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니 시에서 ‘이름’과의 대화
이스라엘 백성이 그 신의 이름을 묻는다면 그 답변은 무엇이냐는 모세의 물음에 신은 다음과 같이 답한다. “나는 곧 나다…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시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시다.’ 이것이 영원히 나의 이름이 되리라. 대대로 이 이름을 불러 나를 기리게 되리라.”(출애굽기 3:14-15) 그리고 신은 자신의 이름을 다음과 같이 거듭 분명히 밝힌다. “나는 야훼다. 이것이 내 이름이다.”(이사야 42:8)
한국어 ‘야훼’로 번역한 신의 영어(God) 이름은 ‘The LORD’, 프랑스어(Dieu) 이름은 ‘L'Éternel’이다. 그런데 정통주의적 입장의 개역 개정판에서는 여호와로, 비교적 최근에 나온 새로운 번역에서는 주님으로 번역한다. 이는 신의 고유한 이름, 네 글자 ‘야훼(YHWH 혹은 YHVH)’, 이 이름을 히브리어에서는 발음하면 안 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너무나 거룩한 신의 이름을 함부로 발음하는 것을 불경스럽게 여겨서 ‘주님’, ‘The LORD’, ‘L'Éternel’로 비유하여 번역한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신 자체를 가리키는 네 글자, ‘YHWH’이다. 네 글자 영어 ‘YHWH’는, 히브리어(יהוה)에서처럼 모두 자음으로 되어 있다는 점에서 ‘YHWH’을 발음할 수 없고 신의 이름을 온전히 부를 수 없다. 무엇보다 히브리어(יהוה)에 대응하는 ‘YHWH’ 자체를 발음할 수 없고 이름 부를 수 없다는 점은 신학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문학적 관점에서도 주요한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영원(L'Éternel’)하고 무한한 실재인 신을 유한한 인간의 특정 언어로 발음하면서 특정 이름으로 한정하고 지시할 수 없음을 함의한다. 신은 인간의 언어로 재현 불가능한 실재임을 함의한다.
“나는 곧 나다”로 번역된 영어 문장 “I AM WHO I AM.”와 프랑스어 문장 «Je suis celui qui suis.»에서 신은, ‘스스로 있는 자’, ‘나는 내가 누구냐고 묻는 나’이다. “I AM”의 ‘AM’, “Je suis”의 ‘suis’는, ‘be’ 동사와 ‘être’ 동사가 의미하는 바와 같이 존재의 ‘있음’과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이다’를 함축한다. 신은 현재 ‘있는’ 모든 존재이며 모든 것이 ‘된’ 존재이자 모든 것으로 ‘될’ 존재이다. 그런 점에서 ‘I AM’의 시제는 현재로 한정할 수 없다. 신은 현재에만 있는 존재가 아니라 무한한 과거부터 현재까지, 현재부터 완료될 수 없는 영원한 미래까지 존재하므로 ‘I AM’의 시제는 미완료 시제이다. 모든 것의 기원이며 모든 것의 근거로서 스스로 존재하는 신. ‘나’는 무한히 있었고, 있고, 영원히 있을 존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걸쳐 스스로 만물의 근원으로서 모든 곳에 편재(遍在)하는 실재이다. 모든 곳에 현존하는 부재이다. 있지 않음의 있음이다. 언어 이전의 ‘있음’이다. 그러므로 유한하며 우연한 존재인 인간의 언어로 신을 지시할 수 없고 이름 부를 수 없다. 인간의 어떤 언어로도 신을 재현할 수 없다. 신의 이름. ‘YHWH’는 이름 부를 수 없는 신을 암시하는 자음이다. 자음 ‘YHWH’는 신의 실재에 대한 언어의 재현 불가능성을 명시한다.
