harmonics)에서 솟아오른다. 앙장브망(enjambement). 시구의 행간 걸침. 구절치기. 시행 리듬의 일시 정지와 지속. 숨결의 도약과 비규범적 의미의 비상. 날숨의 지속과 휴지(休止). 침묵. 들숨의 도래와 규범적 의미로의 귀환. 날숨과 들숨의 간극. 침묵. 시행 단위 의미의 단절과 음성 배음의 지속. 소리와 의미의 분절. 침묵. 규범적 의미의 중지. 행(行)과 행(行) 사이. 행간(stanze). 침묵. 무(無). 법의 중지와 법의 바깥. 비현실적인 것의 틈입. 의미의 유한 너머 무의미의 무한. 무한의 리듬. 무한의 긍정. 존재의 돋움 닫기. 그러나 추락. 사이. 다시. 반복. 앙장브망.
일단 사진으로 찍으면 정지.
한곳으로 집중되는 힘들과 지금 막
펼쳐지려 하는 힘들이 만들어 내는
그대들의 온갖 선(線)들도
그대로 정지.
그러나 찍기 전까지는 선회,
찍고 난 후에도 선회,
둥글고 둥글게 사과를 깎는 것처럼
공중의 껍질을 밀어내듯 부드러운 과도(果刀)의 동작으로 선회
새들이 선회한 자리에선 사과 향기가 나고
더 큰 원을 그려 봐야 원은 끊어지지 않아
다만 바닥에 떨어지는 사과 껍질처럼 착지할 뿐
천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꼭 천 년 후에도 그럴 것처럼
깎아 놓은 사과의 속살 같은 하늘 남겨두고서
그대로 착지.
그리고 그 자리에 다름 아닌
네가 있을 것.
내가 자른 사과를 부리로 쪼아 먹으며
부드러운 턱 운동과 함께
그 자리에서 가장 둥글게 울고 있는
네가 있을 것.
―「새들의 선회 연구―한 장의 사진」 부분(이하 강조도 필자)
황유원의 첫 시집 『세상의 모든 최대화』에 수록된 「새들의 선회연구―한 장의 사진」은 앙장브망 시학의 출현과 전개 양상의 기원에 자리한다. 「새들의 선회연구―한 장의 사진」은 하늘에서 선회하는 새들을 한 장의 사진으로 찍은 순간에 대한 시적 사유를 개진한다. “정지/착지”와 “선회”, “―것”과 “언덕”의 불규칙 리듬의 각운(脚韻)을 계산한 시의 리듬은 선회하는 새의 운동성과 순간 포착된 새의 부동성, 존재의 지속과 존재의 정지, 삶의 비상과 추락의 심리적 효과를 생산한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1연 2행의 마지막 시구 “지금 막”이라는 앙장브망이다. 본래 시행의 의미 단위로 재구성한다면 “한곳으로 집중되는 힘들과/지금 막 펼쳐지려 하는 힘들이 만들어 내는”이라는 시행이 되겠는데, 그것은 두 행 사이에 잠재된 의미와 리듬의 시적 긴장을 무너뜨린다. 단순히 “한곳으로 집중되는 힘들”과 “지금 막 펼쳐지려 하는 힘들” 사이의 대립적 의미만 부각한다. “지금 막”이라는 앙장브망은 의미의 규범적 시행에 균열을 일으키고 “한곳으로 집중되는 힘들”의 끝, 그 도약대에서 솟구치는 순간을 포착한다. 사진에 찍혀서 정지된 순간이다. 받침으로 사용된 “막”의 종성 자음 ‘-ㄱ’은 시행의 끝에서 일상적 의미의 단절과 새롭게 펼쳐지는 의미의 도약을 동시에 수행하는 소리의 자음 강세(accént)로서 “한곳으로 집중되는 힘들”과 “펼쳐지려 하는 힘들” 사이의 시적 긴장을 생성한다. “막”의 ‘-ㄱ’은 선회의 지속과 정지, 선회와 착지의 대립적 의미를 발생시키는 리듬의 진원지이다.
