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어 혼자서도 갈 수 있는 바
혼자 바에 가는 것은 못해볼 것 같았는데 책 읽는 바가 있어 가능했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듯 술 한 잔 시켜놓고 혼자 사연있어 보이는 얼굴로 앉아있는 것은 역시 못하겠다. 집에서 1분 거리에 있는 개성있는 바를 매번 궁금해하며 지나쳤는데 이사 가기 전에나 가보자고 미뤘고 그건 내가 안갈 것을 아는 마음이었다. 곧 바 디자인을 해야해서 시장조사라는 명목도 생겼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부터 왠지 책바는 혼자서도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서 책읽으면 되니까 뭘하지 멍때리며 민망하지 않을 수 있고, 칵테일 메뉴도 책 컨셉이라 마셔보고 싶었다. 그래도 역시 바라니 마찬가지로 망설여지긴 했고 어제도 가려고 계획한 건 아니었는데, 금요일 야근으로 취소된 일정 대신 뭔가가 필요해서 충동적으로 정했다.
유명해지고 있는 건 알았지만 만석이라 놀랐다. 금요일 저녁에 한적한 이 동네에 와서 조용히 술마시며 책읽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있다니. 처음엔 책 평대 자리에 앉아있다가 다행히 사장님이 바 자리로 옮겨주셔서 항상 궁금해했던 바 자리의 감성도 느껴볼 수 있었다.
메뉴에는 소설 속 주인공들이 마시던 술도 있고 소설이나 시를 바탕으로 만든 메뉴도 있는데, 다음에 와서 찬찬히 읽어보기로 하고 일단 눈에 들어온 압생트 베이스의 칵테일을 주문했다. 압생트는 툴루즈 로트렉이 마시던 거라니까. ‘초록 요정’이란 별명 때문인지지 자몽이 들어간 자몽빛 컬러인데도 초록색 맛이 연상되는 맛이었다. 지금 내게 와닿는 맛은 아닌데 뭔가 하이텐션이 될듯한 향이 있다. 나중에 찾아보니 향쑥이란 재료 때문인가 보다.
서가를 둘러보니 읽어보고 싶던 책들이 몇 권 보이는데, 공간이 낯설다보니 익숙한 책을 읽고싶어서 전에 다른 책을 읽어본 박찬용 작가의 ‘우리가 이 도시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를 골랐다. 잡지 에디터 일을 동경하는 건 화려해보여서가 아니다. 자신만의 시선으로 주제를 기획하고 여러 현장을 누비고 다양한 사람과 인터뷰를 나눠서 만든 흥미로운 컨텐츠가 지면에 담긴 구체적인 결과물이 된다는 것이 부럽다. 그렇지만 작가님의 트레바리 모임에 놀러갔을 때 들었던 것처럼 그 일을 좋아하지만 그 일을 너무 즐기는 건 아니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일은 역시 일이고 밖에서는 구체적인 단점을 알 수 없는 것인가. 디자이너가 에디터와 분야는 다르지만 비슷해서 공감되는 내용들이 있었다. 재밌는 일을 기대하며 회사를 다니면서, 주변의 수많은 재능 사이에서 뭔가 만들어내려고 애쓴다는 점에서. 이 도시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지만, 주어진 삶과 일에서 스스로 즐거움을 찾아내고 주변 사람들을 생각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 이런 마음이 들게 하는 내용이 재밌는 에피소드로 들어있어서 좋았다 이 책이.
음악이 좋아서 더 있고 싶었지만 체력이 다해서 다음에 다시 오기로. 앞으로 만날 새로운 칵테일과 책의 페어링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