플라톤은 사물의 이름에 대한 헤르모게네스의 규약주의와 크라튈로스의 자연주의 논쟁 속에서 그 논의의 올바름을 각각 검토한다. 헤르모게네스는 “누군가가 어떤 것에 무슨 이름을 붙이든 그것이 올바른 이름”이며 “어떤 이름도 각 사물에 본래 자연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관습을 확립하고 이름을 붙이는 규칙과 관습에 따라서 있는 것”이라는 이름의 규약주의를 주장한다. 헤르모게네스의 규약주의는 사물의 본성과 무관하게 사람들이 각자 명명하고 관습적으로 호명하는 언어의 자의성과 사회성이다. 이에 대하여 “있는 것들 각각에는 저마다 올바른 이름이 본래 자연적으로 있다. 그리고 이름이란 사람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어떤 것의 이름을 부를 때, 그렇게 부르기로 합의하고 부르는 언어의 조각이 아니다. 오히려 이름을 붙이는 올바른 규칙은 본래 있는 것이며, 그것은 그리스 사람이든 이민족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똑같다”고 크라튈로스는 주장한다. 크라튈로스의 자연주의는 이름이란 사물들에게 본래 있으며, 본래의 어떤 올바름을 가지고 있음에서 기원한다. 사물의 본성을 모방해서 명명한 것이 이름이며 이름은 ‘자연의 상(像)’, 그 ‘닮음’을 통해 사물의 개괄적 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사물의 본성을 따르는 이미지로서 이름은 ‘자연적으로 있다’는 것. 그것이 크라튈로스의 자연주의이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이름에 관한 사유를 전개한다. 소크라테스는 최초 이름들의 올바름 여부, 최초의 입법가들이 각 사물에 적합한 본래의 이름을 음성과 음절로 구현하지 못한 오류의 가능성을 언급한다. 그것이 헤르모게네스의 규약주의가 지닌 결점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름의 올바름은 사물이 어떠한지를 드러내는데 있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는 “이름들로부터가 아니라, 있는 것들 자체로부터 배우고 탐구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자연의 상, 그 닮음의 이미지로서 이름들이 잘못 배정될 수 있음을 언급한다. “이름들 없이도 ‘있는 것들’에 관해 배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름 없이’ 실재하는 존재를 설명하지 못하는 크라튈로스의 자연주의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는 이름 없이 존재를 호명할 수 없고 사물의 본성을 배울 수 없으므로 헤르모게네스의 규약주의가 지닌 이름의 ‘합의’를 수용한다. 자연의 상, 닮음의 이미지. 그 이름 속에 사물의 실재가 부재하므로 사물의 실재 자체로부터 배워야 함을 인식하면서 크라튈로스의 자연주의를 보완한다. 이것이 플라톤의 이름에 관한 사유로서 언어의 특성에 대한 성찰이다.
스테판 말라르메는 ‘yx 각운의 소네트’에서 프랑스어로 활용할 수 있는 모든 ‘yx, ix[iks]’를 한 편의 시에서 모두 사용한다. ‘줄마노onyx’, ‘불사조phénix’, ‘소라껍질ptyx(또는 작은 주름)’, ‘지옥의 강styx’, ‘수정nixe(또는 물의 요정)’, ‘붙박이다fixe’라는 프랑스어의 희귀한 각운 ‘[iks]’가 한 편의 시에 집약된 시이다. 말라르메는 1868년 5월 3일, 친구 르페뷔르(Eugène Lefébure)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ix 각운을 셋밖에 얻어내지 못했으니, 형들이 의논해서 ptyx라는 낱말의 진짜 뜻을 내게 알려주거나, 어떤 언어에도 이 낱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해주세요. 존재하지 않는 편이 훨씬 더 좋을 것 같은데, 각운의 마술로 그 말을 창조한다는 매혹을 누리기 위해서지요.” 그리고 그는 문학의 진화에 관한 설문에서 “하나의 대상을 명명하는 것, 그것은 시를 즐기는 기쁨의 사분의 삼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시를 즐기는 기쁨은 그것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추측하는 행복에 있습니다. 대상을 암시하는 것, 거기에 꿈이 있습니다. 암시는 상징을 구성하는 그 신비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것이라고 답변한다.
