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_이탈리아 피렌체 4박 5일
혼자서 여행을 시작한 지 열흘 정도가 지나게 되면 긴장감이 조금씩 사라지고 혼자 보고 돌아다니고 먹는 것에 대해 조금씩 즐거움을 잃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혼자 여행 경력자인 나도 그런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처음 파리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여럿이서 여행을 하는 사람들을 봐도 별생각 없었고 그저 이곳에서 예쁜 도시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했었는데 이곳의 장면이 무뎌지는 건지 슬슬 혼자 좋은 곳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처음과 다르게 그 기분이 오래 유지되는 것 같지 않았다. 머나먼 유럽까지 와서 새로운 도시를 가고 여행을 하고 있는 건 당연히 너무 즐겁고 감사한 일이지만 뭔가 아쉬운 마음.. 뭔가 완전하지 않은 느낌이 든다.
적극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지만 가입하고 자주 들락날락거린 유럽여행 카페가 있었다. 그곳에서 정보도 얻고 혹시 나와 스케줄이 맞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가끔씩 올라오는 글을 찾아보곤 했는데 막상 그런 글을 봐도 연락해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들 또래 친구들과 만나기를 원했고 그 또래가 대부분 20대에서 최소 30대 초반까지를 찾는 분위기라 40 찍은 나는 함부로 낄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렇게 보고 넘기다를 반복하다 나의 눈에 들어온 게시글 하나가 있었다.
오늘 피렌체에서 같이 저녁 먹어요!
성별, 나이 상관없습니다!
반가운 글이었지만 고민이 되었다. 나는 낯을 크게 가리는 성격이 아니다. 특기는 일대일 대화. 성별, 나이 불문 누구와도 말을 잘하는 편에 속하는 사람이라 괜찮은데 나이의식이 점점 커지면서 어린 친구들 사이에 끼는 건 보이지 않게 서로 불편한 것 같은 생각에(난 괜찮은데 그들이 괜찮지 않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톡을 보낼까 말까 몇 번을 고민하다 '안되면 말고'의 기법을 쓰기로 했다.
나이도 성별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 쿨한 주최자 덕택에 약속시간과 장소를 안내받고 저녁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그들만의 방식을 접하다.
누가 나오는지, 몇 명이 나오는지, 여자인지 남자인지..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않은 채 피렌체에 여행 온 한국인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식사 약속을 잡았다. 약속 장소 앞에 도착하니 모여있는 한국인 여자 세 명이 보였다. 역시 예상대로 앳된 모습이었고 다행히 인상 좋은 친구들이었다. 잠깐의 인사와 통성명 없이 티본이 유명하다는 오늘의 저녁을 함께 할 레스토랑으로 갔다.
현지인보다 한국인한테 더 인기가 많은 건지 레스토랑 대부분이 한국인인 데다 메뉴판을 열자 낯익은 얼굴의 외국인, 알베르토의 사진이 여기저기 있었다. 한국어 메뉴판도 따로 있을 정도로 한국인이 굉장히 많이 오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국인들과 한국어로 얘기하고 있는 데다 레스토랑 안 여기저기 사방에서 들려오는 한국어가 귀에 쏙쏙 박히니 마치 한국에 있는 이태리 레스토랑에 식사하러 왔는데 마침 서버분이 그냥 외국인인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낯가림이 살짝 있어 보이는 한 분을 제외하고 모두 처음 만난 사람 같지 않게 자신들의 여행기를 술술 얘기하기 시작했다. 다들 나와 비슷하게 여행을 시작했고 열흘, 보름이 지난 상태라 혼자 여행하는 것에 있어 피로감이 누적된 상태라고 했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도 무엇을 하는지, 어디에 사는지, 아무런 정보도 없는 상태였고 그렇다고 딱히 묻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같은 경험을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여행기를 즐겁게 공유할 수 있었고, 혼자여행 하면서 느낀 고충을 토로하며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며 서로에게 위로받기도 했다. 서로 다음에 갈 여행지에 대해 다녀온 분에게 미리 정보를 얻기도 하면서 좋았던 곳, 조심해야 할 곳, 맛집 등등 사소하지만 알아두면 도움이 될 부분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 밖에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같이 내가 이번 여행에 가는 곳은 아니지만 미리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니 간접 체험하는 것 같아 흥미진진했고 다음 여행지로 고려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이야기 하나하나가 재밌었다. 얘기를 하다 보면 대략적으로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하는지 유추가 되긴 했지만 다들 매너 좋으신 분들이라 그런지 사적인 얘기에 대해서는 적정선을 지키며 대화하고 있었다.
다들 오랜만에 여러 음식을 셰어 해서 먹어볼 수 있다는 기쁨에 나를 포함해서 모두 신나 보였다. 애피타이저를 시작으로 유명한 대왕 티본, 가장 맛있었던 발사믹 스테이크, 양이 엄청 많았던 봉골레 파스타, 추천받은 레드와인 한 병을 시켰다. 양이 생각보다 많아 다 먹지 못하고 남겼는데 홀을 돌고 계시던 매니저님이 우리 테이블로 오시며 물으셨다. "저희 셰프님이 지나가다 보셨는데 봉골레 파스타를 잘 안 드시는 것 같다며 혹시 맛이 별로인 건지 이유를 알고 싶다고 여쭤봐 달라고 하셨어요." 단지 양이 많아서 그런 것뿐인데 넘기지 않고 고객의 피드백을 궁금해하는 셰프의 자부심이 느껴져 이번 한 끼가 더욱 맛있고 기억에 남는 그런 식사가 될 수 있었다.
헤어질 때까지 우리는 자신들의 사생활을 아주 최소로만 얘기했고 서로의 이름 역시 알지 못했다. 대신 거의 식사가 끝나가고 와인에 알딸딸 해질 때 들려오는 그 질문이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다. "근데 다들 몇 살이세요?" 이런.. 나이 공개가 아무렇지 않은 20대 두 분, 뭔가 나만큼 당황한 것 같아 보이는 다른 한 분은 30대 중반, 나는 그분보다 훨 더 많은 찐 언니.. 진심으로 놀라는 그들의 리액션을 보니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했었는데 실패했다. '그래.. 이렇게 나이 많은 사람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겠지...' 좀 민망하고 칭찬(?) 같은 거 들으면 알러지 반응 생기는 나는 굳이 안 해도 되는 부가설명을 하고 말았다.
"제가 좀 철이 없어서 하고 싶은 거 다하고 살다 보니깐 나이보다는 좀 어리게 보는 것 같아요."
나이를 밝히고 나면 뭔가 그 나이답게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리고 상대가 나를 이전보다 덜 편하게 대하는 태도가 느껴지기 때문에 내가 나이를 밝히기 싫어하는 이유다. 나는 이름이 더 궁금했지만 누군가는 나이가 더 궁금한 거고... 이번 만남(?)을 통해 요즘의 방식 새로 알게 되었다. 즐거웠던 3시간 30분이라는 긴 식사를 마무리하며 아는 사이지만 모르는 사이처럼 쿨하게 서로의 남은 여행을 기원하며 헤어졌다.
‘굉장히 깔끔한데 정 없게 느껴지는 건 뭐지?’
모처럼의 즐거운 식사로 남은 여행기간은 즐겁게 여행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숙소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워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