새의 활공과 비상. 사이. 삶의 집중과 확산. 사이. 도약의 돋움 닫기와 추락. 사이. 그 행간의 시간. 멀리 있는 것에 대한 동경. 미지의 꿈. 침묵. 그러나 새의 비상과 선회는 사진을 찍는 순간에만 정지된 상태의 아름다운 침묵으로 남는다. 일상의 삶은 새들처럼 사진으로 찍기 전에도 선회하고 찍고 난 후에도 선회한다. 일상의 속도와 지상의 삶으로 귀속되고 추락한다. 살아있는 한 새는 선회하고 착지해야 하며 시인의 삶은 현실에서 지속되어야 한다. 선회한 새는 날아가지만 삶은 사과 껍질처럼 현실에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정지된 순간의 비의(秘義)를 사유한다. 새들의 선회를 사과 껍질 깎기라는 경이의 상상력으로 확장하고 “새들이 선회한 자리에선 사과 향기”를 맡는다. 그는 선회하는 새의 시각적 이미지에서 ‘사과 향기’의 후각적 이미지로의 도약과 세계의 확장을 이뤄낸다. 시각이 보이는 세계만을 감각한다면 후각은 보이지 않은 세계의 현존까지 감각한다는 점에서 ‘사과 향기’는 “사과의 속살 같은 하늘”, 현실 너머 “높은 곳”, 다른 세계의 현전을 계시한다. 그것은 너와 내가 동경하는 세계의 절대이다. 꿈의 이상으로서 절대를 감싸고 있는 하늘을 선회하는 새가 “더 큰 원을 그려”도 절대의 “원은 끊어지지 않”는다. 새들이 선회하면서 “깎아 놓은 사과의 속살 같은 하늘”을 남겨 두고 “다만 바닥에 떨어지는 사과 껍질처럼 착지”할 뿐이다. 시인은 착지를 실패라고 판단하지 않는다. 착지한 그 자리에서 “언덕이 되어” “상처 하나 없”는 “그 향기 들이마시는” “너처럼 나도 그렇게 항상/네 옆에 있을 것”이라고 결의한다. 그 언덕에서 절대의 향기를 감각하면서 “옆에서 함께” “찰칵, 그대로 정지했다가//함께, 다시 날아오를 것”이라는 의지를 피력한다. 그것은 너와 내가 현실 세계에서 ‘함께 옆에 있음’의 의미를 성찰하고 “천천히 언덕을 오르내리는 듯한〔凌遲〕 처참의 지속”(「몬순 블루스」) 속에서도 절대에의 추구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시인의 미적 윤리이다.
화물칸에 일렉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 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세상의 모든 최대화」 부분
시집의 표제작 「세상의 모든 최대화」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화물 기차의 길이와 무게와 시간, 현실의 모든 억압에 짓눌리면서도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는 철로가 되겠다는 미적 윤리 선언이다. 착지한 현실에서 세상의 모든 폭력을 끝까지 감내하겠다는 선언이다.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이며 “종소리는/죽지 않는다 낙오하지 않는다 오직 적멸에 들뿐”(「총칭하는 종소리」)이라는 시적 인식은 절대에의 추구를 포기하지 않는 시적 사유에서 발원한 것이다. “상하 전후 좌우로 쏟아지는 여름의 십자포화(十字砲火)를 견디며”(「비 맞는 운동장」) 현실의 최대화만큼 황유원의 시는 길고 긴 자유시의 리듬으로 치닫는다. 현실의 자리에서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한계로 치달아서 지속하는 삶의 리듬. 사이. 절대를 향한 도약의 날숨과 현실로 착지하는 들숨. 사이. 비상을 향한 꿈과 착지한 현실의 소음 사이. 그 낙차와 간극 사이. 황유원의 시는 무한 운동한다. 앙장브망은 무한 운동의 진폭을 확장한다.