소라껍질 또는 작은 주름으로 번역된 ‘ptyx’는, 사실 ‘yx 각운의 소네트’를 쓰던 당시의 말라르메 자신조차 알지 못하는 낱말로서 친구에게 그 의미를 묻고 있다. 주름(pli)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지는 ‘ptyx’는 말라르메가 프랑스어로 최초로 단 한 번만 사용한 낱말로 전해질 뿐 ‘로베르(Le Nouveau Petit Robert, 1993)’ 프랑스어 사전에는 그 낱말조차 등재되어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 모음 없이 자음만으로 된 낱말 ‘ptyx’는 ‘소라껍질’로도 ‘작은 주름’으로도 확정되지 않은 어떤 사물의 이름이다. 더 나아가 시에서 ‘ptyx’는 호명만 될 뿐 시적 공간인 “빈 객실의, 장식장 위에” 부재하는 사물의 이름이다. ‘ptyx’ 낱말은 부재하는 사물보다 앞서 현전하고 각운의 형식은 의미를 만들어낸다. “무(無)가 자랑하는 이 물건”, ‘무(無)’이다. 오직 ‘ptyx’라는 소리가 ‘yx, ix[iks]’ 각운들과 함께 공기를 진동시킨다. ‘ptyx’라는 사물의 순수 관념이 우리의 의식 속에서 음악적으로 솟아오르도록 암시(allusion)하고 환기하면서 사라진다. ‘yx, ix[iks]’ 각운이 반복될 때마다 확정할 수 없는 미지의 어떤 사물, 의미의 미지 ‘X’가 환기되면서 암시되고 ‘없으면서 있는’ 사물이 저 부재의 장소에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호명된 사물의 잔영이 어떤 새로운 분위기 속에 잠겨드는 것”이다. “몇 개의 발성(發聲)으로, 마치 주문(呪文)과도 같이 세속 언어와는 별개의 새롭고 온전한 어휘를 재창조하는 시구는 말의 완전한 독립을 이룩”하는 것이다. ‘ptyx’는 “지시적 의미 바깥의 의미 불확정 언어를 창조함과 동시에 그 새로운 의미를 암시”하고 환기한다.
말라르메는 일상 언어의 지시적 의미를 확정하는 이름을 제거한다. 그는 “복수(複數)이며, 최상의 언어가 없다는 점에서 불완전한 언어”(「운문의 위기」)의 우연성, 그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제거한다. “단 한 번의 발음에 의해 물질적으로 진리 그 자체로 될 낱말들을 아무도 말할 수 없도록 저지”(「운문의 위기」)한다. 말라르메는 사물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면서 말한다. 그 이름은 명명되거나 발화되지 않으면서 사물의 순수 관념을 암시하고 환기하면서 백지 위에 씌어지고 지워지면서 무한 생성중이다. ‘이것은 …이다’.
4. 사전의 완성
신은 창조자로서 들짐승과 새를 모두 진흙으로 빚어 만들어 주고 최초의 인간(Adam)이 무슨 이름을 붙이는지 지켜본다. 아담은 그 동물들에게 각각의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그것이 그대로 동물의 이름이 된다.(창세기 2:19) 그리고 아내를 인류의 어머니라 해서 이브(Eve)라고 이름 지어 부른다.(창세기 3:20). 최초의 인간. 아담이 최초 이름의 입법자로서 동물의 본성에 따라서 이름을 지었는지 아니면 자의적으로 명명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아담은 인간의 언어로 세상의 모든 사물을 최초로 명명하고 호명했다는 점에서 시인이며 최초의 사전 편찬자이다.
