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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약수 Dec 28. 2016

미야자키 이치사다, 《과거-중국의 시험지옥》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는 일본 교토학파의 거두로 다방면에 걸쳐 중국사 연구에 있어 탁월한 업적을 세운 학자다. 과거 삼국지에 많은 관심이 있었을 때 그의 대표작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구품관인법연구》를 읽어본 적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라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먹을 수 없었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조금 더 많은 게 보일 수 있을까? 



  이번에 읽은 《과거-중국의 시험지옥》은 그가 1963년에 발간한 교양역사서다. 주로 청대(淸代) 중후기 과거제도를 중심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일개 서생이 신진관료로 등용되는지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소개하고 있다. 청대에 정립된 과거제에 따르면 과거는 크게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학교시이고, 둘째는 과거시이다. 학교시는 말 그대로 학교에 입학하기 위한 시험이다. 지금의 우리나라에 비교하면 '수능'정도에 비교할 수 있을까? 학교시는 다시 현시 → 부시 → 원시의 세 단계를 거친다. 이 세 단계를 모두 거치면 '거자(擧子)'가 되고 각 학교에서 수업받을 수 있는 학생의 자격을 얻지만, 실제로 학교가 제구실을 한 적은 거의 없었다. 지금도 고등학교 선생들의 수업이나 대학교 교수의 강의는 시험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겨서 등한시하고 인강이나 학원을 찾아다니는 것과 비슷한 것 같다. 어쨌든 거자들은 각 성(省)별로 모여서 '향시'를 치러 본격적인 경쟁을 시작한다. 여기서 통과한 거자들은 '거인(擧人)'이라 불려진다. 이 거인들이 북경에 모여서 관료가 되느냐 되지 못하느냐를 결정짓는 '회시'를 치른다. 드디어 이 5번째 시험을 합격해야 겨우 관료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고 이들을 '진사(進士)'라고 부른다. 그다음 시험은 '전시'라고 하는데, 이는 황제가 직접 주관하는 시험으로 여기서는 등수를 가를 뿐 당락을 나누진 않는다. 다만 등수가 높으면 말 그대로 꽃길이 열리고, 등수가 낮으면 지방관부터 시작해서 먼 길을 우회해야 하는 어려움을 겪는다. 향시 → 회시 → 전시로 이어지는 과거시는 지금 우리나라의 '행시'나 '사시'에 대응될 수 있을 것 같다. 여기까지가 청대에 정립된 과거제도의 간략한 과정이다. 대략적인 과정만 나열해도 이렇게 복잡한데 실제 과거를 응시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었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중국 12세기 북송시기에 관심이 많은데, 송대를 연구함에 있어서 '과거제도'는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당송교체기는 '당송변혁기'라고까지 불리면서 중국 역사에 큰 변곡점을 형성하고 있다. 가장 주목할만한 변화는 1) 5대 10국 시기를 지나면서 귀족세력이 모두 몰락하게 되었다는 점, 2) 귀족이 몰락하면서 생긴 권력의 공백으로 사대부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 3) 황제가 가지는 권력이 막강해지면서,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관료제도가 형성되었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바로 '과거제'가 있다. 


  물론 과거제도는 수나라 문제 때 성립되어 당나라 때 정착되었지만, 당대(唐代)의 과거제도는 당시 귀족 제도를 뒷받침하고 있던 구품관인법과 함께 운용되다 보니 제한적인 영향력 밖에 가질 수 없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지적한 것처럼 당나라 현종 시기, 전체 관료 중에서 1/3만이 과거 출신이었을뿐더러 급제자의 상당수는 귀족들이었다. 과거제도가 절대적인 위상을 갖기 시작한 것이 바로 송나라다. 송대 과거제는 당대에 비하여 많은 변화를 겪는다. 크게는 두 가지 방면에 걸친 변화가 나타난다.