아이러니와 웃음
인간은 생존하기 위해 노동한다. 인간은 효율적 생산과 산물의 축적을 위해 자신의 본능을 통제한다. 그는 성적 본능과 유희적 본능을 통제하고 효율의 극대화를 위한 이성적 사고와 경제적 합리성을 지향한다. 노동이 인간이라는 종(種)을 자연으로부터 분리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도구적 이성과 본능의 통제를 기반으로 인류의 문명을 발전시킨 것이다. 개별적 존재로서 인간은 이성과 의식, 억압과 절제, 논리와 필연, 모든 법의 현실 원칙에 지배받는다. 이성과 법이 작동하는 현실에서 광기와 환상, 무의식과 백일몽, 신비와 경이, 우연과 웃음은 배제되거나 금지되고 추방당한다. 그 중에서 웃음에 대한 성찰은 이성과 법이 지배하는 현실 원칙의 강도를 측정할 수 있다. 누군가의 첫 웃음은 다른 사람들의 웃음을 동반하고 사람들 사이의 유대감과 쾌락을 증진시킨다. 그러나 누군가의 웃음이 그치지 않고 지속된다면 그는 광인으로 취급되고 사회에서 추방된다. 누구나 웃을 자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무한한 웃음의 자유는 보이지 않은 금기로 제한된다. 노동의 긴장 완화와 생산력 증대에 적합한 웃음만 권장된다. 현실 원칙을 수용할 수밖에 없는 쓴웃음은 노동을 제공한 개인의 몫이다. 웃음의 자유는 현실 원칙의 강도에 반비례한다. 웃음마저 무의식적으로 억압하는 현실 세계는 경제적 합리성과 이성적 논리로 작동한다. 낮의 환상과 백일몽, 일상의 신비와 경이 또한 배제되거나 무시된다. 낮의 노동은 밤의 꿈까지 억압한다. 밤의 잠은 휴식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일 낮의 노동을 위한 것이 된다.
두 번째 시집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드네』는 낮의 노동과 현실 원칙에 짓눌린 시적 주체의 아이러니(ironie)와 웃음을 표출한다. 그것은 저 높은 하늘에서 선회하는 새들이 정지한 침묵의 아름다운 자리에서 지상의 언덕으로 떨어진 현실 인식에서 연원한다. 낮의 노동이 지배하는 현실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현실의 최대화를 감내한 삶에서 기인한다. 현실의 최대화를 감내한 삶에서 흘러나오는 것은 우울과 슬픔, 분노와 웃음이다. 감정의 파고는 저 높은 곳, 절대에의 추구와 그곳에 다다르지 못하면서 낮의 노동을 수행하는 현실과의 낙차, 그 아이러니에서 파생된 것이다. 시인은 “사방에서 절대적인 것을 찾지만, 얻는 것은 항상 물건들뿐”인 아이러니를 매순간 체험한다.
저마다 한 왕국의 왕이 된 우리를 위해
창밖으로 비가 퍼붓는 동안
길 위에는 무수히 많은 왕관들이 생겨났다 사라져가고 있어
미치광이들에게만 씌워주는 왕관
미치광이들만이 당당하게 쓸 수 있는 왕관
그 왕관들이
강물처럼 흐르며 블루스를 부르고 있어
―「블루스를 부를 권리」 부분
서시 「블루스를 부를 권리」는 소소한 물건밖에 얻지 못하는 현실의 우울한 블루스를 부른다. 인간은 살아있는 한 개별성의 육체와 삶의 유한성에 머물 수밖에 없다. 절대의 진리와 무한한 침묵의 아름다움은 유한한 삶이 지속되는 한 다다를 수 없는 꿈과 영원(永遠)이다. 그 간극의 현실에서 유한한 삶이 직면하는 것은 우울과 슬픔이다. 우울과 슬픔이 지나쳐서 흘러넘치는 블루스는 미치광이들을 양산하고 “다들 열심히 자신들의 왕국을 건설”하도록 한다. 블루스의 왕국에서 미치광이들만이 당당하게 쓸 수 있는 왕관들이 강물처럼 흘러간다. 이성과 법의 현실에서 추방당한 광인, 미치광이들의 웃음소리가 강물처럼 들려오는 듯한데 ‘이 왕관이 나는 마음에 든다’는 시집 표제의 아이러니.