“시인은 자신의 창안물들이 느껴지게, 만져지게, 들리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가 저편으로부터 가져온 것에 형체가 있다면 형체를 부여하고, 형체가 없다면 형체 없음을 부여해야 합니다. 하나의 언어를 찾아낼 것. ―더하여, 모든 말은 사상인 만큼, 보편적 언어의 시대가 올 것입니다! 그 언어가 어떤 것이든 간에, 그 사전을 하나 완성시키려면 학술원 학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언어는 영혼을 위한 영혼의 언어, 냄새와 소리와 색채 그 모든 것을 압축하면서 사상을 낚아 끌어내는 사상일 것입니다. 시인은 자기 시대 보편의 영혼 속에서 깨어나는 미지의 양을 좌우할 것입니다.”
아르튀르 랭보는 아담이 명명한 모든 사물의 이름을 새롭게 명명한다. 랭보는 ‘내가 아닌 모든 것’, 타자(autre)가 된 투시자(voyant)로서 감각한 모든 사물을 시인 자신만의 언어로 명명한다. “절대적으로 현대적”(「고별Adieu」)인 하나의 사전을 완성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랭보는 모음들에 각각 “A 흑색, E 백색, I 적색, U 녹색, O 청색”(「모음들Voyelles」)을 부여하고 그 형상에 새로운 의미를 정의한다. 모든 언어는 모음 없이 말할 수 없다. 그런 이유로 랭보의 시는 발화될 때마다 색채 상징의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의 공감각적 의미가 채색되는 고유한 언어 사전을 발명한다.
어느 날 신은 아브람(Abram)에게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창세기 12:1)라고 명한다. 아브람이 주저 없이 신의 분부에 순종하여 고향 갈대아 우르(Ur of the Chaldeans/Ur en Chaldée)를 떠날 때, 아브람의 나이는 75세였다. 아브람은 아내 사래(Sarai/Saraï)와 고향에서 모은 재산과 거기에서 얻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가나안(Canaan) 땅을 향하여 길을 떠난다. 사실 아브람은 자신이 가는 곳이 어떤 곳인지도 모르고 떠난다.(히브리서 11:8) 아브람은 신이 약속한 땅, 가나안에 도착하지만 곧장 정착하지 못한다. 이미 가나안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어서 근처 산악 지대로 가서 임시 천막을 쳐야 했다. 곧 다른 지역으로 길을 떠났는데, 그 지역은 너무나 심한 흉년이 들어서 이집트까지 가서 살아야 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아브람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기까지 이방인으로서 끝없이 이어지는 길과 사막, 산악 지대와 이집트를 유랑하고 기약 없이 배회하는 떠돎의 삶을 감내해야 했다. 신은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도 아들이 없는 99세의 아브람에게 나타난다. “네 이름은 이제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Abraham)이라 불리리라. 나는 너에게서 많은 자손이 태어나 큰 민족을 이루게”(창세기 17:6) 하리라 계약한다. “네 아내 사래를 사래라는 이름으로 부르지 마라. 그의 이름은 사라(Sarah)이다. 내가 그에게 복을 내려 너에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리라. 그에게 복을 내려 많은 민족의 어미가 되게 하”(창세기 17:15-16)리라 약속한다. 100세 아브라함은 91세 사라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는다. 그 아들은 신이 지어준 이름, 이사악(Isaac)이다. 이것은 성경에서 이름이 지니는 주요한 의미를 함의한다.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사래에서 사라로 재명명된 이름은 가나안에서의 완전한 정착과 모든 민족의 아버지와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부여하고 확립한다.
이에 모리스 블랑쇼는 아브라함을 통해 프란츠 카프카를 성찰하고 글쓰기에 대한 사유를 전개한다. 아브라함과 카프카를 경유한 글쓰기에 대한 블랑쇼의 사유는 『문학의 공간L'espace litteraire』(1955), 『카오스의 글쓰기L'Écriture du désastre』(1980), 『카프카에서 카프카로De Kafka à Kafka』(1981)를 관통한다.
이곳의 추방에 보태어진 저곳의 ‘배척’은 그 경계에서 나를 으스러뜨릴 수도 있지 않을까? 추방이 그 무엇도 (내가 아니라, 그 추방에) 거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였던 것은 아버지의 힘 덕분이 아닌가? …난 오래 전부터 사막에 와 있고, 그곳에서도 내가 그 누구보다도 비참한 이 시간, 가나안이 유일한 약속의 땅으로 주어져야 할 바로 이 시간, 그 모두는 절망의 환영일 뿐이다.
