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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현진 Mar 27. 2024

부자가 된 기분


어렸을 적, 부모님은 시험을 잘 보면 원하는 것을 사준다는 공약을 걸곤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의도 셨겠지만 시험준비보다는 상품을 고르는 일에 더 열심이었던 듯하다. 틈이 날 때마다 교과서를 펴기보다는 인터넷 쇼핑몰에 접속해 장바구니에 식물들을 넣었다 빼면서 위시리스트를 정리했으니까.


괜찮은 성적표를 받아오면, 그 주 주말에는 쇼핑몰을 운영하는 그 식물 농장으로 향했다. 당시엔 인터넷 구매가 활성화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는데도 한 시간이나 걸리는 그곳까지 아버지는 늘 차를 몰았다. 비닐하우스를 한 바퀴 구경하고 적어간 식물들과 그 자리에서 반해버린 식물들을 모두 담으면 큰 상자 하나가 가득 찼다.


식물 상자는 무거웠다. 그렇지만 어떻게 짐처럼 트렁크에 실을 수 있겠냐며 옆자리에 두고 가겠다고 하니 아버지가 그렇게 좋냐고 하셨다. 배웅해 주시던 농장 주인 부부는 아주 좋을 거라고, 부자가 된 기분일 거라고 대신 대답해 주었다. 집에 오는 길, 나는 상자 속의 식물을 보았고 아버지는 푸른 시골길을 달렸다.


작업실 이사를 마쳤다. 새 작업실에는 작지만 해가 잘 드는 베란다가 있어서 그간 위시리스트에 머물던 식물들을 몇 가지 데리고 왔다. 은방울꽃, 수선화, 델피늄, 디디스커스, 아이슬란드포피… 베란다 창틀에 앉아 이들을 천천히 본다. 오래전 그 봄날, 아버지의 차 뒷자리에 앉아 ‘부자가 되면 이런 기분일까’ 궁금해하던 것이 기억난다. 창 밖이 푸르다.


*월간 <환경과 조경(Landscape Architecture Korea)>에 2023년 5월호에 실린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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