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이치 사카모토의 오랜 투병을 알고 있었다. 그의 죽음이 하루라도 더 늦춰지기를 바랐다. 새 앨범이 나오고 온라인 독주회를 열고 다양한 장르의 협업 소식이 들리고 관련 전시회에 다녀오고 앨범을 다시 듣고 다시 듣고 다시 듣고 다시 들으며 그가 좀 더 살아있는 상태로 존재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얼마 전 그의 마지막 솔로 피아노 콘서트를 영상으로 기록한 OPUS를 보다가 그가 카메라를 향해 잠시 쉬고 다시 가자고 요청하는 장면에서 덜컥거렸다. 나는 모른다. 최후의 숨결을 다 쏟아부으며 스무 개의 곡을 마무리하기 위해 어떤 투지가 감행되어야 하는지. 그는 죽어가고 있었고 그 과정에서 서정과 격정 사이의 피아노 선율로 무언의 유언을 쓰고 있었다. (OPUS 앨범과 콘서트 다큐멘터리가 나오기 전) 그의 사망 뉴스를 들었을 때는 담담했다. 따로 추모하고 싶지 않았다. 1996 앨범을 처음 들었던 순간부터 남은 생애 모든 곡을 다시 들을 순간까지 모든 기간이 추모였다. 며칠 전 전람회 서동욱의 부고 소식을 들었다.
전람회라는 단어를 전람회 앨범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학생 때였다. 전람회(Exhibition)의 영문 스펠링도 마찬가지였다. 전람회가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던 순간부터 (이토록 많이 들을 줄 몰랐던) 몇 장의 앨범을 내고 신해철과 작업하고 김동률 앨범(귀향) 히든트랙(떠나보내다)에 서동욱이 함께하는 등 전람회는 음악이란 걸 처음 들었던 시기부터 지금까지 내면 가장 깊은 부분까지 닿았던 곡들을 만든 예술가 그룹의 이름이었다. 서동욱의 사망은 한 시대의 생명 신호가 영영 사라졌다는 소식이었다. 특히 전람회 2집은 완전했다. (평생 들은) 한국 음악 앨범 중 가장 충격적인 1번 트랙으로 꼽는 고해소부터 이방인, 유서, 마중가던 길, 새 등 다시 들으니 눈꺼풀과 아랫입술이 떨렸다. 인생에서 가장 추위를 느꼈던 시절의 노래들이었다. 들을 때마다 그때의 나를 연민할 수 있었다. 전람회의 곡들이 없었다면 이름과 방향이 없던 감정과 혼란은 더 오랫동안 길을 잃었을 것이다. 서동욱에 대한 소식은 그때 경험의 원본이 영원히 상실했다는 전언이었다. 갚지도 못한 빚을 진 대상이 영영 떠났고 빚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