―프란츠 카프카, 「1922년 1월 28일 일기」,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85-86) 재인용. 강조는 원문.
홀로, 더구나 어둠 속에, 눈 속에 계속 헛발을 내딛게 되는 버림받은 길, 더구나 방향도 목적지도 없는 길 …사람들과 관계하는 나로부터, 사람들과 관계하는 나의 힘으로부터 난 버림받은 것이다 …난 사랑할 수 없고, 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으며, 난 추방당하였다.
―프란츠 카프카, 「1922년 1월 29일 일기」, 모리스 블랑쇼, 『문학의 공간』(86-87) 재인용.
공동체란 단지 하나의 환영에 불과하며, 공동체 안에서 여전히 말하고 있는 법은 망각된 법이 아니라, 법의 망각의 숨김이라는 것을 뜻한다. 글쓰기는 그리하여, 비탄과 비탄의 움직임과 뗄 수 없는 연약함 가운데, 충만의 가능성이 되고, 글쓰기가 도달하여야 할 유일한 것이기도 한 길 없는 목적과 어쩌면 일치하는 이른바 목적 없는 길이 된다.
―『문학의 공간』(75)
언제나 ‘아브라함’의 관점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어쨌든 카프카에게 있어서 세계로부터 쫓겨난다는 것은 가나안으로부터 쫓겨나 사막을 방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학의 공간』(88)
글쓰기라는 추방에 처해 쓰는 자. 그 추방의 장소는, 그가 선지자일 수 없는 자신의 고향이다.
―『카오스의 글쓰기』(118)
모리스 블랑쇼는 75세의 아브람에게 고향을 떠나라는 신의 ‘선고’를 주목한다. 한 인간으로서 태어나 성장한 고향, 삶의 확고한 근거지를 곧장 떠나라는 신의 말씀은 아브람에게 ‘추방’을 선고한 법이다. 그것은 사형 선고로서 사막의 삶이자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삶의 선고이다. 세속적 삶의 행복을 상실하고 공동체의 바깥으로 추방됨을 의미한다. 미지의 약속된 땅, 가나안에 정착할 때까지 사막과 산악지대, 이방의 길 위에서의 추위와 고독, 굶주림과 떠돎이 끝없이 예정된 시간이다. 한 인간의 예지로는 결코 예측할 수 없는 고통과 불안의 ‘목적 없는 길’이다. 추방과 배척의 길이다. 아브람은 고향으로 귀환할 수도 없고 가나안에 정착할 수도 없다. 아브람은 자신이 아브라함이 되리라는 것도 언제 아브라함의 이름을 얻게 되는지도 알지 못한다. 끝없는 이주와 사막에서의 떠돎이 언제 끝나게 될지 알 수 없다. 아브람은 다만 걷는다. 가나안에 도착하리라는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나아가는 떠돎의 한 걸음. 그 ‘죽어감’과 기다림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구원하리라는 믿음. 아브람 스스로 부여한 소명(召命)을 견지하는 것. 이것은 인간 아브람 스스로를 구원하는 발걸음이다. 인간 실존의 양태와 존재의 구원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블랑쇼의 아브라함에 대한 관점은 카프카의 실존과 글쓰기에 투영된다. 아브람에게 신이 있다면 카프카에게는 아버지가 있다. 카프카의 아버지는 가족과 공동체의 법에 복종하라고 명한다. 카프카는 그 법의 바깥에서 글쓰기를 수행한다. 카프카가 작품의 요구 앞에서 글쓰기를 수행할 때, 그는 아브람처럼 공동체와 법의 바깥으로 추방당한 자의 영원한 고독과 떠돎을 감내해야 한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고독과 절망과 떠돎의 글쓰기이다. 