  첫 번째는 '전시'의 도입이다. 당대에는 '이부시'가 전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고 시험의 내용도 굉장히 주관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부시는 네 가지 기준에 따라 관료의 등수를 확정하는데, 각각을 신(身), 언(言), 서(書), 판(判)이라고 한다. '신'은 몸가짐, '언'은 말솜씨, '서'는 서예, '판'은 송사에서의 판결 능력을 의미한다. '판'이야 관료의 실무능력을 판단하는 것이라지만, 나머지 세 가지는 굉장히 주관적이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에 대해서 "굉장히 귀족스럽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일리가 있는 말인 것 같다. 틀린 말도 아닌 게, '신언서판'이라는 게 얼마나 '귀족다운 품격'을 지니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부시는 귀족 세계로의 편입을 담당하는 관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송나라 태조 조광윤은 전시를 도입함으로써 신진관료들을 직접 평가하고 선발하는 권한을 독점하였고, 황제에 준하는 위상을 갖는 귀족이 아닌 황제에 철저히 복속되어 있는 관료들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두 번째는 '과거제의 형식적 절차를 강화'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시험지 작성자의 이름을 가리는 '호명법'과 작성자의 원본을 관리에게 시켜 베껴 쓰게 하는 '등록법'을 들 수 있다. 호명법은 작성자의 이름만 보고 답안지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합격시키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서이고, 등록법은 과거에는 필체만 가지고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없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런 절차들을 추가함으로써 시험의 공정성을 높이고 진짜 실력 있는 관료들을 뽑고자 하는 황제의 의지를 드러내었다. 이 책에는 나오지 않는 에피소드이지만, 당송팔대가 중 하나인 소식은 지공거(과거시험의 책임자)가 되었을 때 자신의 제자인 이치를 합격시키기 위해 미리 문제를 빼돌려 주었음에도 일이 잘못 꼬여버리는 바람에 엉뚱한 사람을 장원으로 급제시키기고 말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이치의 모친은 앓아누워버렸고 소식은 자신의 제자도 알아보지 못한 죄책감에 시달렸다는데(출처: 진정, ≪중국 과거 문화사≫) 이러한 이야기만 보더라도 송대의 과거제가 얼마나 이전에 비해 엄격해졌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과거제의 변화는 앞에서 언급한 변화의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과거제도의 정비로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관료제도가 자리 잡고, 문치주의가 핵심적인 국정 운용 원리로 뿌리내렸기 때문이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에 대하여 '황제권력의 강화' 혹은 '황제의 독재체제 확립'이라고 평가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당나라에서 송나라로 넘어가는 시기를 중국의 중세가 끝나고 근세로의 진입이라 평가하는 나이토 고난(内藤湖南) 이래의 전통적인 교토학파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북송시기 황제가 직접 국정운영의 주체가 되어서 정국을 주도한 경우는 드물다고 생각한다. 태조 조광윤이나 태종 조광의 정도가 강력한 황제권을 행사했지 그 이후 인종, 진종시기는 범중엄, 구양수 등의 재상들이 정국을 주도적으로 이끌어왔다. 북송시기 과거제도의 정비는 황제의 강력한 의지를 관철하기 위한 의도에서 기획되었지만, 점차적으로 군신공치(君臣共治)를 뒷받침하는 제도적 기능을 담당하였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왕안석의 집권과 신법이다. 신법은 왕안석이 조타수가 되어 진두지휘 했지만, 신법을 이끌어 갈 수 있는 동력은 바로 신종의 강력한 의지에서 비롯되었다. 희령연간의 신법은 황제의 권력이 송대 정치구조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지는지 보여주는 사례일지도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대부와 관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구조가 작동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신법을 둘러싼 구법당과 신법당의 대립도 이러한 관점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과거-중국의 시험지옥》은 중국의 과거제도를 친절하게 설명해주면서 마지막 장에서는 이것이 가지는 역사적인 의미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분석하고 있다. 교토학파다운 실증주의적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라 하겠다.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중국 과거제도가 가지는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정부가 교육에 대해 무책임하고, 이를 민간에다 위임버린 점'을 지적한다. 이는 오늘날 '로스쿨과 사법고시'를 둘러싼 논쟁에도 어느정도 참고할만한 시사점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사법고시를 존치해야 해야 한다는 입장에서는 로스쿨이 '현대판 음서제'라고 비판하는데, 그렇다면 사법고시는 '현대판 과거제'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송대에 기반이 잡힌 중국의 과거제도는 명나라와 청나라를 거치면서 점점 '떨어뜨리기 위한 시험'으로 그 의도가 변질되기에 이르렀다. 시간이 흐르면서 관료시스템이 팽창하는 속도보다 과거 응시자수가 늘어나는 속도가 월등히 빨라지다보니 각종 중간과정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향시-회시-전시로 이루어진 기본적인 과거 시스템에 2차 향시라 할 수 있는 거인복시, 2차 회시라 할 수 있는 회시복시 등등이 새로이 추가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렇게 변질되어버린 과거제도는 공공교육의 마비를 초래하였다. 학교를 다니기 보다는 개인교사를 고용하여 과거제도만을 위한 공부를 하는게 훨씬 유리하다보니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학교가 제구실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공공교육 시스템이 붕괴되자, 과거제는 특정 계급만을 위한 시스템이 되어버렸다. 미야자키 이치사다가 지적한 것처럼 국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러한 현상이 전혀 손해될 건 없다. 교육시스템을 운용하여 관료를 등용하든, 과거제를 통해서 관료를 등용하든 얼마든지 관료시스템은 충분히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히려 교육을 민간에 맡겨버림으로써 교육시스템을 운용할만한 재정을 다른 곳에 투여할만한 여유도 있기에 반가울지도 모르겠다.


  인터넷 댓글을 보면 음서제보다는 과거제가 훨씬 공평한 시스템이라고 하지만, 중국의 과거제가 어떤 변화를 겪었고 어떤 사회문제를 낳았는지 살펴본다면 과연 시험제도가 현대 복지국가의 역할에 부합하는 제도인지는 다시한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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