아이러니는 무한한 절대와 유한한 육체 사이, 간극을 메우지 못하는 시적 주체의 분열에 대한 성찰 속에서 우울과 슬픔, 분노와 웃음의 복합적인 감정을 분출시킨다. 시적 주체의 울음이 비극의 시작이라면 끝없는 비극의 바닥에서 웃음은 현실로부터 도피가 아니라 현실의 최대화를 수용하는 비극의 완성이다. 결코 패배하지 않는 비극의 완성이라는 웃음의 아이러니. 아이러니는 자신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통해 자신에 대한 완전한 긍정에 다시, 이르게 하는 출발점에 서게 한다. 절대적인 것과 개별적인 것, 죽음과 삶, 꿈과 현실 사이를 무한 반복 운동하게 한다. “아직 이렇게 시퍼렇게 눈 뜨고 살아 있다는 확신이 주는 감동은 또 얼마나 완전무결한 것”(「알 수 없는 아티스트Unknown Artist」)이냐는 무한 긍정만큼 “나는 마이너스의 음악 속에서/제로를 넘어 소멸을 넘어/마이너스 무한대로 쫄아드”(「골 때리는 아름다움―문제의 핵심」)는 무한 부정의 심리적 내상은 크고 강렬하다. 우울은 깊고 슬픔은 길다. 참을 수 없는 분노 속에서 웃음이 터져 나온다. 자기 파괴와 자기 긍정의 아이러니와 웃음 속에서 시인은 환상과 악몽을 받아쓴다. 현실의 “질서라고 부르는 것을 내가 처음부터 파괴하여 그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매혹적인 혼돈에 대한 권리를 분명히 내 것으로 취하여 행동으로 주장”한다.
불 질러버리겠습니다 당신이 뱃놀이를 하고 있는 그 배를 지금 침몰시켜버리겠습니다 호수의 안개는 이윽고 온통 연기로 변해가고 그 꼴을 또박또박 지켜보던 저는 그만 정신줄을 놓습니다 미친 기침 온갖 딸국질을 여기저기 온데만데 터트리다 호수를 통째로 손에 쥐고 구겨버리고 갈기갈기 찢어도 보지만 당신의 뿌연 웃음소리만이 실내를 가득 점령해버리고 변변한 창문 하나 없는 저는 온통 매캐하고 머리끝까지 캄캄해져가다가 문득
정신을 차립니다
―「거울 대잡설大雜設」 부분
장시 「거울 대잡설大雜設」은 방에 걸린 전신 거울을 혼자 바라보면서 지속되는 환상과 악몽을 받아쓴다. “미치기 전에, 미치려는 나를 자꾸 미쳐버리려는 속도를 애써 꽁꽁 묶어놓고 꾹꾹 눌러놓다가 단번에 터뜨려버리는 힘으로, 저는 써 내려갑니다 나의 광분과 이 자유로운 음악을, 불타오르는 전열(戰列)을 기록”한다. 마치 거울들이 한없이 배열된 듯 밤의 꿈은 무한하고 꿈의 영상들은 중첩된다. 악몽의 파편적 전개 속에서 주체의 목소리는 분열적이다. 전면 거울의 자신을 바라보고 말한다. “당신은 당신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다. “악몽, 그것은 당신 일생일대의 예술작품”이다. “나를 막아서는 것은 나밖에 없다.” 다시는 글쓰기의 “아름다움을 사용하지 못할 것이란 공포”. “이 방의 난리법석을 모두 집어삼키고도 말 한마디 없이 웃고만 있는 저 거울 속 하늘”을 바라보며 “저 깨끗한 거울을 어떻게든 소유하고 싶다는/망상”에 사로잡힌다. ‘저 거울 속 하늘’과 대비되는 ‘방 안의 난리법석’의 아이러니. 거울 속 하늘. 거울 속 당신. 거울 속 당신의 완전무결한 글쓰기. 모든 것은 현실의 내가 만들어낸 환상이며 현실에서 불가능한 절대의 꿈이다. 거울 밖 나를 비웃는 듯 실내를 가득 점령하는 거울 속 당신의 웃음소리. 주체의 분열적 목소리는 현실의 “질서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매혹적인 혼돈에 대한 권리”, “누구보다 더 멋진 악몽을 꿀 권리”를 시인 자신의 것으로 삼으려는 무의식적 욕망인데, 앙장브망 “문득”의 ‘-ㄱ’은 그 모든 권리를 정지시킨다. “문득”의 ‘-ㄱ’은 무한한 꿈의 환상과 자기 파괴의 혼돈의 목소리를 중지시킨다. 내가 “정신을 차”리고 방의 현실로 착지하도록 한다. 앙장브망은 꿈과 현실의 간극에서 아이러니를 작동시킨다.