아브람이 언제 아브라함으로 되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카프카는 1912년 9월 22일 밤, 최초로 “이야기의 확실한 모습”을 스스로 확인하고 눈물까지 흘린 단편 「선고Das Urteil」를 단숨에 쓰기 전까지 고독과 떠돎 속에서 작품을 완성하지 못한다. 그는 문학에 헌신하지 못하는 자기혐오와 구원에 대한 염려, 글을 쓰지 못하는 재능에 절망한다. 아브람에게 가나안과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은 미지의 약속된 땅과 모든 민족의 아버지라는 정체성에 정착하는 것이라면 카프카에게 작품은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스스로 추방된 자의 고독과 떠돎 속에서 도달해야 할 글쓰기의 지점이다. 부재하는 작품의 근원이다. 아브람이 곧장 가나안에 정착하지 못하는 것처럼 카프카는 단편 「선고」를 완성하고서도 자신의 글쓰기에 정주하지 못한다. 카프카는 『변신』(1915)을 쓰고서도 자살 충동에 시달린다. 그는 목적 없는 길, 작품에 도달하지 못하는 떠돎의 글쓰기 앞에서 비탄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프카는 “작품의 요구와 자신의 구원이라 이름할 수 있는 요구”(『문학의 공간』),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정당화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글쓰기에 응답한다. 약혼과 파혼을 거듭하면서 끝낼 수 없는 구원의 글쓰기를 지속한다. 그리하여 카프카의 『성』은 유배 자체이다. 처음부터 고향과 가족의 삶으로부터 영원히 추방당한 서사이다. 『소송』은 추방 자체이다. 아브람이 언제 가나안에 정착하게 될지 알 수 없어서 떠도는 것처럼 카프카의 글쓰기는 언제 끝내야 할지 몰라서 미완으로 끝난다. 미완이 완성되는 글쓰기이다. “정해지지 않은 것을 결코 끝내려 해서는 안”(『문학의 공간』)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블랑쇼에게 아브람과 카프카라는 이름은 공동체와 법의 바깥으로 추방된 존재의 고독과 불안, 자기 존재의 구원에 대한 기다림과 죽어감, 끝없는 이주와 떠돎을 영원히 반복하는 글쓰기 자체에 대한 알레고리이다.
‘인간이라는 종(種)’을 절멸(Shoa)시키려는 사태의 현장에서 살아 돌아온 여자. 신이 지어준 이름. 사라(Sarah)가 울부짖는다.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사라. 사라와 함께 생환한 유켈(Yukel). 사라는 울부짖고 유켈은 그 사태의 현장에 대하여 침묵한다.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다. 사태의 진리에 대하여 완벽하게 말할 수 없다. 진리를 말할 수 있는 자는 죽었고 생존자는 기억할 때마다 고통스럽다. 사라는 울부짖다가 미친다. 유켈은 고통 속에서 침묵한다. 아우슈비츠. 그것은 재현 불가능한 사태이다. 언어 이전의 실재이다. 언어가 부재하는 진리이다. 무한한 어둠이며 침묵이다. 울부짖는 침묵이다. 무(無)이다. 없음, 무(無)가 아니라 ‘있지 않음의 있음’이다. 부재하는 현존. 그렇게 ‘있지 않음의 있음’을, 희게 쓰여진 백지의 ‘흼’을, 그 공백을, 공백의 상처를, 울부짖음의 침묵을, 언어가 되지 못한 자음과 모음을, 기호를, 시인은 어떤 이름으로 명명하고 글을 써야 하는가.