무한대의 꿈
분열적 주체의 목소리로 진술한 “당신은 당신 자신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시적 사유는 황유원 시의 변곡점이다. 세 번째 시집 『초자연적 3D 프린팅』은 그 사유의 확장과 변주이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서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이다’라는 명제로의 이행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나’를 규정하는 대답을 요청한다. 그 답변들은 ‘나는 ―이다’라는 문장으로 제출된다. 이름. 성별. 가족 관계. 직업. 국적 등의 규정성으로 정의된다. 이것들은 특정한 사회 현실 속에 위치한 나의 임의적 정체성이다. 나의 임의적 정체성은 인간 공동체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인류의 바깥에서 그 의미는 없다. 나의 의미와 정체성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나’는 인간의 언어로 규정되기 이전에 존재한다. ‘나는 ―이다’라는 문장으로 정의될 때마다 나는, 현재 나의 특정한 성질만 인간의 언어로 규정되고 인간적인 의미를 부여받는다. 나의 의미와 정체성은 인간 공동체 안에서 정립되고 “꿈결에도 밖에서 부르는 소리에 대답”(「밤다운 밤이 아닌 밤」)해야 하는 낮의 노동과 모든 법에 지배받는다. 현실 원칙과 인간의 법으로 규정된 ‘나’의 임의적 정체성은 참인 명제로 제출할 수 없다. 모든 의미는 인간의 언어로 규정되고 부여될 때만 생성되므로 인간의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나의 본래적 의미는 무(無)이다. 나는 모든 법의 바깥에서 무규정의 있음으로 존재한다. 인류의 시간 바깥에서 인간의 언어 이전의 나는, 의미의 ‘있지 않음〔無〕’의 있음으로 있다. 자연과 우주는 ‘나’처럼 의미의 ‘있지 않음〔無〕’의 있음으로 있어왔고 나의 죽음 이후에도 의미의 ‘있지 않음〔無〕’의 있음으로 있을 것이다. 그것은 초자연적이고 초역사적이며 절대적이고 무한하다. 그 실재적 무한 속에 인간적인 의미와 이유는 없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다’라고 규정될 수 없다. 실재의 무한 속에서 ‘나’는 ‘비어〔空〕’ 있다. ‘나’는 발화할 때만 출현하는 나의 환상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 이미지이다. 실재의 무한과 우주의 시간 속에서 나의 유한한 ‘있음’은 꿈과 다르지 않다. 그 사유의 지점에서 황유원 시의 꿈과 현실의 경계는 사라진다.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여몽환포영」)은 현실은 꿈이 되고 꿈은 현실이 된다. ‘무한대의 밤’이 시작된다. 밤은 꿈이 펼쳐지는 무한의 무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매번 꿈에서 깨어난다. 현실에서 고통 받는 자신을 발견한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영원히 깨지 않는 꿈을 꾸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비밀을 모두 파헤치는 꿈을 꾸었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
…중략…
눈을 뜨고도 생생한 꿈이어서
도무지 꿈 같지가 않았다
무한대의 밤을 그어 한번 터진 환희는 과연 멈출 줄을 모르고
깨고 나니 꿈이었다
―「무한대의 밤」 부분
황유원 시의 고유한 미학은 구체적 삶의 순간을 구어체에 가까운 일상어로 포착하고 일상어의 분절과 비속어의 유머, 다성적 목소리와 다변의 이야기를 통해 저 시적 사유의 꿈과 현실로 이끄는 강력한 말의 리듬에 있다. 시 「무한대의 밤」은 시집 『초자연적 3D 프린팅』까지 질주한 황유원의 가장 강력한 말의 리듬이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는 문장의 무한 반복과 변주는 ‘꿈에서 깨어나기’와 ‘영원히 꿈에서 깨어나지 못함’의 무한대의 꿈과 현실을 창조한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는 문장의 무한 반복은 “밤의 행글라이더는 밤의 행글라이더”(「밤의 행글라이더」)처럼 모든 순간을 자유롭게 기술할 무한 자유를 제공하고 그 일상의 모든 현실을 꿈으로 만드는 기적을 일으킨다. 무한한 꿈의 지속과 정지, 꿈의 선회와 착지의 무한 운동 효과를 발생시킨다. ‘꿈에서 깨어나기’와 ‘영원히 꿈에서 깨어나지 못함’의 아이러니와 웃음을 유발한다. “깨고 나니 꿈이었다”는 문장 단위의 행간걸침, 일종의 앙장브망으로서 꿈과 현실의 관계를 전복한다.