에드몽 자베스(Edmond Jabès)는 『질문의 책Le livre des questions』(1963)에서 시인의 자리를 책의 문간, 문지기에 놓는다. 시인은 아우슈비츠, 사태의 현장에 있지 않았다. 글쓰는 나는 사라와 유켈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 쓴다. “그 울부짖음에 나는 그대(유켈)와 사라의 이름을 붙”(89)인다. “어떻게 그대에게 그대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그대는 오직 울부짖음을 연장하기 위해서만 입을 떼거늘.”(90) 책의 문지기. 나는 글을 쓰면 쓸수록 울부짖음에 대한 글쓰기가 거짓말이 된다는 것을 자각한다. 재현 불가능한 글쓰기라는 것을 절감한다. 죽음 이전과 죽음 이후의 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내가 쓰는 책 속의 유켈은 자살하고 사라는 울부짖다가 미친다. 사라는 12년간 정신병동에 있다가 죽는다. 이 모든 사태의 진리에 대하여 나는 하나의 이름으로 명명할 수 없다. 하나의 이야기로 정리할 수 없다. 한 권의 책으로 쓸 수 없다. 저 많은 사람들의 죽음과 이름 부를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과 죽어가는 생환자의 울부짖음과 자살한 사람들의 침묵에 대하여 하나의 이름으로 부를 수 없다. 하나의 이름으로 확정할 수 없다. 단 하나의 이름. 그것은 폭력이다.
진리는 끊임없는 발명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스스로에 반하며, 오직 잠정적인 것만이, 나뉘어질 수 있는 것만이 진실하기 때문이다.
―『질문의 책』(275)
“명백함은 놀라운 것을 죽”(259)인다. 그러므로 나는 책의 문지기로서 쓴다. 거짓말일지라도, 허구의 책일지라도, “책의 죄를 짊어”(96)질지라도, 사태의 진리에 대하여, 망각에 대하여, 거듭, 다른 이름들을 써야 한다. “끊임없이 지우고, 끊임없이 층들을 벗겨내고, 그 이름을 떼어버려 마침내 그 이름이 발음할 수 없는 이름이 되”도록 써야 한다. “언어는 모든 것이다. 언어는 매번, 가장 사소한 요소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우리 눈앞에 재현해주기 때문이며, 우리가 모든 것에 이를 수 있는 것은 언어 덕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이기에, 언어는 또한 어떤 것도 아닌 무”(345)(강조는 원문)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단어는 우선은 벌 떼였다가 이름이 된다. 두 개의 이름이 내 마음과 정신을 두고 다투었었다. 나는 그 이름들을 내 자신의 밑바닥에서 찾아내었으며, 그것들의 존재는 나에 의해 어둠 속에서 체험된 존재”(304)인 것이다. 단 한 권의 책이 아니라 복수(複數)의 책 속에서, “시간 안과 시간 밖에서의 무한한 대화”(「섭리-에드몽 자베스와의 좌담」)가 탄생하도록 독자들이, 침묵 속에서, 수많은 이름들을, 익명의 이름들을, 부재의 얼굴들을, 백지의 증언들을 만나고 질문하도록 써야 한다. 그 글쓰기의 어려움은 존재의 어려움과 다르지 않다. 글쓰기가 무(無)에 이르는 도정이라면 존재는 죽음에 이르는 도정이다. 무(無)와 죽음 앞에서 글쓰기와 삶은 고통스러울지라도 멈출 수 없다. 끝까지 질문하기를 멈출 수 없다. 저 울부짖음은 어떤 이름인가.
그대 이름이 한 글자만을 가졌다면, 그대는 그대 이름의 문간에 있다.
그대 이름이 두 글자를 가졌다면, 두 개의 문이 그대의 이름을 열어젖힌다.
그대 이름이 세 글자를 가졌다면, 세 개의 돛이 그대 이름을 실어간다.
그대 이름이 네 글자를 가졌다면, 네 개의 수평선 아래 그대 이름이 잠긴다.
그대 이름이 다섯 글자를 가졌다면, 다섯 권의 책이 그대의 이름을 열람한다.
그대 이름이 여섯 글자를 가졌다면, 여섯 현자가 그대 이름을 해석한다.
그대 이름이 일곱 글자를 가졌다면, 일곱 개의 가지가 그대의 이름을 불태운다.
―『질문의 책』(94-95)
내 이름은 내 고통 안에 있다. 내 고통에는 이름이 없다.
―『질문의 책』(419)
2023년 『포지션position』 여름호
<원고지 71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