그러나 네 손가락 위를 기어가던 무당벌레는
손가락이 끝나면 그 끝에서 양
날개를 펼치곤
붕
날아가버리고
뒤에 남겨진 손가락은 날아가는 무당벌레를 한동안 멍
하니 바라만 보다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와
뒤늦게 자판이나 두들긴다
―「초자연적 3D 프린팅」 부분
앙장브망 “양”, “붕”, “멍”의 받침 자음 ‘-ㅇ’은 무한대의 밤에 펼쳐진 꿈, 절대에의 추구가 사실은 현실의 삶이며 고통스러운 현실의 삶은 꿈이었음을 자각시키는 효과와 다르지 않다. 다시, “깨고 나니 꿈이었다”는 문장은 무한 반복되어서 꿈과 현실의 분별은 불가능해진다. 현실의 최대화가 꿈의 최대화로 전복되는 경이. 보이는 것 너머 보이지 않는 것. 사이. 행간의 목소리와 침묵의 발자국. 그 무엇과 아무것도 아닌 것. 사이. 무(無)의 울림. 배음. 삶의 유한과 꿈의 무한. 사이. 유한한 육체와 무한한 침묵. 사이. 존재의 운동과 부동. 사이. 앙장브망. 무한대의 밤. 꿈의 현실이 펼쳐지고 무한대의 밤. 현실의 꿈이 펼쳐진다. 앙장브망의 도약대에서 꿈과 현실의 세계가 동시에 펼쳐진다. 황유원은 무한한 꿈의 현실주의자이다.
방에 새가 들어왔다
그 새는 보이지 않으므로
어디 앉아 있는지 알 순 없지만
새의 눈은 무서우리만치 차갑고
단호히 빛나고 있다
보석이 빛을 발하듯
벌레들이 울 때 그 빛의 조도가 오르락내리락거리듯
그러나 미동도 없이
고요하므로 방으로 불어오는 모든 바람을 잠재우고
모든 풀의 움직임을 정지시키며
그것은 있다
나무로 만든 조각품 같은 그것이
나를 쪼아먹을 듯 노려본다
나 같은 건 눈에 백 번쯤 집어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듯
칼날 같은 눈으로 지켜본다
그것은 칼로 깎아 만든 것이므로
칼이 주는 고통의 섬세함을 잘 알고 있다
책 같은 건 칼을 꽂아두는 칼집에 지나지 않는 것
날이 부서진 문장 같은 건 없다
나는 그 새 앞에 무릎을 꿇는다
친구여 이제 그만 일어나게
라고 말해주는 이는 없었으므로
조금 있다가 스스로 일어난 다음
방 한가운데 가만히 서 있어본다
어느덧 사람들이 모여들어
내 주위에서 둥글게 박수를 친다
자욱한 박수 소리는
아무래도 빗소리처럼만 들리고
빗소리는 박수 소리처럼은
도무지 들리지 않는데
이제 박수가 끝나도
비는 내리고
박수를 친 사람들 모두 퇴장한 자리 위에도
비는 내린다
내 방이 물에 잠긴다
어디 떠내려가지도 못하는 내 방이
자욱해진다
새는 빗속을 나는가
―「모조 새」 전문
반년간 『쓺』 2023년 하반기
김현문학패 수상 작가론
<200자 원고지 60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